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31)
바다새와 늑대 (230)화(231/347)
#74화
암호에도 남자는 눈만 끔뻑였다. 모르는 기색이었다. 에퀘야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렇게 구해줬는데 유명하다는 아상트라의 차도 대접하지 않는 건가?”
“……아상트라의 차는, 수확해 가공하는 즉시 모두 제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런가. 유감이야.”
에퀘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이도 마흔이 넘은 마당에 랄티아의 두 배쯤 되는 듬직한 몸집으로 어떻게 그런 속도를 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자경 단원을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클레인스에게 고갯짓했다.
랄티아가 클레인스의 어깨를 작게 두드리며 속닥였다.
“자경 단원을 들라는 것 같아요.”
“음, 무거울 것 같은데…….”
그쪽은 나도 들고 뛰는 주제에 무슨 엄살이에요? 랄티아는 그렇게 따지고 싶었으나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클레인스는 쓰러진 자경 단원을 들더니 이내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졌다.
그러자 사내는 당황해서 그들을 보았다.
“그, 무슨……?”
“자경단 본부에 데려다주려고. 신경 쓰지 마시오.”
에퀘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랄티아와 클레인스는 에퀘야의 뒤를 쫓아 자리를 떴다. 거리가 멀어지자 클레인스가 작게 물었다.
“정말로 자경단 본부에 데려갈 생각은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처리할 거야.”
“처리라면…….”
“대충 차밭에 거름으로 파묻지 뭐.”
클레인스는 말문을 잃고 에퀘야를 보았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짊어진 자경 단원과 에퀘야를 번갈아 보다가 랄티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그 방법밖에 없나요?’하고 묻는 것 같은 얼굴에 랄티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아까 구한 시민에게 피해가 갈 텐데 상관없나요?”
“그 사람은 이미 의심받는 상황이고, 언젠가는 다시금 추궁받을 거야. 자경단 녀석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낫지.”
“지금이야 그냥 의심이지만 그 사람을 잡으려던 자경 단원이 죽거나 사라진 걸 알게 되면 그때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돼요. 무조건 죽게 될걸요.”
“……. 사람 사정을 그렇게 봐주는 녀석도 아니면서 왜 이리 참견이야?”
랄티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클레인스를 흘끔 보았다. 에퀘야는 안절부절못하는 클레인스를 흘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나도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소리를 좋아하진 않거든. 그건 제국의 논리니까 말야.”
에퀘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외진 곳으로 향했다. 골목의 구석에 자경 단원을 아무렇게나 던져 내려놓은 에퀘야는 어깨를 주무르며 사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녀는 클레인스에게 물었다.
“뭔가 더 들리는 건 없나?”
“……아직은요.”
“좋아, 그럼 후미진 곳을 먼저 살펴보자고.”
에퀘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긴 그들은 곧이어 넓게 펼쳐진 차밭의 건너편에 도달했다. 모피 털 사이에서 기어 다니는 머릿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검은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었다.
에퀘야와 일행은 노동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관광객인 척 암호를 말했다. 그러나 좀처럼 협력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 드넓은 차밭의 둘레를 돌아가며 문답을 하던 그들 중 클레인스가 말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
“아.”
랄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퀘야를 보았다. 에퀘야 역시 금방 수긍해 그들을 이끌고 항구로 발을 옮겼다. 랄티아가 물었다.
“좀처럼 만나지를 못하는데요.”
“어쩔 수 없지. 곧장 만났다면 오히려 빠른 편이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정박장에서 능숙하게 혁명단의 배에 오른 에퀘야는 랄티아와 클레인스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갑판 위에는 헤더 일행과 브레딕 일행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들에게서 목걸이를 받고 있던 무르하에게 에퀘야가 목걸이를 건네며 물었다.
“다른 조는 수확이 있었나?”
무르하가 고개를 젓자 에퀘야는 흠,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랄티아는 그들을 뒤로하고 일행에게 향했다. 긴장했던 것인지 안색이 희게 떠 있던 헤더가 그녀를 보고 반색했다.
“랄티아. 괜찮았어?”
“저희 쪽은 문제없었어요. 다들 어땠어요?”
“어려운 일도 없던걸.”
브레딕이 대꾸하며 랄티아와 클레인스를 살폈다. 아상트라를 휘젓고 다닌 탓에 피로해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보이자 그는 안도하며 말했다.
“막상 이렇게 혁명단 일에 발을 들이니 영 싱숭생숭하네.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고.”
“적어도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는 협력해야죠.”
랄티아의 말에 브레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들 사이로 네토르가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끌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그들이 고개를 돌리자 에퀘야와 무르하가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쳤다.
그들이 대화를 끝내길 기다렸던 듯, 에퀘야가 다가왔다.
“다들 수고했다. 무르하가 다시 주술을 걸려면 시간이 걸리거든. 오늘은 푹 쉬고 내일 같은 조로 다시 살핀다. 질문 있나?”
언제쯤 접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게, 이번 주 내로 접선하면 좋을 텐데 말야!”
에퀘야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걸걸하게 갑판과 하늘을 울렸다. 헤더는 어색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랄티아에게 말했다.
“어째 생각보다 금방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구나.”
“그러게요.”
랄티아는 적당히 대꾸하고는 매정하게 홀로 선실에 들어갔다. 헤더가 민망한 표정으로 랄티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브레딕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운 내, 누나. 저 애는 좀…… 개인적이잖아.”
“아, 응. 그렇지.”
