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53)
바다새와 늑대 (252)화(253/347)
#96화
여자는 초조하게 찻잔을 매만졌다. 술렁이는 마음을 달래기 위한 손장난이었으나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찻잔을 보고 있자니 이러다 깨 먹으면 어쩌나 싶은 걱정만 들었다. 호화로운 방에서 여자는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섬마을을 나온 게 괜한 짓이었나. 하지만 터울이 많은 언니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면 폭삭 망하는 섬마을에서 더 고달프게 살았을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잠자리 편하고 먹고 마실 것 좋은 곳에서 위장 좀 쓰린 게 훨씬 낫지.
여자는 다갈색 눈동자를 들어 결심을 다졌다. 여태껏 잘 해왔잖아? 고작 두 달 지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그때 그녀가 있던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치렁치렁한 잠옷 차림의 소녀가 들어왔다. 아름다운 청록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자줏빛 눈동자를 들어 찻잔을 매만지던 그녀를 보고 웃었다.
“내가 제때 안 나오면 문에 냅다 던지기라도 하려고?”
“예?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어요. 농담이라도 그런 무서운 말씀 마세요.”
여자가 화들짝 놀라 찻잔을 서둘러 내려놓았으나 잠옷을 입은 소녀는 어깨만 으쓱이더니 설렁설렁 걸어와 맞은편 소파에 털퍼덕 앉았다. 그에 여자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의관을 정제하시는 게…….”
“뭐 어때, 엘레나 언니. 너랑 나뿐인데. 뭐야? 홍차? 나도 한 잔 줘.”
그러니까 언니니 하는 지나치게 격식 없는 말투도……. 엘레나는 두 달간 이 변덕스러운 소녀에게 꽤 익숙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토를 다는 것은 관두고 차를 따라주었다. 요정 날개처럼 얇고 은은하게 반짝이는 모슬린 옷감 아래로 소녀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어쨌든 엘레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뭐,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지 않으시면 되는 일이지. 사실 상대방은 옷 시중에 목욕 시중까지 받는 이이니 이 정도 노출에는 낯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소녀가 차를 홀짝이며 오수의 후유증처럼 따라붙은 나른함을 떨쳐 내는 동안 엘레나는 결국 숄을 하나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소녀, 샤를리나 황녀가 물었다.
“삼촌네는 어디쯤이래?”
“오늘 소식이 닿았어요. 쿤트만 제도에서 다시 여객선을 탔다고 하시더라고요.”
“사나흘 내로 오시겠군.”
“예……. 자세한 내용은 여기 편지가 있으니 직접 확인하셔도….”
엘레나가 협탁 위에 올려뒀던 편지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샤를리나가 손짓했다.
“됐어, 뭐라고 할지는 뻔하지. 애시포드 남작이 움직인 걸 봤잖아? 그 부분은 나도 파고 있었으니까.”
“네에…….”
엘레나는 애시포드 남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어색한 얼굴을 했다. 로트렐리와 결혼하려던 남자가 그녀를 쫓고 있음을 아니까 말이다. 전말을 아는 사람이야 애시포드 남작이 결혼을 하려던 여자가 수배된 마녀라는 것을 알지만 대중들은 자극적인 기사를 보고 한 편의 거창한 로맨스를 만들어냈다.
애시포드 남작과 열렬한 사랑을 하던 약혼녀가 권력을 노리던 마녀와 해적에게 희생되어 남작이 분노했다는 것이 골자였다. 엘레나는 미적지근해진 홍차를 느리게 마시며 과거를 되짚었다. 우홉피아주가 그녀의 고향 섬마을―켈란포르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켈란포르 사람들조차 그 이름을 그다지 기억하지 않는다―을 휩쓴 이후 많은 이들의 관심이 마을에 쏠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시선이 몰린 일이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걸 인식하지도 못했다. 엘레나는 샤를리나가 홍차를 홀짝이는 것을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섬마을이 북적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을 맡았던 여자가 실종되었다. …애시포드 남작의 짓일까, 아니면 단델리온 일가의 짓일까?
전자라면 로트렐리와 애시포드 남작의 결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된 것이다. 애시포드 남작이 로트렐리와 결혼하려 했던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이유도 우연히 선생의 집에 갔다가 미처 봉인되지 않은 편지를 봤기 때문이니까.
그때 마을 사람들은 그저 로트렐리가 제국의 귀족과 결혼한다는 소문만을 떠들어댔을 뿐이었다. 엘레나는 이 사실을 샤를리나나 단델리온 백작 내외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차피 조금만 파고들다 보면 알게 될 내용이지 않을까? 어렸던 때를 지나 엘레나는 이제 스물둘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엘레나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때때로 불안해졌다. 그에 반해, 엘레나 앞의 샤를리나는 열다섯이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의 귀한 교육 덕인지 뭔지 샤를리나는 행동과 사고에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엘레나와 나이 터울이 큰 맏언니, 단델리온 백작 부인은 샤를리나와 그나마 나이가 가까운 이가 엘레나라는 이유로 샤를리나의 친구 겸 시녀로 그녀를 붙여뒀다.
