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69)
바다새와 늑대 (268)화(269/347)
#112화
세운은 누마루에 앉아 오랜만에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편하고 즐겁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서 길게 내려온 너울을 쓴 여자가 잘게 웃었다.
“다식이 맛있는데 어찌 먹질 않고 한숨만 쉬느냐?”
“…전하께서 제 앞에 계시는데 소인이 어찌 불충하고 방만하게 다과상 간식이나 주워 먹겠사옵니까?”
“그냥 좀 먹거라.”
짐짓 엄하게 말하는 여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너울 아래에서 빛났다. 세운은 끙 소리를 내고 결국 앞에 놓인 다식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다식을 뭉개며 그가 웅얼거렸다.
“소인을 기미 상궁 대신 쓰시는 겁니까?”
“네게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백려의 왕, 도현의 말에 세운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이런 과한 친절은 너무 부담스러운데 말입지요……. 세운의 표정을 보고 키득대며 웃은 도현이 이내 침착한 얼굴로 운을 뗐다.
“그래서, 내 너를 이리로 부른 이유를 아느냐?”
“그렇게 운 떼지 마시고 본론으로 들어가십시오. 소인 간덩이가 요즘 남아나질 않습니다. 아주 졸아붙게 생겼습니다요. 간단하게! 빠르게! 요약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뭐, 그래. 네가 쭉 힘써주고 있는 것은 알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세운이 몸을 부르르 떨며 질색하는 것에 작게 웃은 현이 말을 이었다.
“제국 황녀가 오기로 했다.”
세운은 이미 입에서 다 녹은 다식이 목에 걸리는 줄 알았다.
“송구합니다만 자세히 말씀해주시지요.”
“제국 황녀가 오기로 했다고.”
“그러니까 왜요?”
“그러게나 말이다.”
현은 너울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능글맞게 웃고 있었으나 세운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제국의 황녀가 행차한다니?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그것을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본이 갈려 나가겠는가? 또 얼마나 굴욕적인 의전을 해야겠는가?
그러나 세운은 이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이런 것은 쉬이 밖에 알려져서도 안 되는 정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에게 알려준다니…. 눈을 굴려 주변을 살핀 세운이 조심스레 말했다.
“…거사를 준비하라 일러주시는 겁니까?”
제국의 차기 지배자가 요람을 나와 밖으로 나도는 일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어린 황녀라지만, 어차피 훗날 제국의 황제가 될 새싹이고 백려에게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존재였다. 미리 처치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황녀가 죽으면 제국에도 혼란이 찾아올 테니 더욱 좋았다.
그러나 세운의 예상과 달리 도현은 느긋하게 너울 아래로 찻잔을 가져가 홀짝였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차를 마신 도현이 말했다.
“난 역시 차보다 숭늉이 좋구나.”
“소인도 사실 그렇습니다만, 궁궐 수라에 오르는 숭늉과 소인이 마시는 숭늉은 다르겠지요? …아니, 이 얘기를 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세운이 왈칵 화를 내자 도현은 즐거운 듯 껄껄 웃어댔다. 곁에 운검도 있는 와중에 왕에게 이런 자질구레한 화를 내는 신하는 보기 드문 인재다. 물론 세운은 정계에서 몸을 뺀 지 오래지만 말이다. 도현은 느리게 웃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짐이 보기엔 그 야만국의 황녀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거야 당연한 말씀 아니십니까? 꿍꿍이가 없이 식민지 구경이나 하겠다고… 올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것을 허한 황제의 의도는 뱀굴처럼 꿍꿍이가 가득할 겁니다.”
“짐의 말은, 황녀만의 꿍꿍이라는 거지.”
그 말에 세운은 미간을 좁혔다. 잠시 왕의 말을 복기하던 그는 곧 그 의미를 깨닫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황녀가… 황제와 별개의 의도를 갖고 백려를 찾는다는 말입니까?”
“그래.”
“그걸 굳이 소인에게 알려주시는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황녀가 서신으로 그러더군. ‘왕의 아우를 만나고 싶다’고 말이야.”
