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63)
바다새와 늑대 (262)화(263/347)
#106화
나는 침착하게 루루미를 떠올렸다. 그래, 마녀가 또 변덕을 부려서 올지도 모르잖아. ‘그때 마지막이라고 한 거? 취소하지 뭐!’ 이러면서. 그러면 나는 이 뱀들을 데려가서 초월자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시라고 말해야지. 미심쩍은 얼굴로 무어라 타박할 거라고 생각한 발카도 웬일로 조용했다.
미적거리다가 우투그루와 도멤이 오기 전에 그냥 빨리 해치워 버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뭇거리던 손을 파도 속으로 첨벙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결의 감각이 쓰라린 손을 감싸왔다. 그러나 내 기대처럼 루루미가 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잠시간 밤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응시하던 나는 미간을 좁히며 뱀에게 따졌다.
“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그건 모를 일이지.』
뱀은 의뭉스럽게 말하며 이죽거렸다. 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검은 뱀을 흘기고 손을 꺼내 물기를 털어냈다. 그러자 뱀이 조용히 말했다.
『나았군.』
“뭐?”
나는 뱀의 말에 내 손을 확 뒤집어 보았다. 마치 부패하는 것처럼 어둡던 손이 어느새 말끔하게 돌아와 있었다. 내가 말을 잃고 손과 물결만 번갈아 보고 있자 검은 뱀은 스르륵 목에서 내려와 내 팔에 몸을 감았다.
『그간 눈치채지 못했나? 단 한 번도?』
“이게… 이게 뭐야? 루루미가 바닷물에 무슨 짓을 했나?”
내 얼빠진 말에 검은 뱀은 코웃음을 쳤다.
『루루미? 아니, 그녀는 불완전한 상태야.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필멸자의 입장에서 루루미는 이미 어마무시한 존재였지만 난 그런 것을 따지기보다 인상을 찌푸리고 뱀을 보았다.
“네 짓이야?”
『뭐? 아냐, 아냐……. 여기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아냐.』
“그럼…….”
『노파심에 말하지만 바다새가 한 것도 아냐.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지. 바다에서 비롯되어 주술을 다룰 수 있는 존재―그래, 너희가 이전에 만났다는 둘하스와 같은 것들―, 그리고 너.』
검은 뱀이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는 것을 흘려들으며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하자. 세상은 아직 내가 모르는 게 가득하잖아. 이 섬은 페낭가란이 주술을 걸고 하던 곳이다.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나 그런 내 현실도피를 끊어내며 뱀이 말했다.
『바다의 주인은 공석이야. 그 거대한 힘이 온 바다에 스며있다. 그리고 너는 그의 힘을 갖고 있지.』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뱀을 보았다. 검은 뱀은 얇은 혀를 날름거리며 히죽 웃었다.
『잘 생각해 봐. 넌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문득 루루미와 처음 만났던 산호섬을 떠올렸다. 그때도… 물에 닿고 상처가 나았지. 공교롭게 나타난 루루미를 보고 당연히 루루미가 나를 치료해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산호섬에서처럼 치료해주는 거예요?’
다시 만난 루루미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마녀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거대한 혼란이 마치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바다의 주인이 공석이라고? 그럼 일전에 루루미가 한 말은 뭔데? 나는 마치 떨쳐 내듯 고개를 내젓고 셔츠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에 뱀이 고개를 기울이며 시부렁댔다.
『이제 알겠어? 이 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너에게 안배되었던 거야. 그러니…….』
“닥쳐. 어쨌든 잘됐네, 당장 총상도 나을 수 있을 테니까.”
『뭐? 아, 그래서 지금 셔츠를 벗은 거야? 오, 그랬군.』
뱀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지 얼떨떨한 어조로 횡설수설했다. 나는 붕대를 풀어내며 바다만 노려보고 있었다. 복잡한 건 생각하지 마. 바다의 주인이니 마녀니 초월자니 하는 이야기를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움직이며 상처가 좀 벌어졌는지 붕대를 풀어내는 일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고통이 내게 현실을 자각하는 도움을 주었다. 총상을 입은 어깨에 바닷물을 끼얹자 손처럼 천천히 상처가 나았다.
