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20)
바다새와 늑대 (219)화(220/347)
#63화
“일단, 죽음의 호수에 가보긴 해야겠지.”
물자는 그 뒤에 배로 돌아가면서 사면 된다며 우투그루가 말했다. 도멤은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입장 시간이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아무래도 우리가 가서 할 게 사람들 이목을 끌지 않는다는 자신은 없는데.”
“학자들처럼 연구 목적으로 신청을 넣어봐야지.”
우르르 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골목으로 비켜선 일행은 일단 죽음의 호수로 향하기로 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걸으며 그들은 모두 우투그루의 말에 찜찜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로트렐리가 물었다.
“쉽게 허가가 나올까? 학자들은 보통 어디 학계 소속이라고 하면서 다니지 않아?”
“모르지. 일단 가서 상황 보고 생각하자고.”
“우투그루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는구나.”
도멤의 말에 우투그루는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죽음의 호수는 항구에서 한참을 가야 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도멤이 말했다.
“어디서 말이나 마차를 빌려주지는 않는 걸까?”
“보통 직접 데려오겠지. 그리고 괜한 곳에 돈 쓸 생각 마.”
“우투그루 짠돌이.”
도멤이 입을 비죽이자 우투그루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건강하고 체력도 좋은 이들이라 곧잘 걷고 있었지만 보통은 벌써 지쳤어야 할 시간이었다.
우투그루의 말대로 직접 공수한 것이든 섬에서 빌린 것이든, 그들의 옆으로 간간이 마차와 말들이 지나다녔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행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더위를 타는지, 키이엘로가 때때로 손부채질을 해댔다.
로트렐리의 품에서 발카는 피곤한 어투로 말했다.
『계속 네 품에 있으려니 숨 막혀.』
“별수 없어. 아니면 혼자 배에 가 있을래?”
『그건 더 싫어!』
발카는 팩 토라져서 말하고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발카의 크기가 더 작아졌다. 거의 벌새만큼이나 작아져서 한 손에 들어오는 발카의 크기에 로트렐리는 깜짝 놀라 속삭였다.
“뭐야?”
『이 정도 크기면 바다새라고 오해받지는 않겠지? 잘 보이지도 않을 것 아냐.』
그러더니 발카는 로트렐리의 품에서 벗어나 그녀의 후드 아래 쏙 들어갔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키이엘로가 신기하다는 듯 작게 물었다.
“그렇게 작아질 수 있으면서 왜 그동안은 큰 크기로 있던 거야?”
『생각보다 편하진 않아, 몸을 마구 구겨서 작은 상자에 들어있는 기분이란 말야.』
“음.”
그건 좀 불편하긴 하겠네. 키이엘로가 짧게 대꾸하는 것에 로트렐리가 말을 덧붙였다.
“하긴, 발카는 처음 만났을 때는 엄청 커다랬어.”
“얼마나?”
“거의…… 작은 범선만큼? 큰 깃털 하나에 내가 누울 수 있는 크기였지.”
그 말에 키이엘로는 순전히 감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텐도 엄청 컸는데. 네가 말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소의 두 배정도 크기였어.”
“그게 나름 줄인 크기였다는 게 신기하다.”
“그렇지?”
키이엘로는 가볍게 웃으며 동의했다. 로트렐리는 그가 텐의 이야기를 꺼내는 기색이 퍽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내심 안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근래 키이엘로는 다소 의기소침해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때 앞서가던 우투그루가 그들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아주 소풍 왔지? 뭘 그렇게 떠들어대?”
“우와, 질투한다. 무서워라.”
“닥쳐! 누가 질투야!”
로트렐리의 평탄한 말에 우투그루가 버럭 외쳤다. 그게 오히려 로트렐리의 장난기에 부채질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가엾은 우투그루는 한참을 놀림 받아야 했다.
급기야 옆에서 우투그루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대며 그 난장판에 참전을 알린 도멤에게까지 놀림 받는 우투그루를 한심하다는 듯 일별한 키이엘로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길옆의 목초지에서 목동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소란을 피워서인가? 후드 아래로 슬쩍 주변을 살핀 그는 이내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의아하게 목동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목동은 정말 단지 시선만 줬을 뿐인지 금방 양을 몰고 사라졌다.