세운의 얼굴이 굳었다. 백려의 왕인 도현의 아우는 제국에게 눈엣가시다. 제국에 반발하는 의사를 직접 드러낸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왕자는 왕위에 오를 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누이인 현에게 왕좌를 넘기고 제국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황녀가? 세운에게 현이 말했다.
“혁명단을 노리는 것 같은데, 그 의도가 명확지 않단 말이지.”
“그래서 지금 소인을 황녀의 아가리에 밀어두고 관찰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소인의 정보가 새어 나가면 백려의 의병들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모르실 정도로 어린 군주는 아니라고 생각되옵니다만.”
“물론 그렇지. 허나 짐에게는 늘상 감시가 붙어 있다. 지금처럼 시간을 내어 너를 찾아오는 것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
그건 그랬다. 현은 현명한 군주였고, 늘 제국의 위협과 감시에 시달리고 있었다. 직책은 왕이었으나 나라 안팎으로 있는 제국의 끄나풀들 덕에 체감은 볼모와 다를 바 없곤 했다. 세운과 만나고 있는 장소는 정계에서 그다지 존재감이 없으나 확고한 반제국파인 신하의 별채였다. 이곳으로 세운을 부르고 직접 행차하기까지 상상 이상의 과정이 들었다.
세운은 불편한 얼굴로 현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황녀와의 알현 자리에 자네가 들어와 주게.”
그때였다. 세운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과상 위로 검집이 콱 내리 찍혔다. 무엄하다 못해 무도한 행위에 현의 뒤에 있던 운검이 곧장 검을 뽑아 검집을 쥔 자의 목을 겨눴다.
“오랜만에 만나는 누이에게 인사가 과격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현이 올려다본 자리에는 원이 있었다. 검은바다에서도 항상 그랬듯 과묵한 얼굴을 한 채로 원은 운검의 검날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그런 소리를 하실 줄 알았더라면 호명을 듣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이미 세운에게 다 들었다. 내가 온다니 넌 곧장 도망쳤다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꼴을 드러낸 게냐?”
이유를 이미 다 알면서 묻는 얄궂은 누이를 한껏 흘긴 원이 다과상을 찍은 검집을 거두고 세운의 옆에 앉았다.
“세운은 그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럼 누구를 보내려고? 세운만큼 궁궐 지리에 능숙하고 처세에 능하며 인상이 흐린 자가 더 존재한다면 짐도 더 종용하지 않으마.”
“세운은 동부 혁명단의 대장입니다!”
원이 강경하게 말하자 현은 너울 아래로 입꼬리를 올렸다.
“너를 숨기기 위함임을 이 누이가 모를 줄 아느냐?”
“누님!”
“호칭에 주의하거라!”
현의 호통에 원이 입을 다물고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현이 엄하게 을렀다.
“네 안전을 위해 세운을 대장 자리에 올렸다면 그만한 각오를 했어야지. 밀정이 걱정되어 다른 자를 대신해 올리지도 못하고, 직접 이름을 올리는 것은 우리 왕조가 걱정되어 못하지. 현실을 보거라, 원아. 너는 제국을 욕하고 코앞에서 칼을 갈아댄 탓에 그들에게서 원한을 샀다! 네 치기 어린 행동이 현재까지도 제국이 우리 백려를 경계하게 만든 것임을 모른단 말이더냐!”
“세운을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또 억지를 부리는구나.”
원의 말에 현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그때 살벌하게 굳어진 오누이의 사이를 가르고 세운이 입을 열었다.
“앞서 말씀하신 이유가 아니더라도 굳이 저를 데려가고자 하는 연유가 있으신 겁니까?”
그에 현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말했다.
“황녀의 의중이 애매하다. 황제와 약간의 마찰이 있는 것 같다는 정보도 있더군. 물론 제국인이고 그 황족인 이상 경계해야 함은 분명하지. 그러나…. 서신의 내용을 보자면 한 번쯤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소인이 가겠습니다.”
