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70)
바다새와 늑대 (269)화(270/347)
#113화
“뭐라고?”
당황한 브레딕의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랄티아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다시 말했다.
“언니의 소식이 신문에 실렸어요. 제국군의 손에서 또 한 번 도주했다고. 불과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걔들은 진짜…….”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임을 이 방의 모두가 알았다. 네토르가 물었다.
“어디서 목격되었다고?”
“갈리니 섬이요. 전엔 중부 바다의 쿤트만 제도행 여객선에서 발견되더니 이번엔 중부 바다와 동부 바다 사이에서 나타나다니……. 행적을 종잡을 수 없어요. 완전히 중구난방으로 나타나잖아요.”
랄티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것을 보며 네토르가 혀를 찼다.
“잘하면 가까운 범위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유감이군. 아마 인어의 힘을 빌렸겠지.”
“그래서인지 혁명단에서도 ‘마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에요. 어쨌든 상관 없죠, 그 마녀가 우리 언니라는 걸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검은바다는?”
“아직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어요. 다만 의아한 점이 왜 우리가 누카르아까지 움직이느냐는 것인데.”
에퀘야의 혁명단은 현재 누카르아에 정박하기 위해 항구 근처에서 무르하가 주술을 거는 중이었다. 누카르아는 중부와 서부의 중간 즈음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도상으로 따지면 명백히 중부 바다에 있는 섬나라였다. 왜 굳이 서부 바다의 에퀘야가 왔는지는 모를 일이나, 랄티아가 이것을 지적하자 에퀘야는 웃음으로 말을 돌리곤 했다.
랄티아로선 중부 바다의 혁명단에게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중부 바다는 게슈베르송 출신의 칼란투라고 했지. 그가 뭐 하는 작자인지는 몰라도 게슈베르송이라면 조금 알고 있었다.
아상트라와 유사하게 제국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으나 노동자들의 행렬을 강하게 탄압한 제국의 행동으로 인해 제국을 향한 반발이 강한 곳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게슈베르송의 지배층은 제국을 그다지 배척하지 않으나, 일반 국민의 민심이 완전히 돌아선 탓에 나라가 뒤집힌 상태였다.
아상트라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혁명을 꿈꾸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전체적으로 모두 봉기해 지배층의 모가지를 자른 곳이었고, 때문에 비교적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위기감을 갖고 군대를 파견한 곳이기도 했다.
랄티아는 문득 이런 것까지 내가 책으로 읽은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대충 넘기며 머리를 굴렸다. 그런 만큼 칼란투는 케르헤티의 왕족인 에퀘야와 다른 위치일 것이다. 중부 바다의 대장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게슈베르송과 그 인근의 일만으로도 바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동부 바다의 혁명단이 오자니 동부 바다는 제국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니 여력이 없을 것이다. 나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케르헤티도 동부에 비하면 나을 것이다. 제국과 가장 가까이 붙어 등골을 빼 먹히는 것도 동부였고, 그에 대항해 수많은 전투가 전체적으로 꾸준히 일어나는 것도 동부였고, 다른 곳에 비해 제국이 가장 예의주시하는 곳도 동부였다.
랄티아는 맹하던 의사의 얼굴을 동부 바다 혁명단의 대장직과 연결 지어 보려 했으나 영 쉽지 않았다. 차라리 그 옆의 도원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누카르아까지 가는 것은 의아하긴 했으나 좋았다. 로트렐리 일행의 마지막 행적이 중부 바다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종잡을 수 없는 언니의 위치를 알아버렸으니 랄티아는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결국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어.’
다른 정보를 더 얻기까지는 계속 혁명단에 몸을 의탁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솔직히 이제 와서 다른 곳에 가겠다며 나서도 에퀘야가 그들을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랄티아의 의견을 꽤 흥미롭다는 태도로 수용하고 있기도 하고, 일행이 나름 좋은 인력으로 통하고 있기도 하고…….
자신은 혼자 떠날 수 없는 입장이고……. 랄티아는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혁명단과 엮여서 좋을 게 없지만, 이왕 엮였다면 충분히 이용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브레딕이 고민스러운 얼굴을 숙이고 있다가 랄티아에게 물었다.
“…우투그루가 걔들이랑 같이 있을까?”
“그동안 계속 같이 움직일 거라 예측해놓고 지금 와서 그러는 거예요?”