“…….”
키이엘로는 머쓱한 기분에 목덜미를 문지르며 일행에게로 가까이 붙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나 나누며 한참을 걸은 그들은 이윽고 죽음의 호수 앞에 도착했다. 묘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 일행의 앞에 커다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은 호수는 둘레가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불길하게 번뜩이는 새빨간 수면만 아니라면 퍽 장관이었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호수 주변의 말라비틀어진 초목과 미라처럼 굳어진 동물의 사체로 꾸며져 음산했다.
그 모습에 굳어져 있던 이들은 줄로 늘어서서 울타리 너머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군중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멤이 희미하게 목 졸린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안에 들어가라고?”
“누가 봐도 황천길 편도 직항인 것 같은데.”
“저 안에 들어가라고?”
로트렐리가 옆에서 뭐라고 하든 도멤은 충격을 먹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우투그루 역시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붉은색의 호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꽤 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호수 위에는 옅게 아지랑이가 졌다. 수온도 따뜻하게 지옥 불 온도일 게 뻔했다.
그것을 보고 로트렐리는 간단하게 단언했다.
“무리야. 돌아가자.”
『안 돼!』
“야, 뱀 새끼. 닥치라고 했지?”
다시금 나타난 깡패 하나를 뒤로하고 호수를 살피던 우투그루는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과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든 짐을 갖고 작은 건물 앞에서 실랑이를 하는 사람들을 각각 일별했다. 후자의 사람들이 학자 같아 보였다. 그는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쩔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물자나 챙기고 떠나?”
『안 된다니까!』
“야, 그냥 가자. 애초에 이 세계의 뱀인지 뭔지……. 모아서 우리가 뭘 하는데?”
로트렐리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다가 사람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추며 일갈했다. 그러자 뱀이 얼른 도멤의 소매에서 고개를 살짝 빼낸 채로 말했다.
『너희는 우리를 되찾아야 해. 그래야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테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자연은 스스로 회복할 수 없어. 사람이 살 땅은 점차 줄어들고 괴물들이 땅과 바다를 차지하게 될 거…… 켁!』
“닥쳐, 닥쳐.”
로트렐리가 뱀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그런 뱀을 안쓰럽다는 듯 보며 도멤이 옷 위로 요르문간드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면서 그가 물었다.
“근데 우리가 너희를 찾는다고 되는 일이면 굳이 우리에게만 맡길 필요도 없지 않아?”
『안 돼, 꼭 너희여야 해. 나와 내 형제가 만난다고 끝나는 일이 아냐. 이건 생각보다 더 너희와 깊게 얽힌…….』
“로트 말대로…… 버릴까?”
『작은 인간아, 너마저!』
도멤이 기가 질린 얼굴로 속삭이자 뱀은 한탄했다. 드러나지 않게 주변을 경계하던 키이엘로가 작게 말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속물적인 사람들이라서 말이지. 도와주길 바라면 뭐든 보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난 이미 보답을 하고 있어! 이 작은 인간이 위험할 때도 내 지혜를 빌려주고 있다고.』
“어? 그랬어?”
『일전에 검은 해변에서 주술을 어떻게 벗어났다고 생각한 게냐!』
뱀이 억울한 듯 도멤의 소매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결연하게 말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초월자들의 이야기를 해주마.』
“네, 다음 손님.”
『잠, 잠깐만, 기다려!』
로트렐리가 다 듣지도 않고 뱀의 목을 잡고 도멤이 팔뚝에서 잡아당기려 하자 요르문간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명색의 신화 생물인데 진짜 멋없다……. 그들을 보며 키이엘로는 남몰래 생각했다.
아마 우투그루도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동의했겠지만, 키이엘로는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뱀이 다급하고 다소 비굴하게 말했다.
『우리는 분명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맹세하지.』
“무슨 도움?”
『그, 그건 말할 수 없어. 우리는 법칙을 수호하고 이행하는 뱀이기에 인과율을 어그러뜨릴 수 있는 발언은…….』
“난 항상 뱀으로 나비매듭을 묶어보고 싶었어.”
