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82)
바다새와 늑대 (281)화(282/347)
#125
화
“주술을 위해서는 초월자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 주술사들의 심력이 초월자들을 앎으로부터 온다고 하지 않았나.”
“문제는 왜 알아야 하느냐입니다.”
그 말에 에퀘야는 눈가를 씰룩였다.
“초월자들의 행적에 주술의 역사가 섞여 있고 그 자취를 탐독하는 과정에서 체화를 통해 심력을 얻기 때문 아니었나?”
“아뇨, 정확히 말하자면……. 주술사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초월자들의 힘을 나눠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퍽 놀라운 말이었으나 에퀘야의 반응은 다소 심드렁했다. 그냥 신기한 이야기를 알았군, 정도의 태도였다.
“그런 것치고 같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난 주술 같은 것은 하등 다루질 못하는데. 그것이 무슨 연관이지?”
“주술의 시작에 초월자가 있고, 초월자들의 힘에서 심력이 온다는 것은, 주술의 창조자가 초월자 중 하나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그중 개인적으로 유력하게 보고 있는 것은 바다의 마녀와… 주인이었습니다.”
이상할 것 없는 소리였다. 기실 초월자들의 이야기는 모두 그들로 귀결되곤 했다. 에퀘야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아까 대화에서 생각에 빠져서 예언까지 나와야 하는 문제인가?
“그런데 바다의 주인은 죽었고 마녀는 필멸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정도로요.”
“그래서?”
“주술을 배우는 주술사들은 다들 아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비의는 한 곳에 있고, 그것이 파괴되면 모든 주술은 효력을 잃는다.’ 단순히 격언 같지만, 실상은 주술의 근원이 사라지면 주술사들의 힘이 사라질 거라는 뜻이에요. 체화를 했다고 해도 그 경험의 근원이 사라지면 체화마저 사라지니까요.”
반쯤 못 알아 먹겠는 소리에 에퀘야는 약간 멍한 얼굴을 했다. 잠시의 시간을 두고 무르하의 말을 곱씹은 에퀘야가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그러나 주술은 시대를 거듭하며 진화해온 흔적이 있습니다.”
무르하의 말에 에퀘야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뭔 소리인가, 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랄티아가 옆에 있었다면 곧장 ‘아, 그래서 그런 거군요,’하고 말했을 일이나 에퀘야는 랄티아만큼 빠르게 모든 단서를 조합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케르헤티의 공주이고 혁명단의 서부 바다 대장이다. 곧 무르하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낸 에퀘야는 담뱃불을 내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다의 마녀가 사람들에게 주술을 사사한 전례가 없으니 그건 바다의 마녀가 아니겠군. 바다의 주인은 죽었으니 차치하고, 그렇다면 다른 초월자가 주술에 개입하고 있는 거야. 혹은 그 ‘제삼의 초월자’가 주술의 시초일지도 모르고.”
“그거예요.”
무르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가장 유력한 것은…….”
“역시 에르노리인가?”
“네? 아뇨. 숲의 여왕은 필멸자들에게 존재가 알려지긴 했고, 때때로 정보를 흘리긴 하지만 주술과는 별로 연이 없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옛적에 사멸된 정령술에 더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에 에퀘야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예언의 이야기가 왜 나왔단 말인가? 에퀘야의 의문이 심화하기 전에 무르하가 말을 이었다.
“네르갈. 네르갈이 있습니다.”
“네르갈? 죽음을 찾아다니는 불길한 자, 뭐 그런 구질구질한 이명을 가진 초월자가?”
‘죽음’과 ‘불길’이라는 어마무시한 칭호를 가진 것과 달리 네르갈이란 초월자는 좀처럼 발자취를 찾기 힘든 자였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살아있되 죽은 자’라고 불렸다. 초월자라기엔 초월적인 행보를 보이거나 눈에 드러난 적이 드물고, 먼 옛날의 고사에 따르면 초월자에게 덤빌 생각을 한 어느 멍청이 덕분에 알게 된 사실로, 그는 ‘죽기도 한다’.
끔찍하게 살해되어도 곧 뭉쳐져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이 아주 드물게 발견되긴 하지만, 그것도 무르하가 유서 깊은 교육을 받은 주술사이고 에퀘야가 케르헤티 왕가라는 초월자 친화적인 특징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아는 사실이다. 문득 에퀘야는 무르하가 했던 예언의 구결을 떠올렸다.
‘더 늦기 전 그를 찾으라… 추악하게 만들어진 자, 끈질긴 목숨을 가진 자, 영악한 자…….’
‘끈질긴 목숨을 가진 자’라는 부분에서는 확실히 들어맞긴 하는군……. 에퀘야는 짧은 침묵 이후 무르하를 보았다.
“찾으라는 배반자와 ‘그’가 네르갈이라는 뜻인가? 주술을 누군가에게 사사해온 역사가 있을 정도로 다른 필멸자들과 알게 모르게 교류가 있을 거라는 소리야? 묘하군. 그렇다 한들 그 초월자가 우리 혁명단과 엮일 일이 무어가 있다고?”
