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21)
바다새와 늑대 (220)화(221/347)
#64화
‘부잣집 자제들’은 다행히도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자리에 달린 커튼을 쳐 타인과 단절되자 우투그루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이런 점은 비싼 식당이 좋아.”
음식을 적당히 그릇에 덜어내며 로트렐리가 말했다.
“학자 시늉을 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진심이야?”
“어차피 허가를 내리는 쪽은 학자도 아닌 일반 사무직일 것 아냐? 그럼 앞에서 적당히 어려운 말만 외워주면 학자라는 걸 의심하진 않을걸.”
그 말에 우투그루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 어려운 말이라는 걸 할 수는 있고?”
“내 동생이 누구라고 생각해? 걔는 작은 섬마을에서도 온갖 책을 섭렵하던 애야.”
랄티아 탓에 듣기만 해도 골 아픈 소리는 자주 들어봤어, 하고 말한 로트렐리는 완두콩을 조금 먹고는 말했다.
“내가 학자라면 아까 호수를 보고 수온과 증발률과 수질 속 성분을 밝혀내고 상관관계를 계산해서 왜 생물이 죽는지를 연구하거나 이런 호수의 물이 얌전히 담겨있는 기반암에 관해서 연구할 거야. 그리고 호수 가장자리에서 붉은 기가 덜한 곳에서는 생물이 살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생물이 어떻게 얼마나 살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겠지.”
“……속이 좀 울렁거릴 것 같으니까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도멤이 조각낸 오리고기를 입에 넣다 말고 창백해진 낯으로 말했다.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얼굴의 키이엘로가 물었다.
“정말 그런 게 궁금했어?”
“아니. 랄티아가 저런 곳을 보면 뭘 궁금해할까 생각해 본 거야.”
“네 동생도 참 별나다.”
로트렐리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고는 옥수수를 떠먹었다. 함께 나온 양송이 수프를 숟가락으로 느리게 뒤적이던 키이엘로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이미 연구가 진행된 것도 있을 테니까 그 지점을 좀 알아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근데 아직도 이렇게 학자들이 많이 오는 걸 보면 연구가 그렇게 진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로트렐리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우투그루에게 말했다.
“어쨌든, 학파 소속증은 몰라도 학자처럼 보이는 일에는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정말 도움이 된다.”
진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비아냥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투였으나 로트렐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우투그루는 샐러드를 대충 입에 넣으며 고민했다. 되든 말든 학자로 위장하는 것은 로트렐리가 자신 있다고 한 만큼 걱정을 덜어도 된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오늘 하루 어디에서 잘 것인지, 정말로 배로 돌아갔다가 다시 여기까지 올 것인지가 문제였다. 가장 큰 이유가 귀찮음이었다. 시간도 뺏기고 체력도 뺏기고.
아니면 차라리 도멤의 의견대로 말을 빌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우투그루는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물자 충당인 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왜 이러고 있지? 말마따나 저 뱀을 버리고 가도 상관없을 텐데. 아니다, 물론 그 경우 뱀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솔직히 뱀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렇게 처한 현재는 골치가 다 아픈 상황이었다. 애초에 로트렐리가 매번 이런 황당한 일에 휘말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던 것도 아니고. 우투그루는 고기를 자르다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재수 없게 밥상머리에서 한숨이야?”
“와, 방금 정말 아저씨 같은 대사였어, 로트.”
도멤이 웃는 소리에 다시금 한숨을 쉬려다 삼킨 우투그루는 고기를 입에 넣어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브레딕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다. 검은바다를 찾기 위해서는 로트렐리와 동행하는 편이 낫다.
검은바다의 사과나무 섬으로 가는 방법도 있으나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섬에 검은바다의 소식이 닿지 않았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지만,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욱 꺼리는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입맛이 떨어진 우투그루는 나무껍질을 씹는 것처럼 고기를 씹다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식탁 위를 도란도란 오가는 일행의 말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브레딕은 어쩌고 있지? 그 녀석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괜히 나서서 처지가 곤란해졌을 것이다. 우투그루는 미뤄뒀던 생각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로트렐리는 자신이 돌아간다면 그가 반기리라 말했지만 우투그루는 그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이제는 우투그루도 클루스도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다. 우홉피아주의 끝을 보았고 페데르의 목을 베었다. 그래서 우투그루는 어쩌면 미약하게나마 계속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가 해적질을 마치고 가정에 충실해질 것이라고…….