『이러지 마!』
“진심이야, 로트?”
키이엘로가 당황하는 것에 뱀은 검푸른 눈동자를 돌려 애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키이엘로가 놀란 지점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뱀이 아무리 유연하다지만 정말 묶일까?”
『이 인간들은 죄다 골때리는 것들뿐이군!』
“말이 심하네, 상처 입은 인간은 상냥하니까 가족 상봉하라고 이 호수에 너를 던져주기로 했어.”
『나 홀로 빠져봤자 세스헤트의 결계에 갇힌 세계의 뱀이 둘 되는 꼴이지!』
요르문간드가 왁왁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자 도멤이 쉿, 쉿! 하며 주의를 줬다. 그 난리판에서 버석하게 마른 얼굴을 손으로 연거푸 쓸어내리던 우투그루는 단전에서 끌려 올라온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결국 우투그루는 날카롭게 그들의 대화를 끊어냈다.
“일단 다 입 다물어. 배도 고프니까 밥이나 먹자고.”
그러더니 해가 있는 방향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고는 말했다.
“이 호수는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출입을 제한해. 그 전에 한 번쯤은 들어가면 좋겠지만, 저 줄을 보면 가망이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관광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만약 들어가려면 학자들처럼 개인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 그 방법은 밥 먹으면서 차차 생각해 보자고.”
도멤에게 가뿐히 대꾸한 우투그루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틀었다. 당장 그냥 떠나겠다는 결론이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인지 뱀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도멤의 소매에 스르륵 고개를 넣었다.
입맛 떨어지는 호수의 경관이 멀어지는 거리가 되어서야 가게가 모여 있었다. 오면서 봐둔 것인지 우투그루는 그중 한 곳에 곧장 들어갔다. 그가 있어서 여정이 편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뒤를 로트렐리가 따랐다.
로트렐리와 도멤, 키이엘로 셋이 나눠가며 고민했을 일을 우투그루는 혼자 척척 알아내곤 했다. 일 중독인 녀석이 와서 참 편해. 그런 생각을 숨기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우투그루는 대번에 인상을 구기며 ‘왜 그따구로 봐?’ 하고 시비를 걸었다.
우투그루가 고른 식당은 꽤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그가 단지 부자처럼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 그곳을 골랐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식탁 자리마다 칸막이와 커튼이 있는 데다,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식당 내부의 사람들이 서로서로 피하고 있었다. 적당히 다른 사람의 눈과 귀를 피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식당에 들어가 가장 구석 자리를 골라 앉은 이들은 감자와 당근, 옥수수가 들어간 샐러드와 완두콩을 곁들여 푹 쪄낸 오리고기를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로트렐리가 제 후드 아래로 손가락을 내밀자 발카가 총총 뛰어와 앉았다.
“정말 이렇게 작으니까 너무 낯설다.”
“뭐……. 그게…… 바다새야?”
우투그루가 눈썹을 올리며 자그마한 발카를 보았다. 로트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카를 식탁에 내려줬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 발카는 냅킨을 들춰 그 안에 들어가 폭 파묻혔다.
『한 것도 없는데 지쳤어. 피곤해.』
“널 데리고 걸어 다닌 건 난데?”
『그래도.』
로트렐리는 한 번 짧게 웃었다. 도멤이 푹신한 의자에 등을 파묻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신선한 요리를 먹을 생각을 하니 좋다. 맛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러게. 그나저나, 우린 학파 소속증도 없는데 어떻게 허가를 받지?”
키이엘로의 말에 도멤은 시무룩한 얼굴로 제 어깨에 고개를 떨궜다.
“그보단 자는 것도 걱정이야. 항구까지 가는 건 너무 귀찮고 피곤해. 그렇다고 노숙을 할 수는 없잖아.”
우리는 지금 부잣집 도련님이니까. 그게 통하고 있긴 한 거냐고 묻고 싶었던 로트렐리는 확실히 키이엘로의 얼굴이 시선을 끄는데도 불구하고 섣불리 다가오는 자가 없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통하고 있긴 한가 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