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22)
바다새와 늑대 (221)화(222/347)
#65화
로트, 너 사채업자 같다고~! 도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일단 소매치기를 한 건 잘못이 맞았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조손은 이미 겁을 집어먹고 굳어있었다.
그때 키이엘로가 소년을 가리켰다.
“아, 아까 봤던 목동.”
“목동?”
그 말에 로트렐리가 짧게 되물었다. 아마 그들이 돈이 있어 보여서 눈여겨 두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노인이 다급하게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으리! 제 손자가 뭣도 모르고 감히 귀한 분의 주머니에 손을…….”
“헉.”
도멤은 반사적으로 숨을 내뱉었다가 우투그루의 눈초리에 꾹 삼켰다. 우리가 진짜 부자들로 보이긴 했나 보다! 이 저자세가 로트의 언행에서 나온 것인지 그들의 외관에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말이다.
소매치기 본인도 아닌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제 다리에 매달리는 것이 거북했는지 로트렐리는 서둘러 그를 떨쳐 내고 말했다.
“됐고요, 손자분이 가져간 돈이나 내놓으세요.”
“아, 아…….”
노인은 눈에 띄게 움츠러들면서 목동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돌연 소년은 돈주머니를 감싸 숨기며 외쳤다.
“저희 할아버지는 대단한 학자예요! 연구비가 필요한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돈이 많으면 투자도 할 수 있잖아요!”
로트렐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거 싹수 노란 것 좀 봐. 로트렐리는 한숨을 쉬며 소년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할아범이 기겁하며 다시금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나으리! 아이입니다, 아직 어린 애예요!”
“저기, 안 때리니까 진정하세요.”
도멤이 넌지시 그를 달래보았으나 노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난데없이 작은 집에 쳐들어와서 잘못을 저지른 손자에게 다가가는 어른은 퍽 위협적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목동은 헐레벌떡 뒤로 달아나 벽에 달라붙듯 몸을 딱 붙이고 움츠러들었다. 그때 우투그루가 입을 열었다.
“학자라고? 뭘 연구하는데? 어디 학파?”
“거짓말 아니에요!”
소년은 우투그루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버럭 외쳤다. 그러자 우투그루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어디 학파 무슨 연구냐고.”
“죽음의 호수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캐시언 학파였는데 현재로서는 지원이 뚝 끊겨서…….”
로트렐리의 다리에 매달려있던 노인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사이에 로트렐리가 재빨리 목동에게 팔을 뻗어 돈주머니를 빼앗았다.
“앗!”
소년이 서둘러 팔을 휘적거렸지만 로트렐리는 금방 물러나 문가에 섰다.
“그걸 갑자기 왜 물어봐?”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상기해 봐.”
“아.”
‘어떠긴 뭐가 어째, 소매치기당했지’하고 말하려던 로트렐리는 우투그루의 말에 짧게 소리를 냈다. 도멤 역시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어깨를 들썩이며 물었다.
“거래라도 하게? 너무 위험하지 않나?”
“캐시언 학파라면 명망 있는 곳이니까 일이 쉬워질걸.”
그의 말대로, 캐시언 학파는 유명한 학파였다. 마장석 관련 연구와 사업으로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어 학파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을 법한 곳이었다.
짧게 고민을 끝낸 로트렐리는 키이엘로, 도멤과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딱히 이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우투그루를 돌아보고 눈썹을 비죽 올렸다.
“일단 찬성.”
그에 우투그루는 간만에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 저……. 무슨 이야기들을 하시는 것인지.”
“이봐요, 할아범.”
우투그루의 어투에 목동이 달려와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해를 끼치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투그루는 그들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선을 마주쳤다.
도멤은 속으로 생각했다. 로트렐리나 우투그루나 저러는 게 나름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완전 역효과라는 걸 언제쯤 알게 될까.
“우리랑 거래 하나 할래요?”
“거래?”
“죽음의 호수를 연구하는데 연구비가 없댔죠. 많이는 못 주지만 조금은 돈을 대줄 수 있는데.”
그 말에 목동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노인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예?’하고 되물었다.
“우리가 사정이 있어서 죽음의 호수에 남들 이목을 피해서 접근해야 해요. 그래서 학파 이름을 좀 빌리고 싶은데.”
“그, 그걸 위해서 돈을 구하고 있는 건데요, 나으리.”
“그러니까 그 돈은 우리가 내죠. 다만 조건이 있어요. 우리에 관한 걸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줘야겠어.”
그 말에 목동은 그까짓 거 쉽지, 하는 얼굴로 할아범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불길함을 느끼고 찜찜하다는 얼굴로 우투그루와 그 뒤의 일행들을 흘깃댔다.
“무슨,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그것도 궁금해하지 말고, 우리와 관련된 것은 모두 함구해주길 약속해주면 좋겠군요.”
“…….”
노인은 고뇌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도멤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숙소를 못 구해서 그러는데 오늘 여기서 하루만 묵을게요.”
“예?!”
“노숙을 할 수는 없어서요.”
사실 하려면 뭔들 못하겠냐마는, 길거리에서 자면서 사람의 이목을 모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노숙하기 마땅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 말에 반쯤은 예상대로, 노인은 그들이 귀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럼에도 노인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소년이 오히려 일행의 눈치를 보며 제 할아버지의 옆구리를 찌를 정도였다. 그러자 키이엘로는 한숨을 쉬더니 나섰다.
“대답을 빨리 해주시는 게 나을 거예요, 손자분이 경비병에게 고발당하는 걸 원하진 않으실 것 아닌가요?”