샤를리나 황녀를 지키고 가깝게 지내라는 명목이었으나…….
‘상대는 황녀라고! 나는 시골 촌년이고!’
엘레나는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다급하게 삼켰다. 샤를리나 황녀는 삼남 사녀를 가진 제국 황족 중 차녀였다. 순서로 따지자면 넷째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장남, ‘난데없는 결혼’으로 도피한 장녀, ‘모종의 이유’로 두문불출하고 있는 차남으로 인해 샤를리나는 다음 황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암만 귀족과 결혼한 아르세나 언니 덕분에 엘레나도 준귀족 취급을 받고 있다지만, 엘레나는 평생을 시골 여자애로 살아왔다. 엘레나의 아버지가 귀족과 결혼한 장녀 아르세나를 가리키며 늘 하던 말이 ‘결혼하더니 가족은 거들떠도 안 보는 못된 계집’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언니였더라도 다신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을 거야. 엘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이야 습격 이후 아버지가 죽고 가족의 소식을 들은 아르세나가 엘레나를 제국으로 데려왔지만, 여하간 엘레나는 황녀와 그 격차가 까마득한 입장이었다. 그때 샤를리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네? 아, 아뇨……. 아무것도요.”
샤를리나 황녀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본론을 꺼냈다.
“언니는 그 마녀랑 같은 섬 출신이랬지? 나이도 비슷하다며.”
“…누가 그래요?”
“외숙모가.”
“아…….”
엘레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찻물을 들이켰다. 샤를리나가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바다새를 굳이 얻어야 할 이유가 뭔지 생각을 좀 해봤거든.”
“……황제 폐하께서 바다새를 원해서가 아닌가요?”
“황실이 초월자와 그 전설에 집착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단순히 바다새를 수집하고 싶어서 그렇게 많은 인력을 소모하겠어? 너무 낭비가 심하잖아.”
마치 자신은 황실 인원이 아니란 듯 말하는 태도와 주변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본 엘레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참았다.
“바다새가 필요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야.”
“그런가요? 항해술은 이미 상당히 발전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항해에 쓰려는 게 아닌 거지.”
엘레나는 샤를리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항해에 쓰이는 새를 항해에 안 쓴다고? 로트렐리가 바다새를 데리고 항해에 나설 때 어른들이 쉬쉬하며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떠들던 것을 떠올린 엘레나는 의아하기만 했다. 그 새를 그런 식으로 쓰지 않으면 대관절 어디에 쓰려고?
찻물을 입에 머금고 눈만 굴리며 고민하는 엘레나를 보고 샤를리나는 말괄량이처럼 낄낄 웃으며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그에 얼른 차를 넘긴 엘레나가 조심스레 지적했다.
“황녀님, 역시 의관을 정제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싫어. 어쨌든, 뭔가 감이 잡히는 게 있어?”
“…글쎄요. 바다새는 애초에 항해에 도움이 되는 새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는데…….”
엘레나는 섬에서 로트렐리에게 항상 붙어있던 파란 새를 떠올렸다. 로트렐리가 뱃일을 위해서든 뭐든 섬을 오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붙박아두고 응시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고 구경거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로트렐리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면모가 있었다. 그 형형하게 빛나는 파란 눈 때문이었을까?
물론 본인은 그걸 좋아하지 않았지. 엘레나는 로트렐리와 곧잘 어울렸었지만, 수년 전 로트렐리와 섬마을 여자아이들의 처우를 위해 시위를 했다가 실패한 이후로 좀처럼 말을 섞지 않았었다. 엘레나의 시선이 붉은 찻물을 향해 내려갔다가 그 아래로 침잠했다.
앞으로 그 애를 만날 기회가 있을까.
“내 생각에 바다새는 일종의 단계야.”
샤를리나의 목소리에 엘레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어벙하게 되물었다.
“예, 예?”
“바다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바다새를 이용할 다른 목적이 있는 거지. 말하자면 바다새는 과정 중 하나랄까.”
“과정이요? …어쩌면 발견 못 한 다른 섬이 있나 알아볼 심산인 건지도요.”
“글쎄.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 아버지를 응원해야겠는걸.”
샤를리나 황녀가 코웃음 쳤다.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소녀의 모습은 일견 귀여워 보였으나 엘레나는 그녀를 그렇게 여길 수 없었다. 다른 섬이 발견되면 그곳을 식민지 삼을 텐데 그걸 응원한다는 뜻인가?
하지만 여타 다른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 샤를리나도 자신이 향유할 것들이 풍족해지는 것에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것이 누구를 어떻게 수탈해서 오는 것인지 샅샅이 알고 있더라도 그랬다. 엘레나는 그것을 꼬집는 대신 물었다.
“바다새를 이용할 다른 용도라니, 상상이 안 가는데요.”“아버지 뒤에 암약하는 자가 있잖아.”
그 말에 엘레나는 서둘러 사방을 훑어보고 응접실 밖에 기척이 있는지 살폈다. 이번만은 엘레나도 참을 수 없었다.
“황녀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