“내 말은……. 지금은 또 상당히 시간이 흘렀잖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거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
“땅보다야 바다가 넓다지만 육지에서 사람 찾는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고요?”
랄티아의 황당하다는 표정에 브레딕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어쨌든 계속 같이 있다면 우리에게야 좋겠지만….”
랄티아는 브레딕이 하려는 말을 알아채고 얼른 말을 붙였다.
“어차피 지금은 혁명단과 함께 움직여야 해요.”
“응? 응, 그렇지.”
랄티아의 재빠른 말에 얼결에 동의한 브레딕은 이내 미묘한 낯을 해 보였다.
“그, 랄티아, 걱정하지 마. 널 두고 갈라지는 일은 없을 거니까.”
“누가 뭐래요?”
자기 속이 읽힌 것 같은 기분에 랄티아는 와락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브레딕은 속으로 허허 웃기만 했다. 아직 어리긴 어리단 말이지….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혁명 단원이었다. 누카르아에 정박한 것이다.
랄티아는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에퀘야가 줬던 바틱을 숄처럼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판으로 나가자 아직 어둑한 바다가 검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바닷새가 날아다니는 아래로 검게 물결치는 수면을 보며 걸어간 랄티아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 멈춰 섰다.
에퀘야와 무르하는 화려한 무늬의 바틱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랄티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따졌다.
“제대로 된 옷이 있었잖아? 왜 저한테는 그냥 원단을 준 거예요?”
“숄처럼 두른 것도 예쁜데요, 뭘.”
무르하가 속없이 웃으며 랄티아에게 칭찬을 날렸으나 랄티아는 뚱한 얼굴을 했다. 애초에 다른 이들에게는 안 줘놓고 자신에게만 준 거란 말인가? 에퀘야와 무르하와 마치 바틱 삼총사처럼 묶이는 게 내키지 않은 랄티아는 무르하의 칭찬에도 시큰둥하며 에퀘야를 쏘아보았다.
“왜? 소중히 여겨, 나름 장인의 작품이라고. 이만한 바틱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에퀘야는 껄껄 웃기만 하고는 ‘그래, 귀엽다, 예쁘다,’하며 머리를 복작복작 문지르기만 했다. 둘이 혁명단을 호명하며 자리를 뜨자 랄티아는 어이없다는 듯 헛헛한 숨만 내뱉어야 했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보던 브레딕이 피식 웃었다.
“아주 귀여운 막내 자리를 차지했네. 이것도 나름 계략인 거야?”
물론 그는 랄티아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 곧장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중부 바다는 다녀봤어도 제대로 된 섬나라는 처음인걸.”
“그렇지. 우홉피아주에게 습격받은 곳이 아닌 이상 검은바다가 정박하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키이엘로는 누카르아도 와봤을까?”
네토르와 브레딕이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클레인스와 헤더가 랄티아에게 걸어왔다. 둘은 누카르아의 혁명에 동조하고 있는 만큼 혁명단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중이었다. 아마 둘은 혁명단과 지내며 그들에 감화된 것이 분명했다.
정치범과는 면회도 허락하지 않는 게 이런 이유지. 랄티아는 차갑게 생각하며 둘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헤더의 손에 들린 커다란 방패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웬 방패예요?”
“얻었지. 내가 검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휘두를 때마다 비는 곳이 많대.”
헤더는 반듯하고 묵직한 방패를 쉽게 들어 짊어지며 산뜻하게 말했다.
“로트한테 배운 검술인데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로트가 검을 두 개씩 쓰는 걸지도 몰라.”
헤더가 말하는 것을 보며 랄티아는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기분을 느꼈다. 방패라니. 칼을 찬 것보다 방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게 그들이 정말로 전장에 뛰어든다는 실감이 들었다. 클레인스는 그렇게 평화를 외치던 것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게 헤더를 격려하고 있었다.
“어울려요.”
“그렇지? 나도 칼 휘두르는 것보다 방어하고 지키는 게 더 좋기도 하고.”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랄티아는 생각했다. 만약 언니였다면 방패로 상대 머리를 찍어버릴 생각만 했을 텐데. 그게 어쩌면 헤더와 로트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랄티아는 불현듯 로트렐리를 향한 그리움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지? 난 언니랑 같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가라앉아 말이 없어진 랄티아를 보고 헤더가 어색하게 웃으며 무어라 말을 붙이려는 순간, 혁명 단원들을 모은 에퀘야가 멀리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모두 주목! 누카르아에서의 일을 설명하겠다.”
