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26)
바다새와 늑대 (225)화(226/347)
#69화
그들에게서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한 자경 단원은 수첩을 내밀며 말했다.
“신분증이 있는 분은 보여주시고, 다른 섬 출신이시면 여기에 이름과 출신지를 적어주십시오.”
“…….”
그 말에 랄티아는 조용히 앞으로 나가 대충 지어낸 이름과 출신지를 적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가짜 이름과 가짜 출신지를 적어야 한다고 알려줘야 하나 고민한 랄티아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다들 눈치가 있다면 그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자경 단원을 코앞에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랄티아가 수첩에 이름과 출신지를 적자 자경 단원은 다음 장으로 넘겨 차례대로 일행의 정보를 받아 냈다.
전부 적자 자경 단원은 하나씩 넘기며 그들을 호명했다. 각자 적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꾸하는데, 랄티아는 문득 헤더가 당황한 얼굴인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뭐지? 왜 저런 표정이지?
그러나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자경 단원이 헤더를 부른 것이다. 그에 일행은 모두 움찔하며 헤더를 돌아보았다. 헤더가 대답하기 전에 랄티아가 말했다.
“방금 부른 건 잘못 적은 것 같은데요.”
“헤더 코탕, 에페갈드 섬 출신, 틀립니까?”
“…….”
랄티아는 욕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은 그대로 쓰고 출신지만 바꿔 적었다! 랄티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헤더가 아니라 헤스거든요. 잘못 쓴 것 같은데요.”
그러자 헤더는 랄티아에게 눈치를 줬다. 굳이 바꾸지 말고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랄티아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이름이 다른 것 같다고 말해놓고 ‘앗, 착각이네요’ 하는 것도 이상했다.
되도록 이름도 완전히 다른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어쩌자고 저런 식으로 적은 거야? 랄티아는 자경 단원에게 드러나지 않게 헤더를 노려보았다.
헤더는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적은 게 맞는 것 같아요.”
“아니,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적습니까?”
“…….”
무시하는 듯한 자경 단원의 말에 헤더는 울컥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어라 더 말할 수는 없었던 터라 입을 다물고 자경 단원에게 다가갔다. 그에게서 펜을 건네받은 헤더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다시 이름을 적었다.
그러나 자경 단원이 그녀를 보더니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헤스라면서요?”
“예?”
“아니, 방금…….”
자경 단원은 자신도 당혹스러운 듯 랄티아를 가리키며 말을 끌었다. 헤더는 긴장한 얼굴로 그의 손과 랄티아를 번갈아 보다가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리인지 잘…….”
“……이 사람 좀 모자라요?”
“저기요.”
헤더가 불쾌하다는 듯 반발했다. 그러나 자경 단원은 ‘아니 그럼 왜……’하고 말하다가 이내 의심스럽다는 눈을 했다. 랄티아가 헤더를 밀어내며 말했다.
“제가 쓸게요.”
“잠깐만. 당신들 뭐야? 이거 제대로 쓴 거는 맞아요?”
“가짜로 써봤자 금방 들통나겠죠. 왜 그런 짓을 굳이 해요?”
랄티아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으나 자경 단원의 시선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랄티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상황이 영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네토르는 그들의 공기를 예민하게 살피다가 날카롭게 말했다.
“다 했으면 나가주시죠.”
“아뇨.”
그러자 자경 단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주욱 훑어보았다. 랄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그 예감이 틀리지 않게, 자경 단원이 말했다.
“같이 가주셔야 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요?”
“예.”
“……싫다면요?”
브레딕이 긴장 어린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랄티아와 헤더를 보았다가 브레딕을 응시하며 비아냥거렸다.
“거절하시기엔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 말과 함께 자경 단원이 랄티아의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뿌리치려 하자 자경 단원은 짤막한 단봉을 꺼내 들며 공중에 휘둘렀다.
“저희는 아상트라의 치안을 위한 권한이 있습니다. 따라와 주시죠.”
“이거 놓으세요.”
랄티아는 침착하게 말했으나 그는 팔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네토르는 일이 성가셔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랄티아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물을 게 뭐 있는가? 랄티아는 이를 악물고 옆에 있는 자경 단원에게로 손을 뻗었다. 랄티아의 반항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식간에 수첩을 빼앗긴 그가 엇, 하고 소리를 내는 사이 브레딕이 빠르게 발을 들어 올렸다.
그가 랄티아를 붙잡고 있는 자경 단원을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네토르가 옷 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칼을 날리기 전에 브레딕에게 걷어차인 자경 단원이 왁 소리를 지르며 단봉을 휘둘렀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휘둘러지는 것에 헤더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클레인스가 빠르게 움직이며 봉을 잡아 막고 다른 손으로 자경 단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브레딕이 서둘러 헤더가 싸뒀던 짐을 들며 외쳤다.
“이리로!”
그러면서 빠르게 창가를 뛰어넘은 그가 밖에서 날렵하게 착지했다. 그사이 네토르가 손가락 사이로 쥔 비수로 자경 단원을 찔러 제압했다. 랄티아는 헤더의 팔을 잡고 창가로 뛰어갔다.
그러나 막상 높은 창 앞에 선 랄티아가 머뭇거리자 그녀의 어깨를 잡은 클레인스가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뒤 그들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이리로 뛰어요! 누나는 옆으로!”
랄티아는 여전히 주춤거렸으나 헤더는 클레인스의 말을 따라 곧장 브레딕에게로 뛰어내렸다. 낙법을 익히지 못한 그녀를 손쉽게 받아 낸 브레딕이 헤더를 내려 주자 그제야 랄티아도 클레인스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때, 방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뒤늦게 저지한 듯 부자연스럽게 요란한 소리가 멎고, 그제야 네토르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짧게 그들에게 으르렁거렸다.