“이세운!”
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세운을 불렀다. 그것을 보며 현이 야멸차게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저, 저. 누이는 안 보이고 제 벗만 보이나 보다. 믿기느냐, 연후야, 보이느냐? 저 미친 망아지 같은 짐의 동생이 예전엔 제국에는 칼을 갈며 사고를 치더니 이제는 제 벗과 사고를 칠 모양이다.”
“…….”
현의 말에도 운검은 별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지목된 원보다도 세운이 더 민망해져 헛기침하며 원을 흘겼다.
“황녀를 다른 곳에서 대접하는 일정 외에는 대부분 궁에서 시간을 보내겠지요. 그동안 황녀의 의중을 관찰하고 더 나아가 만일의 경우 황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면 소인이 적절하다는 것에 백번 동의하옵니다.”
“황녀가 백려에 와서 곧장 궐에 틀어박힐 리가 없지 않느냐. 굳이 네가 갈 필요가 없어.”
세운에게 원이 딴지를 걸자 그는 한숨을 쉬며 원을 흘겼다.
“황녀도 제 목숨이 소중한지는 알고 있으니 자객을 주의하겠지요. 그러나 제국의 황족인 몸이 허투루 밖에서 묵으려 들지 않을 겁니다. 필시 우리나라의 궁에서 주인 노릇을 하려 들겠지요. 그러한 것들을 뚫고 황녀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무력 충돌을 목표하지 않는 이상 제가 적격입니다.”
“그래, 세운은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잘 알고 있구나. 누구와 다르게 말이다.”
현의 눈치 주는 말에 원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원이 대번에 낮게 으르렁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아우에게 하실 말씀이 눈칫밥이나 주며 힐난하는 것뿐입니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 아니겠느냐? 네가 미운 소릴 듣는다면 자업자득인 것이지, 어찌 누이를 탓해?”
“어찌 제국의 돼지를 대접할 생각을 하며 그와 손을 잡으라 종용하십니까! 제국 놈들 때문에 아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원이 날카롭게 응수하자 현은 고개만 기울였다. 그러나 능청스러운 몸짓과 달리 내뱉는 숨과 말투에 분노가 스며들었다.
“너만 큰일을 겪었더냐? 겨우 목숨 부지하여 돌아와 기뻐하였더니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구나.”
“그날 저는 사람만도 못한 놈처럼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마마마께서 붕어하셨지.”
현의 차가운 말에 원이 입을 다물었다.
“또한 세운이 너에게 휩쓸려 도주해야 했고 말이다. 그의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도 네 좁은 시야에는 보이지 않더냐?”
“…….”
그 말에 원은 무어라 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어깨를 가라앉히며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의 손아귀에 도포 자락이 가득 잡혀 구겨지고 있었다. 원이 느리게 말했다.
“저도 과거의 일 중 몇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아둔했음을 인정합니다.”
“…그, 노여움을 푸시지요. 소인의 집안은 원래부터 독립의병들에게 자금을 대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사옵니다.”
“네가 자꾸 그리 봐주니 저 불민한 녀석이 앞뒤 모르고 까부는 것 아니더냐.”
현이 혀를 차며 세운에게 타박하자 그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 그래도 제국의 일에만 그러는 것이지요. 요전번 얻어탄 배에서 얼마나 부지런하고 의젓했는지 아십니까.”
물론 제국의 말을 쓰면 혓바늘이 난다며 묵언 수행하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지내긴 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더욱 점잖아 보이긴 했다.
“짐이야 모른다. 알 도리가 있겠느냐? 되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 풀 시간이 있을 때나 풀 거라.”
현이 손을 훨훨 내젓고는 한숨을 쉬었다. 원 역시 한 차례 거친 다툼으로 차분해졌는지 도로 곧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세운이 절제력이 있는 선비처럼 곧은 자세라면 원은 누가 봐도 왕자보다는 무신처럼 기개가 있어 보였다. 저러니 성질머리를 못 참지, 하며 속으로 끌끌 혀를 찬 현이 마저 말을 이었다.