나는 도로 셔츠를 꿰입으며 생각했다. 랄티아를 구하는 일에 집중해. 아무도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없어. 나는 그냥, 랄티아를 구하고, 평화롭고 제국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유유자적 살면 되는 거야. 개중 바닷물에 닿아서 상처가 낫는 경우가 다 있다니, 좋은 일이지. 신기한 일이네, 하고 넘기면 될 일이야. 아무것도 문제없어. 나는 조용히, 평화롭게 살 거야. 분명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발카는 내 기분이 가라앉은 걸 느꼈는지 말없이 어깨에 앉아 고개를 내 머리칼에 파묻었다. 그러나 검은 뱀은 내게 연신 무언가를 떠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 메흐의 힘을 가진 이상 너는…….』
“야, 입 닥쳐.”
나는 결국 뱀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에 뱀이 입을 벌리며 나를 보았다.
“난 그딴 미신 안 믿어. 알아들어? 미신은 비이성적인 일을 합리화하는 일에 탁월하지. 하지만 그게 내게 모든 세상일을 설명해주진 않아.”
『어떻게 이 모든 일을 단지 미신으로 치부할 수가―』
“그 망할 미신 때문에 나는 논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억압받아야 했고, 원하는 일을 하지 못했어. 전부 엉뚱한 이유였지. 여자가 배에 올라서, 내가 월경 중에 항해해서, 뱃머리를 처음으로 밟은 게 나라서…, 그 뭣 같고 수많은 이유가 납득이 돼?”
내가 시니컬하게 읊으며 배로 걸음을 옮기자 뱀은 서둘러 내 팔을 타고 다른 쪽 어깨로 올라왔다.
『이건 미신이 아냐! 메흐의 힘은 실존하고 초월자들 역시 실존해. 하물며 너의 바다새도 그들이 만든 것이다! 너는 메흐의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너로 하여금 바다를 움직이게 한다고!』
“적어도 현재의 사람들에겐 미신이야. 전설이지.”
나는 딱 잘라 대꾸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특이한 경우인 거지. 바다의 마녀를 본 사람? 세계의 뱀과 바다새를 어깨에 달고 있는 사람? 누가 믿겠어?”
『우리는 지금 네게 속해있어! 부정하지 말라고! 메흐가 죽던 순간부터, 초월자들이 이 사단을 낸 순간부터 넌―』
“누가 와 달랬어?!”
검은 뱀이 버럭 외치는 것에 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마주 소리쳤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난 그저 내 배로 바다를 항해하고 싶었던 사람일 뿐이야! 골칫덩어리는 모두 내가 원하지 않은 채로 굴러왔잖아! 내가 너희한테 와 달랬어? 초월자들한테 나 좀 봐달라고 안달이라도 냈나? 내가 사정사정하면서 매달렸냐고!”
내 외침에 검은 뱀이 목을 움츠렸다. 나는 터져 나온 분노를 참지 못하고 뱀을 잡아 검은 모래밭에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바다의 마녀도, 너도, 뒤져버린 바다의 주인도, 초월자들의 고매하신 사정도, 난 전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어! 심지어 바다새조차도!”
내 마지막 말에 발카가 숨을 벼락처럼 들이마셨다. 모래밭에 내던져진 뱀이 얼빠진 기색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뱀과 바다새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경황없는 눈을 들어 발카를 보았다.
“…발카, 난…….”
『됐어.』
발카는 짧게 내 말을 끊어내고 뱃머리의 난간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발카는 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에게 중요한 건 랄티아를 되찾는 일이잖아, 로트렐리. 그거에만 집중하면 되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발카를 향한 내 감정은 내 생각보다도 더 복잡한 것 같았다. 그것이 새삼 느껴졌다. 웃기는 일이다. 내 마음조차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한다니.
나는 무엇에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까만 모래사장을 응시하며 분노를 추스르다가 한숨을 뱉어내며 검은 뱀을 주워들었다. 두꺼운 실타래처럼 달랑 들어 올려진 검은 뱀은 별다른 불만 없이 내 목에 몸을 도로 감더니 말했다.
『너는 낯설군……. 그래, 그와 다른 인간이야. 하지만 동시에 메흐와 매우 닮았음을 점점 부정하기 힘들어져.』
“넌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마. 사람 복장 뒤집히니까.”
나는 무뚝뚝하게 뱀에게 쏘아붙이고 비척비척 배를 향해 걸어갔다. 여름밤의 공기가 때에 맞지 않게 싸늘하게 느껴졌다. 랄티아가 무사하면 좋겠다. 불쑥 생각이 튀어나왔다. 키이엘로가 빨리 기운 차려서 일어나면 좋겠다. 도멤이 빨리 우투그루와 돌아오면 좋겠다. 헤더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검은바다를 어서 찾으면 좋겠다. 모든 일이 끝나면 좋겠다.
……죄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멈춰선 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