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23)
바다새와 늑대 (222)화(223/347)
#66화
그는 차라리 이런 것이 쉬웠다. 한번 보고 말 사람, 아주 잠깐 스치는 인연, 깊게 얽힐 일이 없이 짧은 대화 한 번 하면 끝인 사람.
상대를 깊게 살필 필요도,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더 속 편했다. 실상 대부분의 사람이 초면에 그를 보고 갖는 인상은 다 거기서 거기이기도 했고 말이다.
노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키이엘로는 자는 중인 목동을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로트는 생각보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오래 속닥거리면 깰지도 모른다.
그때 노인이 벌벌 떨다가 입을 열었다.
“그쪽 일행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걸 알지 말라고 비밀 유지 조건을 붙인 건데 물어보면 어떡해요.”
키이엘로는 약간 황당해진 기분으로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희가 사정이 있어서 그쪽의 학파 이름을 빌리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으면 좋겠네요. 당신도 우리만 죽음의 호수에 들여보내 주면 돈도 얻고 호수를 연구할 기회도 얻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 뱀…….”
노인의 말에 키이엘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낭패였다. 그 말 많은 뱀의 목소리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드러나지 않게 고민하는 키이엘로에게 노인이 말했다.
“모두 비밀로 할 테니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네.”
키이엘로는 즉답했다. 비밀로 하자는 것은 ‘당신을 믿고 알려주겠다’가 아니라 ‘일단 최소한의 믿음을 전제로 두겠지만 뭐든지 간에 알려고 하지 마라’라는 의미였다.
그런 마당에 뭘 ‘비밀로 할 테니까 알려줘’야? 어림없는 소리지. 그렇게 생각하며 키이엘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기색이 다소 언짢아졌으나 노인은 어둑한 방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정말로, 입 다물고 협력할 테니…….”
“학자들의 호기심 많은 머리는 이럴 때 성가셔요. 뭐든 알고 싶어 하고, 알고 있는 걸 글로 써서 남기길 좋아하는 족속이다 보니.”
허튼소리 말고 못 본 척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키이엘로가 자신의 뒷덜미를 잡았던 것을 까맣게 잊은 듯 서둘러 반박했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정말로요. 오히려 내가 순조롭게 협조를 해주는 편이 그 쪽에겐 더 이롭지 않나?”
“아…….”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노인의 어투가 바뀐 것을 눈치챈 키이엘로가 깨달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웃었다.
“죄송한데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뭐?”
“저희 일행이 대체로 평화주의자들이라 온건하게 거래한 거지, 사실 저는 그쪽이랑 저 목동을 파묻고 집에서 학파 소속증만 찾아서 가도 상관없다고는 생각하거든요. 보아하니 갑자기 사라졌다고 누가 찾아올 만한 형편도 아닌 것 같고…….”
“예?”
“저도 되도록 그러고 싶지 않아서 대화로 해결하려는 건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서.”
키이엘로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실제로 골치 아픈 것도 맞았다. 그는 여러 사람을 겪어오며 대충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상황을 피하거나 효과적으로 협박할 수 있는지 알았다. 심지어는 어떻게 사람을 처리할 수 있는지도.
어머니의 가르침과 맹렬히 충돌하는 일이기에 그도 그런 일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고 최근에는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적어도 한때 그가 그런 처세에 의지해야 했던 때가 분명 있었다.
“내가 시, 신고하면 어쩌려고? 당신들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많은 걸 할 수 있죠.”
키이엘로는 방에 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손가락으로 꼬집듯 잡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잡은 부분이 조용히 쪼개지며 부서지자, 노인은 역공하려던 의지를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제가 단순히 젊은 장정이라는 점만 믿고 설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텐도 없고 친구들도 방 밖에서 자고 있는 마당에 이런 짓을 되새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키이엘로는 고민했다. 여기서 강경하게 협박을 해두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이 노인이 궁지에 몰려 막무가내로 구는 것이 더 큰일이다. 대충 가짜 정보로 시야를 가려둘 방법이 있나?
그는 짧게 생각을 끝내고 얼이 빠져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저 뱀 때문에 애먼 섬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할아버지까지 불편하게 하진 않으실 거라 믿어도 될까요? 일만 잘 끝나면 사례하죠.”
키이엘로는 마치 일행 중 누군가가 졸지에 불길한 것으로 몰려 멀리까지 여정을 떠나온 도련님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딱히 거짓도 아니었다. 그의 말에서 충분히 만들어진 단서를 주워 먹은 듯 노인이 고개를 수그렸다.
“비밀로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냥 우리에 관한 것을 모두 없었던 일로 생각해요.”
“그, 그러겠습니다……. 헌데, 어디 가문에서 오신…….”
키이엘로는 그냥 미소만 지어줬다. ‘알려 줄 것 같냐?’라는 뜻이 가득 담긴 얼굴에 노인의 입이 딱 다물렸다. 적당히 겁을 먹은 얼굴에 그는 남몰래 안심했다. 더 무도한 발언으로 겁박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노인과 눈을 마주친 키이엘로는 작게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쪽이 약속을 지키면 우리도 약속을 지킵니다.”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키이엘로는 대화를 끝내고 거실로 나와 자기 자리에 다시 누웠다. 그때 일행의 끄트머리에서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넌 원래 타인을 그렇게 대했지.”
우투그루였다. 키이엘로는 이번에는 성가시다는 기색이 면면에 떠오르는 것을 막지 않은 채 시큰둥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 키이엘로에게 다시금 우투그루의 목소리가 낮게 날아들었다.
