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41)
바다새와 늑대 (240)화(241/347)
#84화
“미친 사람이다. 학자들은 다 저런가?”
“알 바야? 저 자식도 또라이라는 걸 알았으니 됐지.”
내 말에 도멤은 금방 동의하면서도 찜찜하다는 듯 늙은 학자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런 또라이가 반강제로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나는 빨리 이 뱀의 목표를 달성하고 물자를 산 뒤 이 갈리니 섬을 떠나고 싶었다.
실제 학자와 그럴듯한 목표와 확고한 학파 소속증이 갖춰지자 연구 목적 출입권을 따내는 것은 매우 쉽게 끝났다. 물론 우리가 여객선에서 털어온 자금이 충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키이엘로가 미인계와 뇌물로 직원의 옆구리를 적당히 찔렀던 것이다.
나는 키이엘로를 보며 작게 말했다.
“그냥 학파 소속증 없었어도 네 그 ‘처세술’로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신고당했겠지, 당연히…….”
키이엘로는 황당하다는 듯 말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하긴, 학파 소속증이 있으니 일 처리를 좀 빨리하는 것으로 봐준 거였지, 아예 빈털터리들이 와서 그러면 누가 봐도 수상할 것이다.
수월하게 일반 관광 울타리 너머까지 진입한 나는 가까이서 보이는 죽음의 호수를 보고 말을 잃었다. 가까이에서 보자 더 삭막했다. 붉은색의 호숫물에서는 묘한 냄새가 나고 있었고, 주변은 회색빛으로 죽어버린 초목과 석화한 것처럼 굳어진 동물의 사체가 가득했다.
그런 광경을 가까이하고도 델라종은 얼굴이 환했다. 그는 죽음의 호수에 연구 목적으로 입장하게 된 것에 지극히 감격한 사람답게 서둘러 짐을 풀었다. 그 허름한 집에서 어떻게 꿍쳐두고 있던 것인지, 온갖 실험도구가 가방에서 끝도 없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역시 학자들은 다 또라이인가 봐, 하는 눈을 하던 도멤이 슬쩍 뒤로 물러나 뱀에게 속삭였다.
“이제 어쩔 거야?”
『호수에 더 가까이 가볼 수 있나?』
“조심해.”
키이엘로가 작게 말하며 도멤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호숫물에 빠지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저 동물 사체들 사이에 하나가 될 게 뻔했다. 도멤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경계하는 기색으로 호수 근처로 가 델라종에게 물었다.
“어떤 원리로 호숫물이 생명을 앗아가는지는 아는 게 없나요?”
“아직 딱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호숫물에 빠지면 빠진 부분부터 서서히 피부가 부식되어 사망에 이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해맑고 환하게 말하는 노인의 어투와 달리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우투그루에게 작게 말했다.
“정말로 밤에 몰래 왔다가 발이라도 헛디뎠으면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었던 거로군.”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려줄까? 저 뱀을 여기에 던지고 갈 길 가야 했다는 생각 중이야.”
“우리 그거 전에도 말하지 않았었나?”
“두 번 말하는 이유가 뭐겠어? 열렬히 염원한다는 소리지.”
우투그루는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이내 엇걸었던 팔짱을 풀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흘끔 델라종을 보았다. 늙은 학자는 호숫물을 조심스럽게 병에 담느라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손과 팔을 모두 단단히 감싼 천을 보자 호숫물의 위험성이 새삼 와닿았다. 나는 학자에게 물었다.
“그 장갑을 착용하고 물에 닿으면 안전한 건가?”
“아뇨, 적은 양의 침수를 막아주는 역할일 뿐이지, 이 상태로 호숫물에 담그면 아무 효력 없습니다.”
이거 골치 아프네. 나는 뒤집어쓴 로브 아래로 인상을 찡그리며 우투그루를 보았다. 그 역시 성가시다는 얼굴로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때 호수에서 멀어진 도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래?”
“자기가 생각하는 방법이 있긴 하대.”
우투그루가 작게 묻자 도멤 역시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다. 그 말에 키이엘로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왜 바로 하질 않고? 뭔가 준비가 필요한 일이래?”
『저녁에 다시 오지.』
“뭐?”
뱀의 말에 우투그루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나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뱀을 보았다. 우리의 날카로운 시선에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일 것 같아서 그러는 게다.』
그런 뱀을 보며 착잡한 얼굴을 하던 도멤이 뒤를 돌아 델라종에게 물었다.
“저녁에도 이곳에 올 수 있나요?”