“아마도 에르노리는 우리에게 경고하려던 게 아닌 것 같아요.”
“뭐?”
“아마도, 마지막에 나온 ‘로트’. 그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전하려던 예언이었겠죠.”
“…잠시만……. 그 이름….”
에퀘야는 얼굴을 굳혔다. 오래 거슬러갈 필요도 없었다. 아까까지 함께 대화하던 랄티아 일행들 사이에서 나온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에퀘야의 눈에 신중함이 어렸다.
“그래, 그 일행과의 만남이 정말로 커다란 변환점이 될 예정이긴 했던 모양이군.”
그 말에 무르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랄티아 일행을 만나기 전, 아상트라에서 정박하고 있을 적의 일이다. 무르하는 그때도 예지를 보았다. 그때는 이번의 경우처럼 격한 반동을 갖고 오지는 않았다. 예지는 다음과 같았다.
‘달과 같은 눈을 가진 소녀가 일행을 이끌고 그들에게 닿는다. 그중 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과 같은 머리를 한 여인이 혁명의 깃발을 높이 치든다. 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바다가 요동친다.’
‘달과 같은 눈’이라면 밝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랄티아를 말하고, ‘밀밭과 같은 머리’는 헤더를 말하는 것이리라. 에퀘야는 그 예지에 정보를 덧대볼 계획이었으나 그러기도 전에 클레인스가 혁명단의 배를 발견해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진 예지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의심할 수는 있었으나, 예지가 있었기에 에퀘야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에퀘야와 무르하의 믿는 구석을 어느 정도 아는 단원들 역시 크게 불만을 갖지 않았다. 에퀘야는 마치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때를 반추하며 생각을 돌렸다.
“그들이 ‘로트’라는 자와 아는 사이인 건가? 그렇다면 의아한 점이 더 생기는데….”
“그렇죠, 아무래도…….”
정말로 에르노리가 ‘로트’라는 자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그들을 통해 불발된 예언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로트’라는 자는 당최 누구기에 초월자를 찾아야 하고, 그 초월자를 ‘배반자’라고 칭한단 말인가.
에퀘야는 약초가 담긴 물담배가 아니라 정말 연초라도 피우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사람 사이의 일만을 쫓고 있는 그녀에게 초월자의 이야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것이었다. 결국 에르노리, 그 초월자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 애먼 사람을 위해 무르하를 소모했군.
그에 옅은 분노까지 느끼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에겐 예지가 있으나 똑똑이 일행은 아니지. 그 애의 반응을 보면 로트라는 사람에 관해 묻는다면 도망칠지도 몰라.”
“…모르는 척 덮어두실 예정이군요.”
“당분간은.”
에퀘야는 그렇게 말하고 혀를 찼다.
“어쨌든, 그 점은 나도 염두에 두겠어. 하지만 우리 혁명단과 연루될 일은 아닐성싶고, 때를 보고 똑똑이 일행에게 캐볼 일이지만 그리 시급하지도 않아. 우리에게 시급한 건 이거지. 이거.”
그렇게 말하며 에퀘야는 주라만의 귀걸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자 무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 말이지요.”
“그래…. 제국이 이걸 어느 정도로 다루고 있을지, 우리 쪽에서 아는 만큼 정리해서 다른 대장들에게도 경고를 보내야 하니까…….”
그때였다. 선장실의 문에 달린 작은 구멍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고 전서구가 몸을 비집어 들어왔다. 새의 발에는 빨간색의 비단 끈이 묶여있었다. 중부 바다의 칼란투에게서 온 것이었다. 테이블에 놓은 횃대에 앉은 전서구에게 전서를 풀어내며 에퀘야가 능글맞게 말했다.
“이런, 칼란투와 때가 엇갈렸군. 내 전서구는 지금 열심히 그에게 가는 중일 텐데.”
그러나 전서의 내용을 확인한 에퀘야는 곧 말이 없어졌다. 그녀의 얼굴에도 곧 어떤 기색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사라졌다. 그에 무르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칼란투가 미쳤거나, 가짜거나.”
“예?”
에퀘야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무르하의 앞으로 편지를 돌려 내밀었다. 스윽, 하고 나뭇결을 문지르는 종이의 소음을 따라 시선을 내린 무르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읽다가 곧 사색이 되었다.
“이게, 이게…….”
“그래.”
에퀘야는 무르하의 시선에서 도로 종이를 가져가 접고 촛대에 그 끝을 가져갔다. 곧이어 불길이 종이를 살라 먹기 시작하자 에퀘야의 얼굴에 그 불빛의 음영이 넘실거렸다. 굴곡진 그녀의 얼굴은 분노한 것 같기도 했고, 단단하게 결심한 것 같기도 했다. 에퀘야는 전서가 모두 타 버리자 새로운 종이를 꺼내고 잉크와 펜을 들었다.