그 말에 군기가 바짝 들어간 혁명단은 물론 랄티아 일행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퀘야는 바틱으로 된 옷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예의 그 너클을 끼우고 있었다. 그녀의 진줏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누카르아는 본래 우리의 관할이 아니지만, 중부의 대장이 우리에게 부탁해온 이상 우리가 나서서 도와야 할 동포들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배에서 내려 누카르아에 포진한 제국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중부 바다의 대장 칼란투의 부탁이었다고……. 동부의 백려와 마찬가지로 게슈베르송 역시 제국과의 마찰이 장기화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랄티아는 에퀘야의 말을 들었다.
“누카르아의 동포들과 접선한 뒤에 제국을 친다. 무르하가 무리해서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를 여럿 만들기 위해 먼저 소수와 출동한다. 그가 은신처 만드는 것을 완수하면 그 은신처를 경유하며 중부의 대장이 알려준 누카르아의 반군 위치까지 도달할 것이다.”
계획의 골자를 설명한 에퀘야가 무르하에게 단원을 붙여주며 무어라 명령을 더 내리는 동안, 브레딕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것을 보았다.
“……굉장히 복잡하게 하네. 왜지? 어차피 항쟁을 시작하면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나? 제국의 원군이 바로 올 것도 아닐 텐데.”
“이번에도 접선부터라니, 신중한 건지, 네 말마따나 복잡한 건지.”
헤더 역시 의외라는 듯 말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쨌든 우리는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그러나 랄티아는 생각이 달랐다. 모든 계획이 수립되는 것에는 배경이 있다. 브레딕의 말대로 에퀘야의 혁명단은 누카르아에서 항쟁을 하기 위해 왔다.
원래는 칼란투의 일이나 그의 요청으로 에퀘야가 응답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에퀘야도 브레딕처럼 제국을 곧장 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꼬리가 잡힐 위험이 있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랄티아는 헤더와 클레인스를 힐끔 보았다. 이유가 뭘까? 칼란투를 신용하지 못해서? 누카르아를 점거한 제국의 위력을 경계해서? 전자는 말이 안 되고, 후자는 그럴 듯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습하듯 공격해야 했다.
어쨌든 변수는 누카르아에 있다. 랄티아는 단원들과 배를 나서는 무르하를 보고는 제 옆의 네토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뭔가 우두머리만 아는 정보가 있는 것 같은데.”
“그야 그렇겠지, 일개 단원들에게 온갖 정보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
“일단 누카르아에 뭔가 일이 있는 건 확실해요.”
그녀의 확신에 네토르는 힐끔 시선을 내려 랄티아를 보았다. 자색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났다.
“구체적으로 어떤?”
“그것까지는 모르죠.”
“예측하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냐.”
물론 그랬지만, 랄티아는 네토르가 이렇게 자신의 추리력을 믿고 있는 것이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나름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랄티아는 대수롭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아마도… 누카르아의 반군에 문제가 생겼겠죠. 추측하기론 칼란투에게 요청은 받았지만 그가 준 정보와 누카르아 쪽에서 준 정보가 맞지 않는다거나, 위화감을 느꼈다거나.”
“족집게네.”
“아직 밝혀진 건 없고 추측일 뿐인데요.”
랄티아가 정정했지만 네토르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네 말이 그럴듯하니까.”
그런가? 랄티아는 흘끔 그를 보았다가 이내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퀘야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에퀘야는 묘하게 피곤한 기색으로 곰방대에 잎을 채워 넣으며 랄티아에게 걸어왔다.
“똑똑이, 넌 이번 누카르아에서 행동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럼 그냥 이 배에 있는 게 어떠냐?”
에퀘야의 말에 랄티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라고요? 왜요? 싫어요.”
랄티아의 말이 의외였는지 에퀘야는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도 ‘왜?’하고 묻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랄티아는 스스로도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태로 있으라고?
랄티아는 자신이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을 못 견뎌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어차피 전투 상황에는 도움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행과 저를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 무리해서라도 따라갈 거예요. 혁명단의 일에 제 일행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요?”
그러자 에퀘야는 신중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네가 누카르아에서 일행과 떨어지지 않는다고 치자. 그럼 네가 스스로를 지킬 수는 있고?”