“연구 목적이라면 얼마든지요.”
그렇다는데? 그렇게 말하듯 다시 우리를 돌아보는 도멤을 보며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춰진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겨우 끝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델라종과 거리를 두고 떨어진 우리는 뱀을 보며 물었다.
“뭘 하려고 저녁에 다시 오라는 거야?”
『눈에 띄는 짓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너무 밝고 멀리서도 보일 것 아냐.』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뭘 하려고?”
답답하다는 듯 도멤이 묻자 뱀은 어물어물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런 요르문간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확실한 방법이긴 해?”
『확률로 친다면 8할쯤.』
“…….”
『9, 9할 99푼!』
우리의 시선이 매섭게 느껴졌는지 뱀이 얼른 말을 바꿨다. 이런 게 세계의 뱀이라니. 그렇게 중얼거린 우투그루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그럼 해가 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할 일이 딱히 없다는 건데. 항구 마을 쪽으로 가서 물자나 사서 옮길까?”
“왕복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다 갈 것 같은데.”
우투그루의 말에 도멤이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듯 질색했다. 그야 그랬다. 죽음의 호수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바다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 우투그루는 말이나 마차를 빌리는 것을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키이엘로가 돈주머니를 꺼내 보는 내 옆에서 남은 주화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말을 빌리면 돈이 동나겠군. 마차는 약간의 삯을 내고 얻어타면 그럭저럭 괜찮겠지만…….”
“오가는 비용이 그렇게 비싸?”
“말은 원래 비싸, 로트. 빌려 간다던 사람이 그대로 배를 타고 가버리면 어떻게 하겠어? 마차는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키이엘로는 간단하게 설명하더니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가 말을 이었다.
“가장 싼 마차는 닭장처럼 사람들끼리 빽빽하게 앉아서 가야 해. 그리고 이곳에는 딱히 중간 가격의 마차가 보이질 않더라. 그렇다고 개인이나 단체 단위로 마차 하나를 빌리게 되면 거의 말 가격과 비등해져.”
“마차는 훔쳐 가지 못할 텐데.”
“강도질은 할 수 있잖아.”
오. 나와 도멤이 짧게 소리를 냈다. 하긴, 비싼 값을 내고 마차를 빌릴 여력이 있는 사람이 굳이 마부의 주머니를 털 생각을 하진 않겠지…….
아닌 척 키이엘로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것 같던 우투그루가 끙 소리를 냈다. 그에 도멤이 얼른 말했다.
“그냥 돌아가면서 사는 게 제일 경제적일 거 같은데?”
“그래, 괜히 사람 사이를 들쑤셔서 위험을 높일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하며 나를 흘끗 보는 우투그루를 보니 ‘가장 싼 값의 마차를 탔을 때 처할 수 있는 위험’을 그 짧은 사이에 수십 가지는 생각한 모양이었다.
낮 내내 델라종이 원하는 만큼 조사한 뒤에야 우리는 식사를 하러 갔다. 점심은 간단하게 때웠지만 하는 일 없이 델라종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꼴만 구경한 탓에 별로 지치지도 않았다.
델라종과 그의 손자의 밥값도 내준 탓에 우투그루는 속이 짜 죽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내내 로브를 덮어쓰고 있어 불편했던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후드를 벗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발카 역시 내 옆의 의자로 내려와 크기를 평소대로 키웠다.
『힘들어……. 너무 피곤해.』
“가방 안에 들어가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발카를 쓰다듬으며 묻자 바다새는 잔뜩 언짢은 기색으로 부리를 딱딱거렸다.
『어느 쪽이든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아.』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호수 근처에서 델라종과 다시 만났다. 손자인 목동이 보이지 않자 우투그루가 의심하는 것이 명백한 눈초리로 늙은 학자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델라종은 서둘러 변명했다.
“손자 아이는 목동 일을 하겠다고 갔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리 재미있진 않았던 모양이라…….”
그야 어린애가 학자가 이것저것 중얼거리면서 논문 뒤적이는 것을 즐겁게 볼 일은 없었다. 다 큰 어른인 우리도 진절머리난다며 쳐다보던 것을 어린애가 좋아하겠는가? 목동 일을 하면서 뛰노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우투그루는 여전히 약간 미심쩍은 기색이었으나 우리는 별달리 따지지 않고 죽음의 호수로 향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져 아직 석양도 지지 않고 있었다. 초여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훌쩍 무르익은 계절은 더위와 함께 유독 오래 땅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