하지만 클루스도는 계속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 부분에서 우투그루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 동기가 무엇이지? 우홉피아주를 향한 증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온하고 쉽게 포기할 목적이라기엔 수단이 거칠었다.
‘내가 고작 그 애 하나를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겠느냐?’
클루스도의 심기 불편한 어투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우투그루는 음식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목 언저리가 턱 막힌 듯 더부룩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더 먹어 봤자 소화가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식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입가를 냅킨으로 닦고 있자, 로트렐리가 잡담을 하다 말고 우투그루를 보며 물었다.
“더 안 먹어?”
“난 됐어.”
“웬만하면 먹어둬. 또 바다로 나가면 이런 신선한 음식이랑은 조만간 이별인데.”
“난 됐다고.”
우투그루는 날카롭게 응수했다가 홀로 내심 움찔했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래? 그럼 뭐 우리가 다 먹지 뭐.’ 하고는 오리의 뼈를 발라내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을 보자 우투그루는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지 로트렐리가 과하게 무심한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 모두 끝내고 식당을 나온 일행은 죽음의 호수 근처로 다시 향했다. 폐쇄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호수 주변은 이전보다 사람이 더 북적거렸다.
도멤이 그들을 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게 다 학자인 것 같지는 않은데, 다들 왜 이런 곳을 오는 걸까?”
“괴이쩍은 걸 좋아하는 돈 많은 괴짜도 있는 법이지. 아니면 학자이지만 허가증을 못 받았거나.”
우투그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장 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건물로 향했다. 그곳의 학자들이 죄다 학파 소속증을 들고 있는 것을 본 우투그루는 혀를 차며 몇 걸음 물러났다.
“낭패인데. 소속증 정도는 있어야 허가를 해주는 것 같아.”
“흠.”
로트렐리는 짧게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하나 훔치면 안 되나?”
“소동이 나서 어차피 금방 들키게 될 거다.”
“지금 와서 입장 줄을 서기엔 늦었고……. 마땅히 잘 숙소도 못 구했고.”
키이엘로가 낮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도통 되는 일이 없네…….”
“일단 가까운 마을 쪽으로 내려가자. 다시 찾아보면 빈방이 있을지도 모르지.”
도멤의 말에 일행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에 도멤의 팔에 둘둘 감긴 뱀이 꽁한 소리를 냈다.
『인간들은 너무 복잡하게 사는군. 세상을 스스로 꼬아서 어렵게 사는 종족은 인간뿐일 거야.』
“나름의 규칙이니까 어쩔 수 없어.”
도멤이 볼멘소리로 뱀에게 투덜거렸다. 일행이 묵을 숙소를 찾기 위해 죽음의 호수 아래쪽 마을에 다다랐을 때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로트렐리의 옆구리로 한 아이가 뛰어와 부딪쳤다. 순간 흠칫하며 아이에게 손을 뻗었던 키이엘로는 꼬마가 놀라서 로트렐리에게 사과하자 어색하게 손을 거뒀다.
로트렐리는 신경 쓰지 않는 시선으로 아이를 보았으나, 뭐가 그리 급한지 그녀에게 몇 번 사과한 아이는 답을 듣지 않고 후다닥 뛰어갔다. 그것을 보며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린 로트렐리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묶어뒀던 돈주머니가 없었다.
“이런 씨…….”
소매치기였다. 로트렐리는 곧장 아이의 뒤를 쫓아 번개처럼 내달렸다. 그에 남겨진 세 사람은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보고 있다가 뒤늦게 얼렁뚱땅 따라 뛰었다. 로트렐리의 뒤로 따라붙은 키이엘로가 달리며 외쳤다.
