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73)
바다새와 늑대 (272)화(273/347)
#116화
“그는 연신 제국과 격돌하여 누카르아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누카르아를 진정으로 지키고 사수하기를 바란다면 자살과도 같은 전쟁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제국과의 협상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그 말에 에퀘야의 턱이 씰룩거렸다. 헤더는 상황을 보며 문득 아상트라에서와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면 누카르아에 관한 정보고 많이 알고 있고 주라만도 에퀘야를 좀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아상트라에서는 상호 간에 모두 초면이었는데……. 이게 가능한가? 중부 바다는 에퀘야의 영역이 아닌데도?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것에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헤더 자신과 그들의 정보량의 차이인지 뭔지 모르는 그녀는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에퀘야가 분개심이 담긴 목소리로 을렀다.
“제국은 누카르아를 순순히 놔주지 않을 거야! 그들의 탐욕을 모른단 말이냐? 소꿉놀이하듯 ‘이제 그만 놀고 돌아가라’ 하고 말하면 그놈들이 물러갈 거라고 생각해? 순진하군!”
“진정 순진한 것은 공주님이 아니신지요.”
‘공주님’ 소리에 혁명단 쪽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게 얼어붙었다. 헤더 역시 식겁해서 에퀘야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주라만이 말을 이었다.
“그럼 제국과 부딪혀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택하라는 겁니까? 사명감에 도취된 자들이야 금방 제국에게 숙일 바에야 목숨을 바치겠다고 부르짖는 법이지마는, 진정으로 그리한다고 해서 제국이 물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럼 그들의 지배에 복종하겠단 건가?”
“지나친 흑백논리로군요. 저는 단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누카르아에 지금보다 많은 자유를 불러오고 싶은 것뿐입니다.”
주라만의 말에 헤더는 내심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뭐, 제국도 누카르아에서 먼저 그들의 지배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자치권을 가져가겠다 협상하면, 응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제국이 다른 섬들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뭐든 평화롭게 될 수 있다면, 그 방법도 평화롭게 이뤄질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순간 에퀘야가 테이블을 쾅 내리찍었다. 그녀의 주먹이 파고든 목제 테이블에 커다란 금이 가더니 쩍 소리를 내며 나뭇결이 약간 쪼개졌다. 그에 헤더는 속으로 기겁을 했다. 에퀘야가 격렬하게 외쳤다.
“그것이 누카르아의 수많은 이들을 참살하고 모질게 학대한 제국이라는 권력에게 숙이겠다는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설령 당장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고 해도 지금 너와 같은 태도가 나오지는 않는다. 주라만, 무언갈 꾸미고 있는 거라면 명심해라. 누카르아는 너의 것이 아냐!”
에퀘야의 말에 주라만의 얼굴이 별안간 크게 파안했다. 때에 맞지 않는 요란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활짝 웃는 것이 아닌 어딘가 비틀린 얼굴은 일견 차갑고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주름이 진 얼굴의 주라만이 일그러지듯 웃으며 에퀘야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는 공주, 당신이야말로 남의 국가 안위에 과한 참견이군! 제국만이 내정간섭을 하나?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내정간섭이 아니란 말이야?”
“감히!”
순간 무르하가 화가 난 어투로 버럭 외쳤다. 헤더는 여태 사근사근하고 조용하던 그가 그렇게 외치는 것에 깜짝 놀라 주술사를 보았다. 내내 조용하던 무르하는 주라만의 말에 눈에 띄게 격노한 상태였다.
“감히 공주 전하께 그런 말을 하십니까! 누카르아를 비롯해 수많은 서부 바다를 돕기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당신 같은 이가 어찌!”
“그럼 서부 바다에서나 있으셨어야지요. 케르헤티에 있는 왕께서는 평안하시답니까?”
주라만이 이죽이며 말하자 무르하와 에퀘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더는 싸늘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진 실내에서 주라만만이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헤더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를 흘끔거리다가 문득 주라만의 귀에 큼지막한 귀걸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워낙 화려한 정장에 가려진 탓에 이제야 눈에 보인 귀걸이는 커다란 보라색 보석이 박혀있었다. 반군으로 활동하면서 저런 커다란 보석을 몸에 지니고 다니나? 어렴풋한 의문이 들었으나 헤더는 이내 그냥 뭐 소중한 장식품인 모양이다, 하고 넘겼다. 그사이 에퀘야와 주라만의 신경전은 일촉즉발처럼 느껴질 정도로 첨예해져 있었다.
에퀘야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앞에서 후회할 발언은 하지 말지.”
“뭐가 말입니까? 저에겐 당연한 일입니다. 내내 함께 일을 도모한 중부 바다의 대장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어찌 먼 곳의 서부 바다의 대장이 온단 말입니까?”
