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74)
바다새와 늑대 (273)화(274/347)
#117화
단원의 말에 무르하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헤더는 그것이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인지 고통에 목을 가누지 못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무르하는 최선을 다해 무어라 설명하려 했으나 헤더도 단원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무르하의 상태가 나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긍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었다. 이미 지체된 시간 탓에 혁명단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무르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 그 여자… 주라만이 무언가를 했습니다. 아마 전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상황일지 몰라요. 저는… 저는 당장은 주술을 더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빠르게 나온 말이었으나 단원은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무르하의 전령 새를 보낸 직후 그가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나 지금 그의 눈이 저렇게 변한 것이나 모두 주라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헤더는 문득 주라만의 유별나던 귀걸이를 떠올렸다. 자수정 비슷한 것 같던 보라색 보석….
그때 무르하가 헤더를 붙잡았다. 아마 그녀인 줄도 모르고 붙잡은 것 같았다.
“에퀘야를 도와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이런 곳에서 붙잡히면 안 되는 분이십니다.”
누구든 붙잡히면 안 되는 몸이긴 하죠…. 그러나 헤더도 그와 같은 생각이긴 했다. 뭐가 됐든, 에퀘야는 강하긴 하지만 암만 강한 그녀라도 무르하와 비슷한 짓을 당했다면 위태로울 수 있다. 헤더는 단원에게 눈짓하고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실내는 아까와 달리 고요했다. 바깥의 소란만 한 꺼풀 덮여 들려오는 조용한 실내에서 헤더는 방패를 들고 경계했다.
침착하게 아까의 협상실로 들어간 헤더는 약간 황망한 얼굴을 했다. 그들을 가로막았던 반군들이 죄다 쓰러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 에퀘야와 주라만은 보이지 않았다.
“…에퀘야?”
소심하게 에퀘야를 부르며 발을 뗀 헤더는 어리둥절한 낯만 했다. 보통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만약 로트렐리나, 랄티아였다면…. 그렇게 생각하던 헤더는 문득 바닥에 얌전히 깔려있던 러그가 비뚤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유심히 보던 헤더는 끙 소리를 냈다.
보통 이런 걸 발견하면 랄티아는 그럴듯한 추리를 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능력이 없는 헤더는 대충 쭈그리고 앉아 러그만 빤히 보았다. 어쨌든 이게 이렇게 비뚤어져 있다는 건…. 아니, 근데 보통 싸움이 나면 이런 러그 정도야 흐트러질 수 있지 않아?
하지만 지지부진하게 망설이고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헤더는 러그를 확 걷어냈다. 그러자 사납게 찍힌 온갖 발자국과 긁힌 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에퀘야의 너클 중 하나가 그 아래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것을 본 헤더는 너클을 주워 들고 바닥을 발로 눌러댔다. 뭔가 장치가 있는 거 아냐?
그렇게 돌다리 두드리는 사람처럼 바닥을 콱콱 밟아대던 헤더의 발아래 드디어 무언가가 꾹 아래로 꺼졌다. 그러더니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네모난 홈이 생기더니 드르륵 밀렸다. 지하실로 가는 계단이 그곳에 있었다.
헤더는 긴장한 얼굴로 그것을 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일어나는 중인지 소음이 들려왔고, 실내에는 쓰러진 반군들만 있었다. 헤더는 이내 침을 삼켰다. 그래, 뭐라도 해보자.
헤더는 곧장 어두컴컴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혁명단이 대기하던 곳으로 무르하의 전령 새가 도달했다. 단원 중 지휘를 위임받고 있던 자가 크게 말했다.
“지원 요청입니다. 뭔가 일이 틀어진 모양이에요.”
그 말에 단원들은 잠시 술렁이고는 나름 지위가 있는 이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네토르가 혀를 찼다.
“혹시 모를 때에 대비하라더니 정말로 일을 벌여주시는군.”
그 말에 브레딕이 타박했다.
“너무 시니컬하게 굴지 마. 뭔가 좀 꼬일 거라는 건 예상하고 간 거였잖아. 그것보다 헤더가 걱정이지.”
형들의 말을 들으며 클레인스는 문득 랄티아를 떠올렸다. 지금 랄티아가 여기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네토르처럼 냉소적으로 말했을 수도 있고, 몇 가지 정황으로 지금 헤더와 에퀘야가 대략 어떤 상황일지 추리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레인스는 그게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랄티아를 떠올릴 때면 늘 기이함이 먼저 느껴졌다. 로트 누나와 같이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클레인스는 우홉피아주와의 결전이 끝나고 얼마 동안은 랄티아를 자주 마주쳤었다. 하몬에게 배의 분위기가 어떤지, 뭐 그런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함저 구역과 선실을 자주 왕복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로트렐리와 함께 있을 때의 랄티아는 얌전하고, 평범하게 천진하고, 제 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애였다. 로트렐리가 의식이 없을 때는 가라앉아있긴 했지만, 가족이 걱정되는 사람에겐 으레 흔한 분위기다. 그럼에도 무언가 찜찜한 것이 있었다. 묘한 기시감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클레인스에게 네토르가 말을 걸었다.
“뭐가 들려? 여기서 그 사람들 소리를 찾아보라니 어쩌니 하면 웃기는 소리겠지?”
“잘 아시네요. 웃기는 소리예요.”
“그래. 그나저나 우리도 영락없이 휘말리게 생겼는데 괜찮은 거냐?”
“각오하고 배에서 내렸으니까 됐어요.”
클레인스의 여상스러운 말에 네토르는 눈썹만 치켜올리며 ‘아, 그래?’ 하고 대꾸만 했다. 그 미심쩍은 태도에 클레인스는 고개만 기울였다.
“왜요?”
“아니, 내 형제랑 닮은 사람이 참 많다 싶어서.”
자신이 그의 형제와 닮았다는 말인가? 클레인스는 향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네토르가 또 그리움이 도진 거라고 생각했다. 브레딕은 어색한 얼굴로 둘을 보며 웃기만 했다. 사실 네토르는 로트렐리와 티격태격하던 것이 더 특이한 일이었지, 그전에는 비교적 조용한 선원이었다. 종종 대화하면 형제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그 외엔 크게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브레딕은 오히려 로트렐리와 싸우면서 네토르가 자신의 모습을 더 드러내는 것 같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단원들이 일행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조를 짜서 산개해 누카르아를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만일의 경우에 소란이 일어나 제국 쪽 근위병이 온다면 최대한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전을 세운 상태였다. 에퀘야와 무르하 일행을 찾아 상황을 돕고 항구의 배로 귀환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브레딕은 어깨를 돌리며 한숨만 쉬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날이 없어.”
“가자.”
일행은 같은 조가 된 단원들과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들이 있던 곳은 나름 평화로운 편이었으나 조금만 더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대거나 경황없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웬 칼부림이…….’
‘사람들이 싸우고….’
‘…저게 혹시 그 불량수배자들인가…’
속닥이는 소리를 들은 클레인스가 브레딕과 네토르에게 말했다.
“눈에 띄는 전투가 있던 모양인데요. 어쩌면 현재진행형일 지도 모르고요.”
“이런… 골치 아프게 됐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