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72)
바다새와 늑대 (271)화(272/347)
#115화
그 소리에 에퀘야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는 모르겠군. 주라만은 누카르아의 친제국파 반군이다.”
“……네?”
“그래, 의아한 소리지. 친제국파면서 어떻게 반군에 들어있을 수 있는지 말이야.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가끔 그런 법이다. 모두가 제국과 전면전을 선포하려고 하지는 않아.”
에퀘야는 나직하게 말하며 몸을 비틀어 달려오는 아이들을 피했다. 문득 헤더는 평화롭고 활기찬 거리를 걸어가며 이런 위험한 화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묘한 긴장감이 생겨 헤더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으나 에퀘야는 익숙한 듯 천연덕스럽게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누카르아는 말하자면 친제국파와 반제국파의 마찰이 강한 편이지.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특성상 화합도 어려워. 제국이 그 지점을 노리고 각 민족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이었던 거군요.”
“그래. 그래도 칼란투나 나에게 온 정보에서는 나름의 협의를 이끌어 반제국파로 결집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친제국파 인사인 주라만이 수장으로 모습을 내보였죠.”
“그래. 똑똑이만큼은 아니어도 너도 꽤 상황 파악이 빠르군.”
에퀘야의 칭찬에 헤더는 무심결에 얼굴을 붉혔다. 어렸을 적 이후로 여자 어른에게 칭찬을 듣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헤더가 민망해하든 말든 에퀘야는 주변을 눈짓으로 살피며 마저 말을 이었다.
“누카르아의 친제국파의 논리는 이렇다. 누카르아의 독립을 이끌어내긴 하되 제국과 손을 잡아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자는 거지.”
“굳이 왜요?”
“제국을 선진 문명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건 그렇죠….”
헤더는 납득이 되는 얼굴을 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제국이 기술이나 경제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이 다른 섬을 수탈해 만든 자본이라고 해도 말이다. 에퀘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제국이 순진한 봉사단체도 아니고. 그런 식의 간섭을 허락하게 되면 제국은 분명 그것을 빌미로 언제고 누카르아를 야금야금 강탈할 거다. 친근한 가면을 쓰고 적대감이 사라지는 걸 기다리겠지. 그 이후에는 어느 순간부터 누카르아의 본래 모습은 모조리 사라져 있을 거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좋지 않을까요? 나쁜 의도는 없고, 그냥, 보다 발전된… 그런….”
헤더가 무심결에 말했다가 어버버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여러 문화가 충돌하면 어떤 것은 변화하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어떤 것은 새로이 생겨난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헤더에게는 그것을 에퀘야에게 피력할 정도의 배짱이 없었다. 에퀘야는 눈썹만 치켜올리고는 말했다.
“네 말처럼, 나라의 긍지나 문화, 인의 같은 그런 것보다 많은 자본과 기술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친제국파가 되지.”
자신을 향하는 말이 아님에도 어쩐지 ‘네가 그런 놈이군’, 하는 욕을 먹은 기분이 된 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브레딕이 옆에 있었더라면 ‘이상한 피해의식이야,’하고 지적했을 법한 일이었으나 주변엔 에퀘야와 단원들뿐이었다. 헤더의 움츠러든 상황을 살피지 못한 에퀘야는 마저 말을 이었다.
“어느 것이 옳냐를 두고 따진다면 나는 당연히 내가 옳다고 말할 것이다. 자본? 기술? 그런 것은 애초부터 제국이 우리에게서 수탈해간 가능성이야. 우리의 집을 뜯어간 도둑놈이 절도한 돈으로 잘 산다고 해서 그것을 나눠달라 간청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 우리는 그것을 돌려받아 마땅한 입장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부딪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나 그 방법을 단순히 문화 충돌의 자연스러운 일로 판단하고 죄를 없는 취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야. 그렇게 제국의 행동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는 거다.”
에퀘야는 결연한 어투로 말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혁명이란 그런 거야. 누군가와 타협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일어나는 거지. 하물며 나는 그들을 이끄는 입장이야. 그런 내가 친제국파와 손을 잡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럼 그냥 누카르아를 떠나도 되지 않나요?”
“누카르아의 친제국파 반군에 눌렸을 반제국파 인사를 살펴야 해. 우리와 상관이 없을지라도 제국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지 않니?”
에퀘야와의 질의응답이 이어지자 헤더는 새로 알게 된 정보가 많아진 것과는 별개로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 네토르 그 녀석은 괜히 질문하는 걸 막고 그래. 헤더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계속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지나쳐 비좁은 골목으로 진입한 에퀘야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헤더는 그것을 보자 또 한 번 의구심이 들었다. 에퀘야는 중부 바다의 담당도 아닌데 누카르아의 지리를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좁은 골목을 파고들자 골목 사이로 드리워진 천이 많아졌다. 골목의 위에 걸어둔 가림막들은 민무늬도 있었고 화려한 것도 있었다. 그림자가 져 한낮에도 어둑한 곳으로 얼룩덜룩한 얼룩 같은 빛이 골목을 지나는 이들의 얼굴에 희미하게 무늬를 그려냈다.