“만일 황녀를 죽일 생각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아직 일정을 정한 것은 없으나 바란다면 거치는 길을 일러줄 것이니 의병들을 두든 하게나. 허나 짐의 생각에 황녀가 제국의 황제와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면… 접해봐서 나쁠 것은 없지.”
그렇게 말한 현이 너울 아래로 원을 보았다.
“누구 탓에 사족이 길어졌구나. 정해진 것으로 보아도 괜찮겠지?”
“……제 의견이 무어 중요하겠습니까.”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장직은 세운이 맡고있는 것을.”
현의 뼈가 있는 말에 원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세운에게 대략적인 시일을 알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을 따라 운검인 연후가 그림자처럼 붙어 움직였다. 현이 움직이는 자취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원과 세운이 절을 하자 현은 그대로 그들을 잠시 눈에 담다가 걸음을 옮겼다.
현이 떠나자 원이 대번에 세운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대체 어쩌려고 그러느냐?”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으면 그때에나 따지시게.”
세운의 말에 원은 그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옅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부 바다의 대장으로부터 정보 공유 요청이 들어왔네.”
“케르헤티의 에퀘야에게서? 별일이군 그래.”
“제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이번에 수배된 이들의 정보를 보았나?”
원의 말에 세운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원 역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듣기에 그들은 제국과 별다른 접점이 없는 자들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명백히 그 해적선에 있던 선원을 수배하는 내용이네만.”
로트렐리 일행을 향한 수배 소식은 제국과 인접한 백려에서는 진작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것을 보고 당황한 이들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세운과 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제국과 하등 인연이 없어 보이던 젊은이들이 어쩌다 수배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들어오는 족족 정보를 살펴보면 그들이 검은바다와 함께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세운은 한숨을 쉬고 갓끈을 고쳐매며 말했다.
“범상치 않은 인물 같기는 했으니 이상할 것은 없다고 보네. 제국의 탐욕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네들이 우리의 사정을 몰랐듯 우리도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법 아니겠는가.”
“그들 탓에 자네의 정보가 어떤 식으로든 제국에 흘러 들어갔다면? 그래서 황녀가 오는 거라면?”
원의 말에 세운은 가볍게 웃었다.
“일개 혁명 단원을 잡겠다고 제국의 황좌를 차지할 자가 움직이겠는가? 그들은 우리를 그저 백려의 뒤숭숭한 정세에 떠밀린 이들로만 보았네. 자네는 궁에서 일하던 무사라고만 알고 있지. 어리고 순진하던 그들이 뭘 얼마나 사람을 속이고 우리를 해할 의지가 있겠는가?”
“있을 수 있지.”
“원.”
세운이 침착하게 말했다.
“과한 의심은 우리를 구하기보다 더한 나락으로 떨어뜨리네.”
“세운…. 자네의 위치를 생각하게. 일개 백성이라면 그 말에 감명받겠지만 난 아냐. 우리는 비밀결사를 하고 있고, 약간의 방심은 우리를 수렁보다 더한 곳으로 밀어 넣을걸세.”
“그들은 그저 평범한 젊은이들이었어.”
“제국이 눈독 들이는 젊은이들이지. 그들이 제국에 쫓기다 우리에 관한 이야기라도 흘려봐!”
원의 말에 세운이 한숨을 삼켰다. 원의 이런 반응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가 십 대 초반이었을 때부터 제국이 백려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나라를 거세게 긁어댔으니 왕자였던 원이 분개하는 것도 당연했다. 세운 역시 제국 하면 치가 떨리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원은 분명 뛰어났고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정치적인 성질과는 달랐다. 그는 차라리 장군이 되었다면 좋았으리라. 원을 보며 세운이 말했다.
“역시 자네가 왕이 되었다면 패왕(覇王)이 되었을 거야.”
“왕 같은 소리 말아. 나도 누님이 왕위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을 알고, 그에 어떤 불만도 없네. 알지 않나. 내가 불만인 것은 오직 제국뿐이야.”