그 말에 조손은 물론 일행들마저 키이엘로를 보며 입을 벌렸다. 키이엘로는 작은 집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웃음에서 무언의 압박감을 받은 노인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나 키 큰 네 사람이 자기엔 턱없이 작아서 그 방은 목동과 노인이 쓰고 일행들은 거실 바닥에 얇은 이불을 깔고 누웠다. 잠자리를 정리하며 도멤이 말했다.
“이게 어떻게 연이 닿긴 하네.”
“그러게. 그냥 말빨만 믿고 부딪쳐야 하나 고민했는데, 운이 좋았어. 소매치기당한 대신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들 하잖아.”
이미 누워서 잘 준비를 끝낸 로트렐리의 말에 도멤이 키득이며 덧붙였다. 그에 우투그루 역시 셔츠의 끈을 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죽음의 호수에 가서 어떻게든 해결을 보고, 물자를 채운 뒤엔 곧장 떠나자.”
“아주 번갯불에 콩 볶아 먹으려고 안달 나셨어.”
“사람도 득시글거리는 곳에 오래 머물러서 뭐 해? 괜한 위험만 늘어나지.”
셔츠를 벗고 자리에 누운 우투그루는 로트렐리에게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러더니 그는 고개만 비죽 들어 노인과 소년이 있는 방문을 힐끔 보고 작게 말했다.
“발카도 되도록 못 보게 조심해.”
“그건 나도 알아.”
우투그루는 ‘아, 그래? 퍽이나.’ 하는 시선으로 로트렐리를 보았다가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노인이 생각보다 신중한 것이 걸렸으나 어차피 하루만 협력하면 돈 좀 쥐여주고 입막음하면 될 일이었다.
설사 뒤늦게 발설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갈리니 섬을 뜬 상태일 테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용모파기가 붙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으나 조악한 묘사로 일행을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다.
다만 그에게 가장 걱정은 로트렐리와 키이엘로였다. 한 놈은 눈동자만 드러나도 바로 정체가 특정될 것이고 한 놈은 좀처럼 존재감을 죽이질 못하는 외모였다. 키이엘로는 천으로 둘둘 감아서라도 감춘다고 쳐도 로트렐리는 계속해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가리고 다닐 수도 없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도멤의 가슴팍 위에 똬리를 틀고 누워있던 뱀이 물었다.
『굳이 복잡하게 굴지 말고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 몰래 들어가는 수는 없는 건가?』
“낮에 봤잖아. 어두우면 위험한 데다, 무엇보다 호수 근방을 순찰하는 사람이 있어. 허가를 받으면 들키더라도 상관없겠지. 순찰하지 않는 부분을 골라서 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호수에 관해 알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섣불리 갔다가 그 호수에 발이라도 담그고 나란히 시체로 떠오르게 될 거다.”
우투그루가 줄줄줄 이야기하자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인간들은 왜 이리도 복잡한지…….』
“그 복잡한 짓을 누구 때문에 하고 있는데…….”
우투그루는 불퉁하게 대꾸하고 하품했다. 뒤척이며 일행으로부터 등 돌려 누운 그를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보고 있었다. 그때 도멤이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 가슴팍에서 내려오면 안 돼? 너 은근 무겁다.”
『팔에는 잘만 달고 다녔잖느냐!』
“팔이랑 가슴팍이랑 같아?”
도멤과 요르문간드가 툭탁거리기 시작하자 우투그루는 수마에서 건져 올려졌다. 심해로 들어가려는 물고기를 건져내듯 사람 잠 못 들게 하는 재주 하나는 탁월했다. 그때 키이엘로가 도멤에게 말했다.
“도멤, 쉿.”
“아.”
뱀의 목소리가 작은 방으로 새어갈까 지적하자 도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자신만 다물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뱀의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잡아도 말은 하네. 그보다 조용히 해, 사람은 넷인데 목소리가 다섯으로 들리면 얼마나 무섭겠어?”
도멤이 속닥거리자 뱀은 콧방귀를 뀌면서도 얌전히 도멤의 목덜미 옆으로 내려가 누웠다. 로트렐리는 그새 곯아떨어졌는지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뱀이 조용히 하자 머지않아 우투그루도 잠들었다.
이윽고 모두가 잠든 때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 작은 방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조그만 기름 램프를 든 노인이 헤매는 눈동자로 쿨쿨 자는 중인 일행을 살폈다. 그러다 그는 도멤의 목덜미에 찰싹 붙어 똬리를 튼 뱀을 보고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그때 노인의 뒷목에 손이 올라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불 꺼.”
키이엘로였다. 노인은 졸도할 것처럼 숨소리를 내다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램프의 불에 뚜껑을 덮었다. 키이엘로는 여전히 평화롭게 자고 있는 일행을 보았다가 어둠에 젖어 까맣게 보이는 눈으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 당신들…….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쪽이 알 바 아닌 것 같은데요.”
“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지킵니다.”
“음.”
키이엘로는 느긋하게 소리를 냈으나 노인의 뒷덜미를 붙든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것은 수긍이 아니라 오히려 업신여기는 것 같은 소리와 비슷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믿나요…….”
경비병과 제국, 보수를 노리는 사람에게까지 쫓긴 탓에 그들의 여유는 한계였다. 우투그루가 경계한답시고 날을 세우고는 있으나 키이엘로의 눈에는 그마저도 어설프게 보였다. 되는대로 의심의 눈초리로 찌른다고 경계가 아니지.
지금도 그 예민하고 의심 많으신 분은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텐이 있었다면 키이엘로도 다소 안심하고 잠들었을 것이다. 여차할 때 텐이 자신을 깨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텐이 없었다.
키이엘로는 노인의 뒷덜미에 보란 듯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로트나 도멤에게 보여주는 것과 달리 꽤 무미건조한 웃음이었다.
“대화 좀 할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