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76)
바다새와 늑대 (275)화(276/347)
#119화
헤더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내려온 지하실의 길목에 성냥이 있어 챙긴 헤더는 성냥을 하나씩 켜며 앞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성냥은 램프와 달리 불빛이 오래가지 못한다. 그 탓에 남은 성냥 수를 헤아리며 앞으로 나아간 그녀는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에퀘야는 물론 주라만까지 깜깜무소식이었다. 지하는 땅굴처럼 어디론가 이어진 구조였는데, 앞쪽을 향해 귀를 기울여봐도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어두컴컴한 데다 누군가 튀어나올까 봐 잔뜩 긴장한 헤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적인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나마 체력이 랄티아보다 좋은 편이라 다행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근데 랄티아보다 연약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사실상 일행에게 있어 랄티아는 거의 갓 태어난 병아리 같은 인상이었다. 똑똑하긴 하지만 그뿐이고, 마장석 피스톨은 강력하긴 하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에퀘야나 다른 일행들이 랄티아를 굳이 누카르아로 데려오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지금쯤 랄티아는 안전한 배에서 혁명단이 귀환하길 기다리고 있겠지.
아슬아슬하게 손을 데지 않을 정도로 쓴 성냥을 떨쳐내듯 바닥으로 내던진 헤더가 새로운 성냥을 꺼내 들던 참이었다. 앞쪽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오자 헤더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방패를 들었다. 가만히 집중하자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는 소리와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헤더는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소리에 집중했다. 아직 거리가 있고 소리가 울려서인지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제국에 대항하는… 우리는…….”
“…그 입 다물어라!”
헤더가 소리의 근원지로 가까이 다가가자 드디어 뭐라고 하는지 분간이 되기 시작했다. 주라만과 에퀘야의 목소리였다! 헤더는 반가움과 함께 걱정이 샘솟아 걸음을 서둘렀다. 헤더가 모퉁이를 돌아 그들에게 다가간 그때였다.
“누카르아더러 케르헤티의 왕조처럼 독이나 처먹고 죽을 날을 받아두란 소리냐!”
주라만의 외침에 헤더는 반가운 얼굴을 하다가 굳어버렸다. 모퉁이를 돌자 나타난 곳은 지하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나름 번듯한 실내였다. 적당히 비밀스러운 모의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었는지 깔끔한 가구들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심지어 의자는 다리가 두어 개 부러져 더는 제구실을 못 할 것처럼 보였다.
에퀘야에게 얻어맞은 듯 바닥에 쓰러진 주라만과 그 앞에서 황소처럼 가슴과 어깨를 들썩이는 에퀘야 외에도 사람이 있었다. 주라만의 뒤쪽으로 반군으로 보이는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단원은 아닌 것 같았으나 에퀘야에게 밀쳐진 것처럼 그녀의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는 막 발을 들인 헤더를 보고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에 반사적으로 헤더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캉! 날카로운 소음에 에퀘야와 주라만의 시선이 헤더에게 향했다. 헤더는 자신의 방패에 맞고 떨어진 것을 보았다. 웬 단도였다. 그러자 에퀘야가 사납게 외쳤다.
“저 앤 우리 단원이야!”
그 말에 단도를 던진 남자는 놀라서 고개를 연신 숙여댔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헤더가 경황없이 물으며 에퀘야를 살폈다. 다행히 에퀘야는 무르하처럼 주술 같은 것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 짧은 사이에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몸을 보면 이곳저곳에 멍도 든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소동이 한차례 지나간 모양이었다.
주라만이 이때다 싶었는지 움직이려 하자 에퀘야는 대번에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중년인이 꺽 소리를 내며 웅크리자 그제야 흥, 소리를 낸 에퀘야는 까까머리인 쪽의 옆통수를 박박 긁듯 문지르며 넘어진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헤더는 ‘의자는 눕혀둔 채로 쓰는 게 아닌데요’, 하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 의자를 바로 세운다고 의자 역할을 하지도 못할 거 같았기에 침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퀘야가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망할 술수에 시간을 뺏겼어.”
그녀의 손에는 주라만의 보라색 귀걸이가 들려있었다. 설마, 하고 웅크린 주라만을 흘긴 헤더는 중년인의 귀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을 보고 히익, 하고 질색하는 소리를 냈다. 저게 정말로 그 이상한 술수의 매개체가 맞았구나! 그때 에퀘야가 물었다.