그녀의 손은 가차 없이 줄글을 써 내려갔으나 간간이 분노인지 희열인지 긴장인지 모를 것으로 희미하게 떨렸다. 그것을 조마조마하게 보는 무르하를 뒤로하고 에퀘야는 서신을 모두 썼다. 잉크가 느리게 마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의 기운도 그렇게 바짝바짝 첨단이 마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어코 에퀘야의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국과의 전면전을 준비하자니.”
에퀘야는 칼란투의 전서구에게 자신의 서신을 묶어 날려 보냈다.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며 무르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은 어떻게 했나요?”
“…….”
칼란투의 서신에는 에퀘야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활동하는 바다와 제국과의 접점이 모두 다른 만큼, 갖게 되는 정보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는 법이다. 세 명의 대장은 그런 정보의 격차를 최대한 메우고자 서로 정보 교환을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에퀘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 ‘바다새’와 제국의 꿍꿍이가 선명히 밝혀진다면.”
“….”
“그래서 칼란투의 예상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르하 역시 서신의 내용을 보았다. 존경하는 공주를 우러러보며 주술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그래.”
그들은 오래 알고 지냈고,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쉽게 그들 사이의 기분을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에퀘야는 이런 때에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혀야 함을 알았다.
“그때는, 내가 그것을 막기 위해 기꺼이 혁명의 검을 들 것이다.”
무르하는 에퀘야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수그렸으나, 왠지 속이 술렁거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제국에 득이 될 것 같다면 그 바다새와 주인을 처치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 그럼… 혁명단이 향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진상을 알기 위해, 그들은 제국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비의(秘儀), 제국의 비의가 있는 곳으로. 무르하는 일순 눈앞이 번뜩이는 것을 느꼈다.
푸른 바다, 매섭게 몰아치며 분노한 바다가 있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부닥친다. 포성이 울리고, 쇠붙이가 부딪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든다. 거대한 전쟁. 그것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느 길쭉한 인영이 서 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노도처럼 휩쓰는 소금 바람에 그마저도 소금기둥으로 굳어버린 것 같은, 그러나 굳센 등. 그가 고개를 돌린다. 세상의 미래를 가리는 암막처럼 드리운 시커먼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눈이 빛난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거대한 분노.
거대한 분노가 세상을 뒤덮는다……. 우리의 끝이 다가온다……. 피눈물을 흘리며 응시하는 대양의 눈. 혈루는 그 푸른 빛과 뒤섞여 거의 보라색처럼 보인다……. 그, 아니 그녀가 입을 연다. 지독한 분노와 혹한 같은 추위가 그 입에서 흘러나온다.
‘너에게 바다를 내줄 수 없어.’
추악하게 만들어진 자, 끈질긴 목숨을 가진 자, 영악한 자, 아니…, 모든 초월자들이여. 너희의 배반, 불안, 불신이 만든 세계를 보아라.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던 너희의 아둔함을, 미련을.
그것은 태곳적의 저주였다.
‘나를 마녀라고 부르겠지. 뜻대로 하라.’
그리하여 나는 재앙이 되어, 세계를 뒤덮으리라.
“무르하.”
에퀘야의 부름이 소금 바람과 바다의 포말이 폭풍처럼 몰아치던 광경에서 그를 끄집어낸다. 무르하가 예지를 보았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주술사를 살폈다.
“무엇을 봤어?”
그 물음에 무르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광대한 예지는 처음이었다. 예지의 광경에서 끼쳐오던 혹한이 그에게 아직도 남은 것처럼 느껴져 무르하는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몸을 떨었다. 무르하. 재촉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낸 에퀘야는 이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무르하는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이 본 예지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명료하지 않았다. 그 전쟁은 제국과 혁명군만으로 이루어졌다기엔 너무 두서없었고, 우두커니 선 흑발의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무르하는 문득 수배를 떠올렸다. 아니, 아는 사람이다…….
“수배자…. 마녀. 마녀를 보았어요.”
“수배된 마녀라면, 바다새의 주인이란 자로군. 그자가 어땠지?”
“그, 그 사람은…….”
무르하는 잠시 숨을 헐떡였다. 마치 초월자를 앞에 둔 것처럼 숨이 막히던 위압감과 그녀에게서 나오던 분노, 그리고 겨울보다도 차가운 온도가 마치 실존했던 것처럼 그를 몰아세웠다.
“재앙 같았어요.”
“…….”
“재앙이요, 에퀘야. 그자가 세상에 재앙을 불러올 거예요.”
에퀘야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침묵 끝에 물었다.
“제국보다 더한 재앙을?”
무르하는 고민했다. 그는 수배된 마녀를 모른다. 예지로만 본다면 마녀는 스스로 마녀임을 인정하고 세상에 재앙이 되리라 선포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요.”
그 말에 에퀘야는 또다시 침묵했다.
“…칼란투에게 갈 준비는 미리 마쳐둬서 나쁠 게 없겠군.”
무르하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그 새파란 눈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불안과 불신이 넘실거리는 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