“날 혼자 두고 튀어?”
“믿은 거지!”
브레딕이 서둘러 그를 달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혀를 차며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누가 달려와요.”
클레인스의 말에 랄티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의 호루라기 소리로 자경 단원을 호출한 것 같았다. 네토르가 클레인스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 같아?”
“두 방향에서 오고 있어요. 뒤쪽과 옆쪽.”
“직진뿐이군. 앞으로만 향한다, 좋지.”
브레딕이 짧게 말하는 것과 함께 일행은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일단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랄티아는 제 앞에서 달려가는 헤더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자명했다. 헤더 탓이었다! 그러나 뛰면서 그것을 따지기에는 랄티아는 체력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 것에만 전념해야 했다.
점차 뒤처지고 허덕이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앞서가던 클레인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속도를 늦춰 랄티아의 옆으로 와 물었다.
“힘들어요?”
“제가, 체력이, 그렇게…….”
“알았어요, 말 안 해도 돼요.”
클레인스는 랄티아의 말허리를 잘라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실례할게요.”
“예?”
랄티아가 되묻는 것과 동시에 클레인스가 랄티아를 안아 들었다. 일순 깜짝 놀랐던 랄티아는 일전에 우홉피아주에서도 이랬던 경험이 있어 금방 적응했다. 대신 그녀가 여전히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숨에 헉헉거리고 있자 클레인스가 부담스럽다는 듯 질색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귀에 대고 숨 크게 쉬지 마세요.”
“거참,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나 여유로운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클레인스가 날카로운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더니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돌아본다고 해서 광경을 완전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사적인 행동 같았다.
일행들 가까이 뛰어간 클레인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꽤 가까이 따라붙었어요, 속도를 더 내야 해요!”
“젠장, 밥 먹고 뛰어다니기만 했나.”
네토르가 욕을 중얼거리며 앞서가기 시작했다. 쉴새 없이 달리자 헤더도 힘에 부친 듯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을 잡고 브레딕이 이끌었으나 추격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로트렐리와 그 일행이었다면 현란하게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큼의 전력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건물 벽을 타거나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자경단을 피해 길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한참을 뛰던 그들은 차밭에 도달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차밭은 검은 고랑을 파둔 거대한 묘지 같았다. 차나무 사이로 숨어든 일행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소리가 새어나갈까 입을 틀어막았다.
폐가 터질 것 같은 상황에 숨을 죽이려니 일행의 등이 모두 들썩거리며 가쁘게 움직였다. 그때 클레인스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이쪽으로 와요.”
그에 그들은 아예 숨을 참을 기세로 입을 다물었다. 자경단은 횃불을 치켜들고 차밭을 수색하며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러자 브레딕이 손짓하며 건너편을 가리켰다. 일행은 몸을 숙이고 기듯이 차밭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차밭을 벗어나는 순간 울타리를 둘러 온 자경 단원과 곧장 마주쳤다. 네토르가 참지 못한 욕을 지껄이며 외쳤다.
“뛰어!”
그에 클레인스가 다시 랄티아를 안아 들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랄티아가 당황해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제가 뛸게요!”
“안 돼요, 이번에 또 지쳐서 뒤처지면 그때는 곧장 붙잡힐 거예요.”
그렇게 항구까지 뛰어간 그들은 이내 별달리 갈 곳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바다로 뛰어들 수도 없는 데다 구명정을 타자니 마장석이 부족했다. 금방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구명정은 마땅한 지붕도 없었기 때문에 숨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네토르가 이를 갈며 일행을 쫓아오는 자경단을 돌아보았다가 소매 속에서 비수를 우르르 꺼내 손가락 사이로 쥐었다.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가!”
“잠깐, 네토르!”
브레딕이 당황해 그를 돌아보았다. 밤바다가 울부짖는 때였다. 파도가 채 삼키지 못한 소리에 의존해 항구를 뛰어가던 클레인스는 기묘한 소리를 듣고 우뚝 멈춰 섰다.
뒤의 일행을 보며 상황을 계산하던 랄티아가 의아하게 클레인스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뭔가 이상해요. 앞에 아무도 없는 게 맞나요?”
“네?”
랄티아는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그들과 자경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클레인스가 다시 물었다.
“앞에 배가 없는 게 확실해요?”
“당신도 그 정도는 보일 것 아녜요? 앞은 빈 정박장이에요.”
그러나 클레인스는 그 말에 오히려 더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헤더와 브레딕이 멈춰선 클레인스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클레인스, 뭐 해?”
“앞에서……. 말소리와 배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요.”
“뭐?”
브레딕이 되묻는 것과 동시에 클레인스가 듣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멀리 떨어진 뒤에서 네토르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서 뭘 하고 있어! 어서 뛰어!”
그러나 클레인스는 들었다. 희미하게 묻는 소리를.
「우리 목소리가 들리나? 그럼 대답해봐. 도와줄까?」
클레인스는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네.”
순간 일행들은 누군가에게 멱살이 잡힌 것처럼 비어있는 정박장의 바다로 확 끌려갔다. 그러나 바다에 빠지기 전에 그들의 모습은 마치 공기 중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것을 본 네토르가 뛰어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행이 사라진 자리에서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등 뒤로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다급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역시 멱살이 잡혀 훅 뒤로 딸려갔다.
일행이 사라진 정박장은 자경단이 뛰어다니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