“무르하는?”
“밖에요. 무르하 상태가 나쁘던데요. 눈이 안 보이고, 주술을 쓰니까 엄청 고통스러워했어요.”
“파훼하지 못했나?”
“네, 적어도 제가 있을 때까지는 계속 눈도 검고, 힘들어했어요…….”
“젠장……. 이 망할 여자가!”
에퀘야는 헤더의 말에 격분하다가 귀걸이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헤더는 다행히 더 싸움이 일어날 것 같지 않자 소심하게 설명을 요구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에퀘야 당신은 그… 주술에 안 걸렸네요?”
“걸렸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끌려올 일이 없었겠지.”
“여긴…?”
“설명은 이후에. 일단 여기를 벗어난다.”
그 말에 헤더는 얌전히 따랐다. 에퀘야는 주라만을 보다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더니 머리를 한 대 내려쳐 기절시켰다. 무시무시한 손속이었다. 헤더는 거기에 약간의 사감이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어쨌거나 자신이 만류할 위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때 헤더에게 단도를 던졌던 남자가 그들을 뒤따라왔다. 그에 헤더가 흠칫하며 경계하자 에퀘야가 말했다.
“내버려 둬. 누카르아의 반군인데 주라만에게 반감을 가진 자더군.”
그 말에 헤더는 회담이 오가던 중 유일하게 심기가 꼬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반군을 떠올렸다. 남자가 어색한 어투로 헤더에게 인사했다.
“젠 스루베라고 합니다.”
“아, 네.”
전에 아상트라에서 한 번 자경단에게 이름을 그대로 말했다가 호되게 랄티아에게 곤욕을 치뤘던 헤더는 자신의 정보를 내주지 않고 얼버무렸다. 젠은 헤더의 태도에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방에 있던 램프를 든 에퀘야 덕에 헤더는 성냥을 굳이 하나하나 켤 필요가 없었다. 은은한 불빛에 주황빛으로 보이는 지하의 길을 다시 되돌아 가로지르며 에퀘야가 말했다.
“이곳은 주라만이 제국의 인사들과 비밀리에 만나기 위해 만든 토굴이다.”
“예?”
“더 늑장을 부리거나 주술에 애를 먹어 무력화되었다면 난 곧장 제국의 근위병들에게 넘어갔겠지. 다행히 이쪽의 젠이 주라만에게 반발을 갖고 파훼법을 기억해뒀다가 내게 사용했다. 무르하에게도 같은 일을 해줘야 해.”
“그, 그렇군요….”
헤더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에퀘야에게 물었다.
“그, 독 이야기가 오가던데 그건 뭔가요?”
“…….”
그 물음에 에퀘야가 침묵하자 헤더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눈치도 없이 너무 민감한 것을 물어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는 동안 침묵하던 에퀘야는 이내 순순히 말문을 뗐다.
“딱히 기밀은 아니니 이야기할까. 네가 똑똑이에게 들었듯 나는 케르헤티의 공주지. 그러나 이상하지 않나? 이 나이까지 공주라니.”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은데요……. 계승권이 없던 게 아닌가요?”
“아니, 난 맏이였다. 그러나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하고 혁명에 몸을 담갔지. 현재 케르헤티의 왕은 내 남동생이 맡고 있다.”
헤더는 모르는 일이지만 정확히 백려와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에퀘야는 앙금이 많은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모양새는 나쁘지 않았다. 제국은 케르헤티가 반제국파인 나를 축출하고 동생을 왕으로 앉혔다고 생각해 만족했지. 그러나 혁명단을 이끄는 과정에서 나는 몇 번 노출 되었고, 케르헤티가 몇 번의 눈속임으로 나를 잡으려는 시늉을 했으나 그것도 한계였다.”
“…제국이 눈치를 채고 뭔 짓을 꾸민 건가요?”
“그래. 일이 있기 전, 제국은 과하게 조용했어. 케르헤티를 정찰하는 인원이 대폭 줄고 경계를 늦추기에 우리가 잘 속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비밀리에 나의 가족과의 만찬을 위해 케르헤티를 찾았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