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34)
바다새와 늑대 (233)화(234/347)
#77화
긴 머리의 단원이 부드러운 어투로 대꾸했다. 더 자세한 해결책이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랄티아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당황한 시선이 랄티아에게 모였다가 에퀘야를 향했다. 단원 중 하나가 랄티아에게 물었다.
“혹시 별다른 계책이 없다면…….”
“알려줄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요.”
“정보.”
에퀘야가 대뜸 말했다. 랄티아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올라가자 에퀘야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대장들에게 단순히 협력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너희가 바라는 정보가 매우 우선시 될 수 있게 힘을 써보지.”
“……. 그렇다면 대장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
기밀 정보를 묻는 발언에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랄티아에게 꽂혔다. 그러나 에퀘야는 껄껄 웃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랄티아는 정말로 저 사람이 아직까지도 혁명단을 말아먹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서부 바다는 나, 케르헤티 왕의 누이인 에퀘야 싱 게르멜라. 중부 바다는 게슈베르송 출신의 칼란투. 동부 바다는 좀 복잡하긴 한데……. 최근에 복귀했으니, 뭐.”
에퀘야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어깨를 으쓱이고 이어서 말했다.
“동부 바다의 대장은 백려 출신, 이세운이다.”
마지막에 들려온 이름에 랄티아는 눈을 크게 떴다. 표정을 감춰야 한다는 생각도 일순 까맣게 잊힐 정도로 놀란 그녀가 멍하니 에퀘야를 보았다.
“……예?”
세운? 이세운이라니? 검은바다의 선실 내부가 랄티아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 언니를 함께 간호하고 하선하는 그때까지 사방팔방으로 선원들을 치료하고 다녔던 의원 아닌가.
그 의사 양반이 혁명단의 동부 바다 대장이라고? 그림은 틀렸는데 모양은 들어맞는 괴상한 퍼즐 조각을 손에 쥔 기분으로 랄티아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녀의 혼란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에퀘야는 말을 이었다.
“극지방은 애초에 위험하고 제국이 기승을 부리지도 않아서 우리 혁명단도 딱히 가지 않는다. 무인도 지대의 경우엔 사람이 있나 살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말이지. 제국도 무인도 지대는 두려워하니까.”
“…….”
세운……. 그 의사 양반과 연락이 닿으면 자신들의 사정을 얼추 아는 만큼 정보를 얻기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세운이 랄티아와 로트렐리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접촉을 시도했다가 로트렐리의 이야기가 혁명단에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랄티아는 짧게 고민했다. 세운을 믿고 싶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세운에게 자신들의 정보가 넘어갔을 텐데, 그의 반응도 걱정이었다. 혁명단은 로트렐리와 발카를 반기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절대 랄티아나 로트렐리가 바라는 방향은 아닐 것이다.
제국을 피해 무인도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랄티아는 혁명단에 의탁할 마음이 없었다. 망설이던 랄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는 제외하고 중부 바다와 협력해주세요. 하지만 만약 동부에서 뭔가… 연락이 닿는다면 우리에게도 공유해줘요.”
랄티아를 잠시 응시한 에퀘야는 흔쾌히 승낙하고 단원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정했으니 너도 대가를 줘야지.”
“……자경단이 나서기 전에 일을 치러야죠. 아예 대놓고 소동을 일으키면서 나서서 반군을 수소문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단원 중 하나가 반발하려 하자 에퀘야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랄티아는 짧게 눈치를 살피고 마저 말을 이었다.
“작전은 간단해요. 자경단을 부러 자극해서 아상트라에 큰 소동을 만드는 겁니다. 그 뒤엔 소란에 이끌려서 반군이 나오겠죠. 그러면 반군과 합류하면 될 일이에요.”
“자경단을 당장 상대하자는 겁니까?”
“무르하의 주술을 쓰면 되죠.”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무르하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그는 부담스러운 듯 소심하게 고개를 틀었다. 에퀘야는 씩 웃으며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무르하. 할 수 있겠어?”
“그…….”
무르하는 어물어물 망설이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할 수 있다고 할 때까지 갈굴 거잖아요, 에퀘야.”
“역시 네가 똑똑이 다음으로 똑똑하다.”