에퀘야의 말에 랄티아는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피스톨을 보여줬다. 이미 이전에 그것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던 에퀘야의 얼굴이 미묘해졌지만, 그녀는 물러나지 않고 눈썹을 휘었다.
“똑똑아, 넌 조금만 뛰어도 파김치가 되잖냐. 포기하고 얌전히 배에 있어.”
“싫다니까요!”
랄티아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대들었다. 자신은 혼자 배에 있기 싫었다. 일행은 전장으로 향하고 자신은 언니와 떨어진 마당에 혼자 혁명단의 배에 처박혀 있으라고? 그건, 그런 건……. 마치 우홉피아주의 포로로 잡혔을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랄티아는 절대 두 번 다시는 남들보다 뒤처질 수 없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불쾌했다. 두 번은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 랄티아의 입장이었다. 그런 랄티아의 내력을 모르는 에퀘야는 당연히 몸을 사리며 배에 남아 있을 줄 알았던 애가 버티니 당혹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에퀘야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랄티아는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저를 떼어놓으려고 하죠? 이건 당신답지 않네요.”
그에 에퀘야의 입이 딱 다물렸다. 어른답게 노련한 태도로 찰나의 헛숨을 숨기고 말을 이으려 했으나, 눈치 빠른 십 대는 기민하게 그녀의 기색을 알아챘다.
“누카르아의 일에 뭔가 있죠? 그래서 나를 이곳에 두려는 거죠. 상황을 잘 추리하고 싶다면 날 데려가는 게 좋을 텐데요.”
랄티아의 말에 에퀘야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만 푹 내쉬었다. 똑똑이 녀석아…. 한탄하듯 중얼거린 에퀘야가 엄한 얼굴을 하곤 말했다.
“누카르아의 일은 이미 경계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확인하러 가는 거지. 칼란투 녀석도 그걸 알고 내게 맡긴 거다.”
“그래서…….”
“그래서, 네 도움은 필요가 없어.”
에퀘야의 말에 랄티아는 주춤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에퀘야가 경고하듯 말했다.
“누카르아의 일은 잘못하면 긴박하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괜한 짓 말고, 얌전히. 이 배에 있어. 알겠나?”
그렇게까지 말하자 랄티아는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에퀘야의 말대로 긴박한 상황이 오면 자신은 별다른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결국 랄티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에퀘야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다물고 고집스레 팔짱을 낀 랄티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에퀘야는 나머지 일행에게 턱짓했다.
“너희는 어쩔 거야?”
그 말에 클레인스와 헤더는 랄티아의 눈치를 보다가도 에퀘야에게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브레딕과 네토르는 그냥저냥 상관없는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결국 에퀘야를 따라 하선하기로 했다. 에퀘야는 클레인스도 동행하는 것을 조금 탐탁잖게 여겼으나, 이내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랄티아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자 네토르가 혀를 차며 그녀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인상 좀 펴.”
“……궁금한데, 제 언니한테도 이런 건 아니죠?”
“뭐? 내가 왜?”
네토르가 질색하며 되묻는 것에 랄티아는 어깨만 으쓱였다. 하긴, 언니한테 이랬으면 손가락이 안 남아 있겠지. 영 사이도 안 좋아 보이지 않았는가. 일행의 의견을 들은 에퀘야가 대기하는 단원들 사이로 가버리자 랄티아는 뒤늦게 네토르에게 물었다.
“언니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던데 저는 도와주는 게 신기하네요.”
“걔한테는 이제 악감정 없어. 상황이 서로 나빴던 거지. 그리고 내가 널 네 언니와 동일시하며 대해야 하나?”
이러나저러나 맞는 말이긴 했다. 랄티아는 마뜩잖은 얼굴로 네토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로트렐리도 네토르를 꼴도 보기 싫어할 정도로 혐오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네토르는 랄티아의 앞에서 이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언니가 사지를 분질러두거나 그만한 원한을 남겨서 랄티아를 적대했겠지. 로트렐리를 퍽 깡패처럼 생각하는 머리와는 달리 랄티아의 마음은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때 네토르가 말했다.
“애초에 넌 네 언니와 닮은 점이 없어서 동일시 하려야 할 수가 없어.”
“네?”