사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랄티아는 헤더를 좀 꺼리고 있었지만. 네토르는 그녀를 달래는 브레딕을 보았다가 랄티아가 들어간 계단을 흘끔 보았다.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애초부터 헤더는 일행에 끼워 넣을 생각 자체를 안 하던 녀석이니 그럴 수 있다손 쳐도 이미 함께 다니는 마당에 저렇게 대놓고 무시할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들 사이에서 클레인스가 말했다.
“저희도 들어가서 쉬죠.”
“그래.”
네토르는 순순히 끄덕이며 선내로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날에도 비슷한 일과였다. 무르하가 나눠준 주술 표식을 목에 걸고 접선을 하려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같다고 해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랄티아는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수그렸다. 체력이 유독 약한 랄티아는 이를 악물고 에퀘야와 클레인스를 쫓아다녔지만, 종종 이렇게 발을 멈추고 쉬어줘야 했다. 지금도 클레인스가 그런 랄티아의 등을 도닥이며 숨을 고를 수 있게 돕는 중이었다. 자신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한 랄티아가 에퀘야에게 말했다.
“왜 저를 굳이 조에 포함시킨 거예요? 저는 배에 있는 편이 차라리 도움이 될 텐데.”
“무르하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난 그의 의견을 꽤 중요하게 여기거든.”
“주술사가 아니라 예언가라도 돼요?”
랄티아의 말이 웃겼는지 에퀘야는 껄껄 웃어댔다.
“그 녀석은 ‘눈’을 타고났잖아? 대충…… 누가 어디에 적재적소인지를 잘 안단 말이야.”
“…….”
능글맞게 웃는 에퀘야의 얼굴을 본 랄티아는 숨을 헐떡이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자신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군. 하긴, 혁명단의 대장이다. 사람을 쉬이 믿어서는 안 되겠지.
무르하가 이 일이 랄티아의 적격이라고 봤을 리가 없다. 그건 랄티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밖으로 끌고 다니며 이런다는 것은…….
“괜찮다는 듯 말했지만 뭔가 일이 꼬였군요?”
“우리 똑똑이, 정말 똑똑하단 말이지.”
“생각보다 접선이 늦어지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 우리보다 아상트라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거죠?”
랄티아의 말에 에퀘야는 이렇다저렇다 답하지 않고 씩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그때 랄티아의 등을 도닥이던 클레인스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누가 암호를 밀고해요.”
“뭐?”
“네?”
에퀘야와 랄티아 모두가 놀라서 클레인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혼란한 얼굴로 다시 되풀이했다.
“누가……. 우리의 암호를 자경 단원에게 말하고 있어요.”
“누군지 알겠어?”
그랬으면 이미 말했겠지! 랄티아는 에퀘야의 미련한 질문을 꼬집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껏 숨을 몰아쉬는 중이라 랄티아 대신 클레인스가 입을 열었다.
“낯선 목소리예요.”
“일단 가보자고.”
에퀘야의 말에 랄티아의 얼굴이 희게 떴다. 그러자 클레인스가 랄티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에퀘야는 능글맞은 얼굴로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해댔다.
“젊다, 젊어. 아니지, 너희는 어린 편 아니니?”
“헛소리 말고 빨리 일에나 집중하시죠!”
랄티아가 불쾌하다는 듯 뾰족하게 찌르듯 말했으나 에퀘야는 클레인스가 가리키는 대로 달려가면서도 장난기를 거두지 않았다.
“누가 제일 일에 집중 못 하고 있나 몰라!”
“너요, 너! 그쪽이! 제일!”
울컥 짜증이 치솟은 랄티아가 아르릉거리며 에퀘야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그래도 에퀘야는 유쾌하다는 듯 낄낄거리다가 이내 순식간에 웃음을 감췄다. 랄티아 역시 입을 다물고 소리가 가까워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실랑이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는 곳에 멈춰선 클레인스가 길의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그의 머리 위로 고개를 내민 에퀘야가 혀를 찼다. 그에 랄티아는 속삭이듯 물었다.
“누구예요?”
“어제 우리가 구한 시민이군.”
“오.”
그 대답에 랄티아는 순식간에 정황을 알아냈다. 어제 기절했던 자경 단원이 도로 그 사람을 잡아가려고 왔군. 그리고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잡혀가지 않으려다가 어제 그들을 공격한 일행을 이야기한 것이다.
랄티아는 옅게 눈을 내리뜨며 사고를 가속했다. 어제 에퀘야의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눈치챘군. 그게 암호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하지만 눈치채는 게 너무 빨랐다. 이상할 정도로 낯선 단어의 조합도 아니고, 에퀘야처럼 일상어로 위장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것을 단번에 암호라고 알아냈다고? 순식간에 미심쩍은 부분을 알아낸 랄티아가 작게 말했다.
“어쩌면 아상트라의 분열이 생각보다 심각한 걸지도 모르겠는데요.”
“협력자들의 내부에서도 파가 갈렸다는 소리냐?”
“아니면 정보가 새어나간 것일 수도 있겠어요. 어쨌거나 아상트라 내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나쁘다는 거죠.”
랄티아의 말에 에퀘야는 굳은 얼굴로 자경 단원에게서 풀려나는 시민을 보았다. 이미 얻어맞았는지 그들이 길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닥에 웅크려있던 그는 자경 단원들이 떠나자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는 탁자에 앉은 에퀘야를 마주하고 으악 비명을 질렀다.
“다, 당신들, 여긴, 여긴 어떻게.”
에퀘야의 말에 따라 골목을 돌아 창문으로 몰래 집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졸도할 것처럼 질린 사내의 얼굴을 보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에퀘야는 가타부타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우리를 팔아넘겼군, 형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