헤더는 문득 에퀘야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르하가 몸에 두른 장식 중 하나였다. 길을 잘 찾는 것도 그의 주술 중 하나였을까? 이쯤 되자 헤더는 무르하가 정말 유능한 주술사긴 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눈의 어쩌구 능력도 갖고 있다는 것 같고….
다들 무르하가 옛날 옛적 케르헤티 왕조의 사생아이리라 짐작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평민이다. 어떻게 그를 공주라는 에퀘야가 이렇게까지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헤더는 곧 정신을 차리고 걸음만 재촉했다. 암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는 너무 사적인 영역이지.
곧 일행은 외진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앞에는 무르하의 일행으로 보이는 단원이 한가한 주민처럼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무르하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색했다.
“오셨군요.”
“반군은?”
“주술로 편지를 보내긴 했는데….”
“아직 답은 없는 모양이군.”
에퀘야와 몇 가지 짧은 대화를 나누던 그때였다. 밖에서 보초를 서던 단원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빠르게 말했다.
“반군입니다.”
“뭐?”
답장도 보내지 않고? 에퀘야의 목소리에 옅은 당혹이 들어찼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침착함을 되찾고 단원들에게 말했다.
“대기한다.”
그 말이 끝나자 다들 벽으로 붙어 시립했다. 그에 헤더 역시 얼렁뚱땅 그들을 따라서 같은 자세로 섰다. 무르하는 서둘러 품에서 작은 은장식을 몇 개 꺼내더니 에퀘야의 주변에 일정한 모양으로 내려놓았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의 보호 주술인 모양이었다.
그런 무르하에게 길을 오는 내내 들고 있던 장식을 돌려준 에퀘야가 실내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르하가 창백한 낯으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긴장한 탓에 움찔한 헤더는 당당하게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사납게 굳어지는 에퀘야의 얼굴을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어떤 중년의 여성이었다. 에퀘야보다도 조금 더 나이가 있는 것 같은 그녀는 살집이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큰 몸집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바틱 정장을 호화스럽게 두르고 있어 쳐다보고 있노라면 눈이 다 아플 정도였다. 어두운 톤의 피부 위로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회갈색 머리카락이 형형한 눈매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끝에 입가의 주름이 걸려있었다. 여러모로 에퀘야처럼 형형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헤더가 의아한 눈으로 들어온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는 동안 에퀘야가 눈썹을 씰룩이며 입을 열었다.
“주라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 소리에 헤더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이 그 ‘주라만’인 것이다. 에퀘야의 날 선 말에도 주라만은 여유작작하게 웃으며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귀한 분이 오셔서 누카르아의 반군에 서신을 보냈는데 저를 기다린 게 아니라구요?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정중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담배에 불을 붙인 그녀는 연기를 빨아들이며 웃었다. 중년 특유의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음험함이 서려 있었다. 그에 에퀘야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순식간에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에퀘야는 먼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칼란투에게 누카르아에서 항쟁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전해 들었는데 자네가 나오는군. 제국에 대항할 생각이 생긴 건가?”
그에 주라만의 입매가 비죽 비틀렸다. 헤더는 그것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주라만의 뒤에는 그녀를 따라온 누카르아의 반군들이 몇 명 서 있었다. 그들은 다들 무표정했지만, 헤더는 에퀘야의 말에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제국에 대항이라. 어감이 좀 그렇군요. 제국으로부터 누카르아를 독립시킬 생각이라면 만만합니다.”
“호오, 그래? 어떤 식으로?”
“평화적으로요.”
주라만의 말에 이번엔 에퀘야의 입매가 비틀렸다. 평화적이라고. 에퀘야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제국이 너희의 평화 시위를 용인해 주겠다든? 천하의 백려조차 처음엔 평화로운 시위를 거행했음을 모르는 모양이군, 주라만.”
“백려야 우리와 다른 여건이 아닙니까?”
“제국이 누카르아는 봐줄 거라고 생각하나?”
에퀘야가 다소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에 주라만은 어깨만 으쓱였다.
“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하지만 제국을 공격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누카르아를 짓밟으러 올 겁니다.”
“얀 끄라투는 어디에 있지?”
에퀘야가 가타부타 않고 쏘아붙였다.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헤더는 날카로워지는 실내에서 숨을 죽이면서도 눈앞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얀 끄라투는 또 누구야? 에퀘야가 사뭇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데도 주라만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헤더는 저런 용기가 있으면 그거로 제국에 대항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주라만은 에퀘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과격한 인사는 우리 반군 내에서 신임을 잃은 탓에 처리되었습니다.”
“뭐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