무슨 개소리야, 내가 물론 언니와 눈 색깔도 다르고 언니보다 훨씬 마르고 작다고 해도 같이 다니면 자매인 걸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는데. 로트와의 연결고리를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에 랄티아는 인상을 찡그리고 네토르에게 따졌다.
“눈 색이 다르다고 그러는 거예요? 저 나름 언니랑 많이 닮았거든요? 지금이야 키도 체형도 차이가 있지만 어렸을 땐 쌍둥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구요.”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뭐가요?”
랄티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네토르를 보자 그는 눈썹을 휙 올리며 말했다.
“부모를 각각 닮은 게 아니라 로트 녀석을 본떠 만든 것처럼 생겼잖아.”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언니와 제가 닮았다는 뜻이잖아요?”
“아니, 안 닮았는데.”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랄티아는 네토르를 괴상한 것을 보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네토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묘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고 말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안 닮았어.”
“…….”
랄티아는 그 말에 네토르를 질색하며 흘겼다. 그러나 랄티아가 뭐라고 더 쏘아붙이기 전에 에퀘야가 단원들을 불러모았다. 일행들이 그녀에게 향하고, 네토르 역시 랄티아와의 대화를 가뿐히 잘라내고 걸음을 옮겼다. 배에 남게 된 랄티아만이 덩그러니 서서 복작복작 모인 단원들을 보았다.
에퀘야는 모인 단원들을 다시 여러 조로 나눠 차례대로 누카르아로 보내기 시작했다. 랄티아는 그것을 보며 영 찜찜한 얼굴을 했다. 누카르아에 있는 문제가 대체 뭘까? 누카르아의 반군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라면 차라리 오지 않았어도 될 일 아닌가?
그러나 결국 랄티아는 혁명단의 배에 남아 있을 것이다. 혼자 암만 머리를 굴려본다고 해도 정보가 떨어질 구석이 없는 배에서는 누카르아의 상황을 알기란 요원했다. 랄티아는 다시금 심기가 비틀리는 것을 느꼈다. 헤더와 클레인스, 브레딕, 네토르는 자신보다 먼저 상황을 알게 되겠지.
자신은 나중에 돌아온 그들에게 전해 듣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랄티아를 매우,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랄티아는 지식욕이 투철했다. 상대가 어른이든 아이든 자기보다 알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으면 그게 그렇게 분했다. 그 분개심이 그나마 가시는 것도 상대가 부모님일 때뿐이었다.
만약 랄티아가 소서러가 아니었고 폐쇄적인 섬에서 나지 않았다면 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이 고작 조금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홀로 소외되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물론 랄티아는 자신의 체력이 정말 하찮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객관화가 잘 된 사람이었다. 앞이 잘 안 보이는 클레인스도 데려가는 건 납득이 되지 않았으나 에퀘야가 그렇게 강경하게 말하는 것을 섣불리 거역할 정도로 순진한 것도 아니었다.
일행이 혁명단과 누카르아로 떠나자 배를 지키는 적은 인원과 남은 랄티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갑판에 앉아 바다나 물끄러미 보았다. 언니가 보고 싶어……. 유일하게 남은 가족과 떨어지니 우울감만 나날이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랄티아는 울적한 얼굴로 완전히 아침 해가 밝아오는 바다를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랄티아는 미간을 좁히며 일어났다. 동살이 오트밀 같은 빛깔로 푸른 바다를 뒤섞는 가운데에 누군가 서 있었다. 멀리 있어 작은 작대기처럼 보이는 인영은 바다 위에 서서 혁명단의 배를 보고 있었다. 무르하의 주술로 가려둔 혁명단의 배를 직시하는 것은 둘째치고, 사람이 바다에 꼿꼿이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 수 없는 위기감과 긴장감이 순식간에 랄티아를 덮쳐왔다. 황급히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갑판 위에서 망을 보는 단원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랄티아는 경직된 시선을 다시금 바다로 돌렸다.
인영은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길고 가느다란 인영의 머리엔 소의 그것처럼 위로 솟은 뿔이 있었다. 발끝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느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혹시 바다 괴물인가? 아니면 초월자?
랄티아는 로트렐리가 바다의 마녀를 만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을 떠올리고 눈에 힘을 주고 그 인영을 바라보았다. 인영의 머리 부근에서 흰빛이 번뜩였다. 눈동자였다. 랄티아는 찰나에, 멀리 있는 인영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흠칫한 순간 바다 위의 인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랄티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한참을 바다만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였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