무르하를 놀리자고 졸지에 같이 욕을 먹은 기분이 된 랄티아는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을 끝으로 선실에서 나올 수 있게 된 랄티아는 속으로 자유를 부르짖으며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뛰쳐나오며 문을 걷어차고 싶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만한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랄티아의 발로 문을 걷어차 봐야 그녀의 발가락만 아플 것이 뻔했다.
그날 밤, 에퀘야는 갑판 위로 단원들을 소집해 작전을 알렸다.
“―그 뒤엔 무르하가 빈 찻잎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자경단은 우리 쪽 암호는 알아도 반군이 대꾸해야 할 암호는 모르지. 자경단이 우리로 위장하더라도 각자 얼굴을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처리 가능하겠지?”
“예!”
“좋아, 당장 준비한다!”
에퀘야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단원들 사이로 헤더가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우리도 나서야 하는 건가?”
“저 사람들은 그러길 바랄걸. 정보에만 눈이 멀어서 졸지에 노예계약을 해버렸어.”
네토르가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그 말에 랄티아는 문득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형제를 찾는다면서 관련 정보 안 얻어도 상관없어요?”
“됐어, 너희 따라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실마리를 잡겠지.”
네토르가 손을 내젓자 랄티아는 그러려니 생각했으나 브레딕은 찜찜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차마 그의 면전에 그 형제가 이미 죽어서 그렇잖아, 하고 말할 수는 없었던 브레딕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에퀘야가 그들에게 걸어왔다. 일행 앞에 선 그녀는 잠시 그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네 말대로 꽤 큰 소동이 될 거야.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는 녀석은 여기 남아있어.”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요.”
“뭐야, 내가 명령하기 전에 결정을 해? 그냥 같이 갈래?”
랄티아는 차게 식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이게 웬 심술이란 말인가? 그러나 에퀘야 역시 농담이었던 듯 가뿐하게 화두를 돌리며 일행을 보았다.
“무르하가 자리를 비우니만큼 표식을 잘 지켜야 해. 표식이 파괴되면 이 배의 은신도 풀린다.”
“그걸 저 혼자 하라는 소리는 아니죠?”
“물론이지. 그렇다고 단원들 사이에 너만 남겨두면 불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너희 중 누가 똑똑이와 남아주지 그래?”
그 말에 클레인스가 손을 들었다. 굉장히 빠른 결정이었다.
“저는 사람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하니까 자경단과 혁명단을 잘 구분하지 못해요. 딱히 쓸모없을 거 같으니까 배에 남을게요.”
그에 에퀘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일행에게 손짓했다. 클레인스와 랄티아를 두고 다른 일행이 에퀘야에게 향했다. 무리하와 소수의 단원들이 배에서 차례차례 내려 항구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랄티아는 옅게 한숨을 쉬며 클레인스를 돌아보았다. 클레인스는 에퀘야를 따라가는 일행을 어깨를 늘어뜨리고 응시하고 있었다.
“클레인스.”
랄티아의 부름에 생경한 표정을 하고 돌아보는 그에게 랄티아는 미미하게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이제 어쩔 거예요? 정말로 단순히 혁명단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합류하기로 한 건 아니죠?”
“…고민 중이에요.”
“고민이요.”
“네. 검은바다는 당신을 쫓을 텐데, 그러다 제가 검은바다에 붙잡히면 하몬이 죽겠죠.”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하몬이 안 죽었을 걸 용케 믿네요.”
랄티아의 말에 클레인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빈 공기를 채우듯 불어온 바람에 그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느리게 휘날렸다. 일순 드러난 그의 은빛 눈이 가라앉아있었다. 그것을 보자 랄티아는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검은바다에는 안 잡히면 될 일이에요. 아니면 애초에 우리랑 계속 다닐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모르겠어요.”
“…….”
답답해 뒤지겠네……. 랄티아는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클레인스가 혁명단에 아주 적을 둘 마음이라면 지금 랄티아 일행과 이럴 게 아니라 단원들과 어울려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땅히 목표를 정하거나.
그러나 클레인스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굴고 있었다. 랄티아는 에퀘야와 셋이 다닐 때의 그를 떠올리고 가라앉았던 시선을 올렸다.
“클레인스, 너 분쟁이 싫죠.”
“…….”
클레인스는 대꾸하지 않았으나 랄티아는 그의 묵언 아래로 흐르는 심리를 기민하게 간파했다. 랄티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응시할 때였다.
“출발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