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24)
바다새와 늑대 (223)화(224/347)
#67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입지도 다져야 했고, 수하들의 결집력도 만들어야 했으며, 모든 것을 계획해야 했다. 이제 더 물러날 곳은 없다. 그에게는 남은 시간마저 부족했다.
이대로 퇴물처럼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떤 조바심이 그의 뇌리를 흔들었다.
“일단 적당히 육지로 갈 인원을 꾸려야겠지……. 우투그루!”
클루스도는 버럭 외치며 그의 아들을 찾았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서 공허함이 느리게 끼쳐왔다. 선장실에는 이제 더 이상 디겔도 우투그루도 없었다.
그는 옅게 숨을 내쉬다가 돌연 쿨럭이며 세차게 기침을 했다. 목구멍을 긁으며 터져 나온 기침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한참이 되어서야 겨우 멈춘 들썩임에 클루스도는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의사도 붙잡아둘 것을 그랬나. 애초에 바다새가 이 배를 떠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분한 것인지 한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색으로 마른기침만 두어 번 더 쏟아낸 그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랄티아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면 로트렐리는 이 배로 올 것이다. 그러나 클루스도는 로트렐리에게 호의를 드러내던 까마득한 존재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이 얕보았던 랄티아의 영악함도 떠올렸다.
하몬이라는 변수가 그의 예상보다 빠르게 상황을 반전시켰다. 더는 막연하게 로트렐리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랄티아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로트렐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클루스도는 자신의 모습이 갈갈거리는 꼴로 비치는 것도 모르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해도를 내려다보았다.
* * *
배를 묶는 브레딕을 뒤로하고 정박장으로 올라선 랄티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저무는 때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항구를 살핀 네토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상트라로군.”
“아상트라라면, 제국 속령?”
헤더가 지친 기색으로 묻자 네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다물고 브레딕의 팔을 붙든 채 정박장으로 올라오는 클레인스를 힐끔 바라보던 랄티아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돈부터 괸 주화로 바꿔야겠네요.”
“환전소를 알아보자.”
브레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그들이 배를 댄 곳은 작은 나루터라 항구지기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항구를 나온 그들은 환전소를 찾아 하몬이 준 돈을 괸 주화로 바꾼 뒤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제국 속령인 것치고는 마을이 크게 발전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과의 물자교류가 원활한 곳이라서인지 환전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항구는 물자를 옮기는 인파로 분주했으나 섬 안쪽으로 향하자 왁자지껄한 시장통이 아니라 거대한 차밭이 나타났다.
초록빛의 짐승이 엎드린 것처럼 드러난 거대한 규모의 능선에 랄티아는 눈만 깜빡이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더운 바람이 푸른 털을 쓰다듬듯 차나무의 잎을 스치고 그녀의 턱밑을 간질였다.
“거대한 차밭이네요.”
“아상트라는 차 생산으로 먹고사는 곳이니까.”
네토르의 말에 브레딕이 떠름한 눈치로 비스듬히 웃으며 덧붙였다.
“먹고사는 게 이곳 사람들인지 다른 분인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야.”
헤더는 잠시 심각한 얼굴을 했으나, 그런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랄티아는 이것저것 껴입은 옷을 몇 꺼풀 벗어내고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봐, 내가 육지에 오면 더울 거라고 말했는데 듣는 시늉도 안 했지.
그들은 차밭의 가장자리로 쳐진 울타리 밖에서 길을 따라 걸은 뒤에야 마을에 도착했다. 찻잎을 옮기는 사람들과 차를 가공하는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난 사이로 평범하게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숙소를 찾기 위해 몇몇 사람에게 물어가며 여관에 도착한 그들은 큰 방을 하나 잡고 각자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제야 헤더가 크게 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이제 좀 편하게 잘 수 있겠네. 그간 긴장해서 잠도 못 잤어…….”
“그 작은 배에서 맘 편히 잤으면 진작 뒤집혔을걸.”
“그건 그렇지.”
브레딕의 말에 헤더는 어색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랄티아는 이미 지쳐서 침대에 누워 몸을 만 상태였다. 네토르는 그들을 일별하다가 클레인스가 눕지도 않고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네토르가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랄티아가 덥석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쉬기나 해요.”
“…….”
네토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랄티아를 내려보다가 이내 손을 거두고 자신의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로트렐리와 랄티아가 닮았다지만 이럴 때마다 네토르는 퍽 생경한 감각을 느꼈다.
로트렐리라면 지금의 클레인스를 보면 가만히 두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생은 매정할 정도로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사람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제까짓 것이 저렇게 굴어도 나의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는 독단과 닮아 있었다.
사실 네토르로서도 딱히 클레인스를 달랠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궁상을 떨고 있어도 어차피 곧 지치면 알아서 자겠지. 하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말을 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뭐, 일단 바라는 대로 해드려야지. 네토르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이곤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브레딕과 헤더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두런거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 아상트라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아침이 되자 그들은 저렴하게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로트렐리에 관한 정보가 있나 알아보고 방향을 정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구명정으로 항해를 할 수도 없으니 배를 처분하고 제대로 된 배편을 수소문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런 의견을 브레딕이 내놓자 랄티아가 말했다.
“그렇네요, 단독 항해는 특정되기 쉬우니까 검은바다의 눈을 피하기엔 여행객으로 위장하는 것이 낫겠죠.”
“검은바다가 우리를 쫓을까?”
“네. 아마 클루스도는 꽤 초조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속내까지는 모르겠지만……. 클루스도는 이제 우리를 얕보지 못해요.”
랄티아의 말에 헤더는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소심하게 움츠러든 모습에 랄티아는 다소 성가시다는 감상을 숨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헤더는 알아서 떠나도 좋아요.”