“네가 이런 놈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상기시켜줘서 고맙군, 그래.”
“…….”
“네가 대체 어떻게 로트나 도멤과 어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잠꼬대가 심한데. 자던 사람 깨우지 말고 골목으로 나가서 자는 건 어때?”
키이엘로가 날카롭게 응수하자 우투그루는 조용해졌다. 말마따나 이전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다가 한밤중에 잘 자던 이들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키이엘로는 우투그루가 다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그럼 자기가 저 노인을 알아채고도 어리바리하게 굴며 쩔쩔매야 했다는 뜻인가?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노인을 가만히 뒀다면 저 노인은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로트는 다시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이 내리는 달빛이 창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노려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키이엘로는 낮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 * *
인어는 드디어 배를 찾아냈다. 이 배다! 이 까만 색, 이 크기, 이 모양! 걸고 있는 깃발도 똑같았다! 사란은 기쁨에 가득 차서 수면 위로 고개를 빼냈다.
그러다가 사란은 퍼뜩 깨달았다. 위치를 모르잖아! 인간이 바다에 붙인 이름을 모르는 인어는 당황하며 두리번거렸으나, 그녀를 돕겠다고 바다에서 메흐가 솟아나 알려줄 수도 없었다.
그때 갑판 위를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난간에 매달렸다. 이미 인어를 보고 다가온 것인 듯, 사란과 눈이 마주치고도 놀라지 않은 인간을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손짓했다.
사란은 그를 의심스럽게 보다가 뭐라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가 가리키는 선미 쪽으로 헤엄쳐 갔다. 지나치게 주변을 살펴보는 그는 약간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리고 사란에게 말했다.
“혹시…… 로트가 보낸 거야?”
“……!”
사란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베제는 다시금 고개를 휘둘러 사위를 살피고는 말했다.
“로트에게 랄티아는 이 배를 이미 탈출했다고 전해. 어디로 갔는지까지는 몰라. 하지만 혼자 탈출한 건 아니고, 같이 떠난 이들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말라고…….”
“베제, 거기서 뭐 해?”
빠르게 속닥이던 그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홱 난간에서 등을 돌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밤바람 좀 쐬고 싶어서.”
“프라세가 널 찾더라. 빨리 가봐.”
“으응, 고맙다.”
베제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인어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베제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로트 녀석도 무사한가 보구나.
선실로 들어가자 프라세가 다급하게 그에게로 다가왔다.
“형, 어디 있었어요?”
“갑판에 좀 나갔었다,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프라세는 짐짓 어른스러운 척 말하다가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속삭였다.
“괜히 의심받을지도 모르니까 당분간 조심해요, 형.”
“그래, 그래.”
베제는 침착하게 소년의 어깨를 두드려 달랬다. 그에 프라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몬의 선상 반란이 일어나고 그대로 랄티아가 탈출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단순히 명령을 안 들은 것도 아니고 대놓고 선장의 목을 따겠다고 선포한 반란이었다. 당연히 하몬은 처형되어야 마땅했으나,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요한이 검은바다의 여론을 흔들고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그를 변호해서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하몬이 죽으면 당장 마장석 기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루스도는 하몬을 똑같이 함저 구역에 가두고 선원들에게 기구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반란을 도모했던 사람이다. 그의 명령을 들을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붙들려서 클루스도의 명령을 들은 직후 그를 비웃으며 외쳤다.
“너, 너는 내가 옛날처럼 네게 맞춰주고 애원할 줄 아느냐? 어디 두고 보자고, 이제 반대가 될 것 같으니. 어디 죽여 봐라! 할 수 있으면 죽여 봐!”
그에 클루스도는 하몬의 앞에서 함저 구역의 선원을 몇 명 죽였다. 하몬의 웃음은 멎었으나 클루스도는 그에게서 그 이상의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망설임 없이 죽이는 것이 선원들의 여론에 반감을 불러왔기에 계속해서 감행할 수도 없었다.
검은바다의 내부는 함저 구역의 선원을 모두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과 하몬이 주모자이니 하몬만 처형하면 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클레인스를 랄티아의 일행에 묶어 탈출시킨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하몬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하몬처럼 함저 구역에서 마장석 기구를 다루는 자리에 앉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제로 말할 것 같으면, 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반란을 눈감은 공모자로 봐야 할지, 연관 없는 별개의 인물로 봐야 할지가 또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었다. 일단 함저 구역에서의 근신은 끝났지만. 베제는 한숨을 쉬며 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와 청승을 부리고 앉았다냐?”
“요한.”
요한은 베제와는 달리 작금의 상황이 퍽 좋다는 얼굴을 했다. 그야 그는 클루스도를 향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흔들리고 걱정되던 랄티아도 탈출한 것이 좋기는 할 것이다. 하몬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각오했던 일일 테니 상관 없고 말이다. 베제는 요한이 내미는 비스킷을 받으며 어설프게 웃었다.
“어쩌신대?”
“선장님? 글쎄다. 이젠 내마저도 그리 신임하진 않는다 안 허냐. 간부진이던 놈팽이덜이 죄 나가리 되어부렸으니. 와중에 얌전한 내는 의뭉스러운 놈이지 믿을 만한 놈은 아니제.”
그렇게 말한 요한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턱에 짧게 붙은 수염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매섭게 뜨였다.
“근디 이제 선장님의 눈에도 뵈는 것이 없을 끼다.”
“그 말은…….”
베제의 읊조림에 요한은 딱히 대꾸하진 않았다. 그러나 단서는 충분했다. 베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클루스도는 랄티아를 쫓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