“왜 그래? 소매치기야?”
“내가 저 새끼 가만 안 둔다.”
무셔……. 도멤은 하필 로트를 건든 소매치기 꼬마에게 속으로 묵념하며 길을 뛰어갔다. 인파가 많았으나 해적질과 괴물 사냥, 경비병과의 추격전 등으로 단련된 넷은 사람을 피해가며 순식간에 꼬마의 뒤를 쫓았다.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달음박질 소리에 짧게 돌아본 소년은 기겁해서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쫓기는 뒷모습이라서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키이엘로는 꼬마의 생김새가 어째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때 꼬마가 굽이진 골목으로 쏙 들어갔다. 키이엘로는 속으로 낭패를 느꼈다. 자신들에게는 이곳이 초행이지만 저 꼬마에게는 앞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로트렐리는 후드 아래로 손을 넣어 발카를 날려 보냈다. 빠르게 하늘 위로 사라지는 작은 푸른색 벌새를 본 뒤에야 로트렐리는 서서히 속도를 낮추더니 이내 멈춰 섰다.
꽤 많이 달렸는데도 일행 중 숨을 헐떡이는 사람은 없었다. 경비병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고 어린애를 추격하는 것이 격하게 힘들 리도 없었다. 도멤이 차오르기 시작하던 숨을 가볍게 뱉어내고 물었다.
“소매치기라고? 뭘 뺏겼는데?”
“우투그루가 보석을 팔아서 챙긴 돈 중 반절쯤.”
“와.”
그건 심했다……. 도멤은 공허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투그루는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눈썹을 비죽 올렸다.
“여긴 뭐지? 빈민촌인가?”
“여기가?”
로트렐리도 뒤늦게 주변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것에 답을 준 것은 키이엘로였다.
“그런 것치고는 좀 깨끗한 편인 걸 보면 빈민촌까지는 아니고……. 그냥 단순히 외져서 치안이 안 좋은 곳 같은데.”
“깨끗한 편이라고? 여기가?”
황당하다는 듯 우투그루가 되물었다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상대가 키이엘로라는 걸 뒤늦게 인식한 것이다. 키이엘로는 보란 듯 시큰둥한 표정을 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성격과는 별개로 그 얼굴은 정말 재수 없어 보였다. 거의 도발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키이엘로가 짧게 빈정댔다.
“어화둥둥 큰 도련님이 보기엔 지저분한가 보지?”
“로트! 키이엘로랑 우투그루 또 싸워!”
곧장 도멤이 고자질을 하자 우투그루는 울컥할 틈도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키이엘로 역시 아차 한 얼굴로 입을 일자로 꾹 닫고 로트렐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주변을 느리게 훑어보며 평이하게 말했다.
“아주 애새끼들이야. 난 거의 포기했어.”
“아니, 포기하면 안 되지!”
도멤이 화들짝 놀라 말하든 말든, 로트렐리는 후드 아래로 푸른 눈을 굴리며 사위를 살피다가 작게 말했다.
“주변에 사람이 안 사나?”
“그것보단 일을 나간 게 아닌가 싶은데.”
우투그루와 훌쩍 멀어져 로트렐리에게 가까이 붙은 키이엘로가 말했다.
“빈민까지는 아니지만, 소득이 적은 계층이 모여 사는 곳은 하루 중 대부분이 비어있어.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 불규칙하니까.”
“흠. 그래도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지. 조용히 따라와.”
로트렐리의 말과 함께 하늘에서 발카가 포르르 날아왔다. 발카의 안내에 따라 길을 나아간 일행은 곧 작은 집을 발견했다. 안에서는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돈을 얻어 왔어요.”
“뭐?”
“할아버지가 돈이 부족하다고 했으니까…….”
로트렐리는 지체하지 않고 발로 문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안에서 소매치기 꼬마와 안경을 쓴 할아범이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접근하려던 우투그루는 이마를 짚었고 키이엘로는 그림처럼 미소만 지었다. 로트렐리가 미간을 좁히며 후드 아래로 조손을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돈 내놔, 이것들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