“내가 안 갈 거 알고 그런 말 하는 거지?”
랄티아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이미 말 속의 뼈를 알아챈 헤더는 한숨을 쉬었다. 헤더의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랄티아는 금방 주변을 둘러보며 신문을 하나 샀다. 빠르게 일간 신문을 훑어본 랄티아는 인상을 쓰며 미간을 문질렀다.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신문을 걸어놓고 턱을 괴고 있던 신문팔이가 물었다.
“찾고 있는 소식이라도 있남, 아가씨?”
“……일전에 수배자들의 기사를 본 적 있는 것 같아서요.”
“수배자? 누구, 혁명단?”
“아뇨.”
랄티아는 그렇게 말하고 슬쩍 물러났다. 낯선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후퇴는 다가온 브레딕에 의해 가로막혔다. 랄티아의 어깨를 잡은 브레딕이 신문팔이에게 물었다.
“혹시 푸른 눈의 여자 소식을 아나?”
“아, 그 마녀.”
마녀라는 말에 네토르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랄티아의 매서운 시선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브레딕 역시 어색한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문팔이는 심드렁한 얼굴에 다소 호기로운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알지. 좀 뒤숭숭한 마당에 제국에 꽤 통쾌한 일을 해주셨더만.”
“통쾌한 일이요? 제국에게서 뭔가를 훔쳤다는 소리는 들은 것 같은데…….”
“바다에 오래 있었나? 소식이 느리군. 제국의 바다새를 훔쳤다지 않나.”
그 말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문팔이를 향했다. 그것이 흥미라고 생각한 것인지, 사내는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뭐, 제국인은 몰라도 다들 그게 헛소리인 건 알지만 말이야. 제국이 바다새를 갖고 있었다면 진작 유세를 부렸겠지. 안 그런가? 어쨌든 제국은 그 새가 자기들 거라고 우기고 싶은 모양이야. 그러니 그런 죄목으로 수배를 내렸지.”
“어디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나요?”
“쿤트만 제도행 여객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는 하던데, 글쎄, 거기서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거야!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지.”
“…….”
신문팔이의 말에 헤더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애인 것은 이전부터 알았지만, 행보 자체가 정말 이렇게까지 범상치 않을 줄은 몰랐다. 와중에 네토르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헤더는 그를 보고 주책이라는 듯 팔뚝을 때리다가 다급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마녀를 노릴까요?”
“글쎄올시다. 이미 몇몇 현상금 사냥꾼은 움직인 것 같긴 한데, 다들 허탕 쳤다는 소문만 무성하더군. 신출귀몰한 게 가히 혁명단 급이야. 무슨 재주인지 궁금하긴 하다만.”
신문팔이의 말이 끝나자 랄티아는 얼른 감사하다며 짧게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멍하니 있는 클레인스의 팔을 잊지 않고 잡아끈 그녀는 골목에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나온 정보로 행방을 추적하긴 어려워요.”
“여기서 며칠 표류해야지. 물가는 좀 비싼 편이지만, 제국 속령인 덕에 정보는 비교적 빨리 환기되는 것 같으니.”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그럼?”
의아하다는 헤더의 물음에 랄티아는 가져온 신문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랗게 표제가 적혀있었다.
「제국의 검문, 시작……. 이번에야말로 혁명단 검거하나」
그것을 본 브레딕이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검문? 우린 혁명단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출신을 따지면 충분히 검문을 벗어날 수 있어.”
“보통 때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번 검문은 혁명단을 노린 검문이고, 이 경우 수상하기만 하면 일단 잡아들일 게 뻔해요.”
조용히 신문을 눈으로 죽 읽어내리던 네토르가 랄티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찬가지로 신문을 보던 헤더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까?”
“그렇게까지 해요. 그리고 출신지를 알아보는 일 자체가 두렵진 않지만, 그 과정에서 제국군에게 검거되어서 심문받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제 경우 언니와의 연결점이 드러나서 낭패를 볼 수 있어요.”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지.”
네토르가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동의하듯 말한 것과 달리 여유로운 몸짓으로 랄티아의 손에서 신문을 가져와 단정하게 접었다.
“별로 문제 될 건 없어.”
“왜요?”
“난 신분증이 있거든.”
그 말에 클레인스를 제외한 일행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네토르를 돌아보았다. 브레딕이 기겁한 얼굴로 왁 외쳤다.
“너 제국인이었어?”
“제국 출신이야. 말 안 했나?”
“안 했어! 아니, 그런데 제국 출신이 어쩌다 우홉피아주에게?”
헤더는 대경해서 물었다가 서둘러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네토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다른 섬에 갔다가.”
“진짜 의외다……. 그럼 오래된 신분증일 텐데 통할까?”
“일단 로트 녀석의 정보가 급하기도 하고, 쓸 수 있는 게 있다면 써 봐야지.”
그 말에 다들 동의했다. 시장과 광장을 돌아다니며 다른 정보가 있지는 않나 살피던 일행은 적당한 곳에서 끼니를 때우고 숙소로 향했다. 신문팔이가 알려준 정보 이상을 찾지는 못했다. 랄티아는 한숨을 쉬다가 헤더의 옆에서 느리게 걸어가는 클레인스를 보고 브레딕에게 말했다.
“다음엔 그냥 클레인스를 떼어두고 나올까 봐요.”
“야…….”
귀가 좋은 클레인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튀어나온 말에 브레딕이 당황하며 랄티아를 나무랐다. 그러나 랄티아는 반쯤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내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령처럼 일행을 따라다닐 뿐이었다. 랄티아의 입장에서는 거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