“칼란투는 게슈베르송의 일만으로도 바쁘다. 나만으로도 누카르아의 일은 충분해.”
“그건 그대들이 정할 일이 아닙니다.”
주라만이 차갑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케르헤티의 일을 아는 어느 사람이 그 나라의 공주에게 큰일을 맡기겠습니까?”
그 말에 무르하가 다시금 울컥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것을 팔을 들어 멈추게 한 에퀘야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라만을 보았다.
“이제 알겠군. 반군의 목표를 착각하고 있군, 주라만. 누카르아가 안 됐어….”
그렇게 웅얼거리듯 말한 에퀘야는 이내 뒤돌아 헤더와 시립한 단원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누카르아를 뜬다.”
“예? 하지만.”
헤더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을 꺼냈다가 바로 입을 닫았다. 아차 한 얼굴의 헤더를 한 번 본 에퀘야는 별다른 말 없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누카르아의 반군들이 문을 가로막았다. 그에 짧은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누카르아를 위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무슨 목표로?”
“원래는 칼란투가 오길 바랐습니다. 그를 잡으면 중부 바다 쪽은 제국과 협상하기 편해졌을 테니까요.”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 둔한 헤더여도 알아차릴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헤더는 입만 떡 벌렸다. 지금 혁명단 대장을 잡아서 제국과 협상하려고 했다는 소리인가? 헤더는 이젠 거의 아찔한 기분이었다. 제국에게 쉽게 거스르기 힘들다는 것까진 이해했지만 왜 굳이 혁명단 대장을?
게다가 에퀘야가 도와준다고 하는 만큼 누카르아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왔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혁명단의 대장을……. 그러나 에퀘야는 이전에 분노한 것과 별개로 침착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이지 누카르아가 안 됐군. 본디 독립을 위해 모였을 이들이 겁쟁이가 되더니 어느덧 정치질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고 있으니….”
에퀘야는 그렇게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쑥 빠져나온 손에는 예의 너클이 끼워져 있었다.
“누카르아의 국민이 흘리는 피눈물이 보이지도 않더냐!”
에퀘야의 주먹이 노도처럼 쏘아졌다. 그에 문을 가로막았던 반군이 싸리 빗자루처럼 휘청이며 쓰러졌다. 다급하게 도로 일어나려는 반군들을 발로 찬 에퀘야가 단원들에게 외쳤다.
“먼저 나가서 퇴로를 확보한다! 바깥에 반군이 더 있을지 모르니 주의하라!”
“예!”
단원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에퀘야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헤더 역시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곧장 비수가 쏘아졌다. 다급하게 방패로 그것들을 막은 헤더는 단원들과 반군을 상대해야 했다. 골목에서 갑자기 칼부림이 일어나자 활기차던 골목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골목에서 헤더는 몇 번이고 사선을 넘어야 했다. 그녀가 아직 어설픈 전사여서 그런 것인지 장소가 비좁다는 특이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직 무르하와 에퀘야는 건물에서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우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에서 무르하가 굴러 나왔다.
헤더가 화들짝 놀라서 그에게 달려가 방패로 그를 보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노린 비수가 헤더의 방패를 거세게 때리고 튕겨 나갔다. 그나마 제국이 화기를 독점하고 있어 총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헤더가 무르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아요? 에퀘야는요?”
“아, 아냐, 잠시만… 잠시만요….”
그런데 무르하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연신 눈을 비비며 경황없는 어투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건가? 무르하와 헤더를 본 단원 중 하나가 다가와 그들을 엄호해줬다. 그 덕에 헤더는 아까보다 침착하게 무르하를 살필 수 있었다. 여전히 방패를 들어 경계하면서 헤더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무르하, 무르하! 괜찮아요?”
그때 무르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친 헤더는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본래 우윳빛 진주처럼 부드러운 색깔이던 그의 눈이 흰자까지 모조리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꽥 비명을 지를 뻔한 헤더가 겁에 질린 어투 그대로 무르하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마, 맙소사, 무르하, 당신 눈이….”
“앞이, 앞이 안 보여요…. 앞이 안 보여요!”
“지, 진정해요. 우리 침착해져요. 단원들이랑 내가 잘 부축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헤더는 가까스로 그렇게 말하며 무르하를 달랬으나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엄호해주던 단원 역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아채고 안색이 나빠졌다. 그가 다른 단원들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종이로 접은 것 같은 새가 날았다.
무르하의 주술로 만든 전령 새였다. 그런데 그것이 날아가자 돌연 무르하가 비명을 지르며 움츠러들었다. 헤더와 단원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주술사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가련할 정도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당황한 헤더가 급하게 그의 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왜,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이게?”
“대장님은?”
긴 머리를 한 단원의 물음에 헤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건물 안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무르하, 괜찮습니까? 힘들더라도 상황 설명을 해주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