“그건 그렇지만…….”
세운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자리를 뜰 때가 되었다 여긴 그들은 가옥을 벗어나 저잣거리로 향했다. 제국이 백려를 마음껏 뜯어먹고 있다고 하나 저잣거리엔 사람이 북적거렸다.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든 겉보기의 일상은 그럭저럭 흘러가는 법이다.
백려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제국의 옷을 입은 백려인과 다른 섬에서 온 외지인들이 섞여 있었다. 습한 여름의 공기 사이로 지평선 너머 멀리에 있을 바다의 소금기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백려의 여름은 느리게 지속된다. 한여름으로 접어드는 공기는 후텁지근하고 습하다. 그것이 백려의 모든 초목이 더 푸르러 보이게 만들었다.
그 사이를 원과 함께 걸어가며 세운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황녀의 소식이 닿은 이상 의병들의 활동을 자제하라고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을까. 괜한 피라미들을 잡자고 의거를 일으켰다가 황녀가 일정을 취소한다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백려의 곳곳에 있는 제국의 인력을 공격하고 황녀도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황녀의 행차라니, 또 얼마나 많은 자본이 쥐어짜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처럼 공격적인 대응을 하자니 망설여지는 것이다. 제국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 만찬을 한다는 만찬장을 공격했던 전적도 있었으나 부유하고 악한 자들은 끈질겨서 잘 죽지도 않는다. 만찬장에서 근무하던 이들도 휘말려 죽은 것을 보고 얼마나 속이 쓰렸던가. 세운은 뼛속까지 의사였으니 더욱 그랬다.
검은바다와 우홉피아주의 전투까지 상기한 세운은 한숨만 폭 내쉬었다. 원은 당장 제국의 척결만을 목표하고 있지만, 세운은 그 이후의 일 역시 고민이 깊었다. 우홉피아주에게 복수하는 것만은 목표하고 달려온 검은바다가 허무함에 느리게 부서져 내렸듯 과열된 제국을 향한 증오가 해소된 후 백려 역시 혼란스러워질 것이 염려되었다.
그렇다고 제국을 가만히 두자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일개 의원인 자신이 이런 것을 생각해서 뭘 하겠는가. 이런 걸 염려하는 것은 현의 일이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활발해진 외부 교류는 백려를 달라지게 하고 있다. 제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갈고닦는 사상적 토대도 세간 사이에서 빠르게 퍼지고 사람마다 갖는 사고도 달라지고 있다.
그중엔 중앙집권을 반대하는 사상도,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만민의 권리를 말하는 사상도 있다. 이런 와중에 백려의 왕조는 애국심이 기반이 되어 지지받고 있을 뿐이다. 그 왕조의 정통성마저 훼손된다면 정말로 제국에 먹힐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듯 안 그래도 실추된 백려의 왕정제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세운.”
원의 부름에 세운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세운을 보며 말했다.
“앞은 보고 걷게나.”
“으응?”
그 말에 시선을 돌린 세운은 지하대장군 장승의 몸이 코앞에 있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흘끔 위를 보자 우락부락한 얼굴로 깎인 장승이 그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원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무심한 낯으로 물었다.
“왜 그리 얼을 빼고 있나? 고민을 할 거라면 돌아가서 차분하게 하시게. 길을 걸으면서는 주변을 주의해야지.”
“음, 그렇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원의 물음에 세운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비록 궁을 나와 신분이 낮은 이들과도 함께하고 있다고 한들, 원은 왕자였다. 그의 누이는 왕이었고 말이다. 그런 마당에 그에게 제국을 친 이후에도 백려의 왕정제가 남아 있을지 고민이라고 말한다니. 아무리 허물없이 친한 사이라도 꺼려지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자 원은 그의 고민이 길바닥에서 말하기 힘든 혁명단의 일이라고 짐작한 듯싶었다. 침잠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세운은 원과 의군의 본거지로 향했다. 당장은 제국 황녀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