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84)
바다새와 늑대 (283)화(284/347)
#127
화
클루스도는 초조하게 선장실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제국으로 먼저 파견을 보낸 선원들이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으나, 제국을 상대로 이런 거래를 걸려고 하다 보니 일개 해적단 선장의 입장에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검은바다의 선내는 여전히 뒤숭숭했다. 제국과 거래를 트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원들 역시 대경했으나, 우홉피아주가 제국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퍼지자 여론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래, 우홉피아주와도 손을 잡았던 제국이 우리와 손을 못 잡을 것은 무어란 말인가? 로트렐리의 바다새를 얻지 못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본이라도 얻어야 했다.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제국이다. 마침 제국도 바다새를 원하니 중간에서 떡고물 좀 받아먹는 건 꽤 영리한 일이 아닐까?
물론 요한을 비롯한 베제는 그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했고, 요한에게 일을 전해 들은 하몬은 구금된 상태에서 통렬하게 클루스도를 비웃었다. 함저 구역의 중년인은 여전히 죽지 못해 살며 갇힌 채였다. 그런 하몬을 프라세가 종종 가서 챙겼으나, 하몬은 프라세를 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함부로 발 뻗다가 크게 다친다. 다 큰 놈이면 모를까 프라세 네가 나를 챙길 이유는 없어. 베제 그놈은 널 말리지도 않더냐?”
“베제 형은…… 내키지 않은 것 같긴 했지만 말리지는 않았어요.”
소년이 주눅이 든 얼굴로 말하는 것에 하몬은 혀만 끌끌 찼다. 그의 앙상한 다리를 들어 옮겨주며 프라세는 조용히 말했다.
“제국과 접촉했다가 큰일이 나면 어쩌죠?”
소년에게 하몬이 말했다.
“무조건 도망쳐라. 휩쓸리지 말고.”
어두운 함저 구역에서 푸른 마장석만 희미하게 웅웅대는 소리를 내며 빛났다. 하몬의 반항이 계속되고 있어 검은바다는 해적선으로 건조된 배가 무색하게도 딱 평균적인 속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장석 기구가 없던 때의 범선처럼 돛을 부풀리는 바람에만 의존하여 속력을 내야 했다. 하몬이 다시금 충고했다.
“네가 어리니 클루스도도 어느 정도 눈감아주고 있는 것이지만, 정말로 궁지에 몰리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젊었을 적 우홉피아주와 어울리던 과거가 있는 작자다. 프라세, 너는 만일의 경우에 배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무조건 베제와 딱 붙어서 피신해야 한다. 알겠느냐?”
“저 이제 곧 열다섯이 되는걸요. 싸우는 법도 알아요.”
“아직 한참 어려! 어른 말 들어라, 프라세.”
그러나 하몬의 말에도 프라세는 그리 가슴 깊이 납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맘때의 소년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을 해도 반쯤 흘려듣는다는 것을 익히 아는 하몬은 혀만 끌끌 찼다. 그러다 그는 흉곽을 크게 부풀리며 기침을 했다. 그에 프라세가 당황해서 하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으세요?”
“망할,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느냐. 이러다 콱 죽으면 될 일이지…….”
“그런 말 마세요.”
“요한과 베제 외에 클루스도의 생각에 반대하는 놈들은 없더냐?”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결국엔 그냥 선장님의 명령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요한 삼촌이 그랬어요.”
“……그래.”
하몬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남은 선원들은 클루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러다 좀 잘못되어도 어쨌든 클루스도 탓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고 짊어질 수 있는 정도의 용기가 있는 자들은 페데르의 목을 벤 뒤 이미 이 배를 떠난 지 오래다. 그때 누군가 함저 구역을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몬은 쉬이 발소리의 주인을 짐작해냈다.
“베제로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몬이 있는 선실의 문을 열고 베제가 들이닥쳤다. 그는 꽁지머리도 잔뜩 헝클어지고 안경도 비뚤어진 몰골이었다. 누가 봐도 선실에서 쉬다가 다급하게 내려온 꼬라지였다. 그에 프라세가 놀라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형?”
“하몬, 하몬은 과거 귀족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권력 구조를 알겠죠?”
베제는 프라세를 보았다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곧장 하몬에게 물었다. 베제가 옆에 램프를 내려놓는 것을 보며 하몬은 미간을 좁혔다.
“왜, 제국이 거래에 응하겠다고 하더냐?”
“정확히는 해군 소장이요.”
“해군 소장?”
“제국의 알라프라리로 갔던 선원들이 서신을 받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갑판 위가 난리라구요.”
베제의 말에도 하몬은 심드렁했다. 노상 갑판의 떠들썩함이 함저 구역까지 닿을 리 만무했다. 베제가 와서 알려주지 않았다면 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처박혀 있었겠군, 그런 생각을 하는 하몬에게 베제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마주친 게 그놈이랍니다. 그, 로트 녀석과 같은 섬 출신이라는 머저리!”
“그런 놈이 있었던가?”
“우홉피아주와의 전투 중에 함저 구역에 숨었던 놈 말이에요!”
그에 하몬은 그제야 테드를 떠올렸다. 베제의 반응을 이해한 하몬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 멍청이가 귀족이라더냐?”
“아뇨, 그, 로트 녀석과 혼담이 오간 소장의 아래 소속된 해군인 모양입디다. 그 테드 놈이 항구에서 우리네 선원들을 발견해서 소장과 접촉할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말에 하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일개 평민이 곧장 해군 소장과 연결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베제가 준 정보만으로 하몬은 소장인 그레고리 경과 테드가 모종의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몬이 짧게 물었다.
“그 그레고리 경의 작위가 뭐라고 했지?”
“남작이요. 애시포드 남작이라고 했습니다.”
“남작이라고…….”
하몬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영지를 갖고 있을 수도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 제국은 확장 전쟁 이후로 커진 땅덩어리와 인구 문제, 그리고 불만들을 틀어막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작위를 내린 과거가 있다. 하몬의 경우 제국이 아닌 다른 독립국의 귀족이었기에 해당되지 않는 말이나, 당장 제국의 경우에는 허울만 좋은 작위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최근 좌천당한 것 같다는 말이 있었지.”
“그, 그랬던가요?”
“좌천이 손쉬울 정도면 본인은 영지를 소지하지 않은 껍데기 작위만 가진 남작일 경우가 크다. 우홉피아주와 손을 잡았었을 거라 여겨지는 사람이었으니 이번에도 검은바다와 손을 잡아 공적을 올리려는 시도를 하는 게지.”
하몬은 뼈만 앙상한 제 다리를 툭툭 손으로 치며 상념에 빠졌다. 그는 베제를 닦달해 최근의 소식 중 아는 것을 다 털어놓으라고 했다. 베제는 최대한 아는 것을 말했다. 로트가 어디와 어디에 모습을 드러냈고, 어디와 어디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심지어는 신문에 오른 가십거리까지 아는 것을 다 털어놓았다. 하몬은 베제가 신문 소식이 아닌 일개 지라시와 소문까지 털어놓자 또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베제, 내 말을 잘 기억해둬라. 그리고 요한에게도 전해. 검은바다가 만일 제국 해군과의 거래를 위해 어딘가로 정박하려는 일이 생기면, 짐을 챙겨뒀다가 곧장 도망쳐라.”
“예에?”
“명심해둬. 제국의 탐욕을 얕보지 마라.”
그렇게 말한 하몬은 이내 벽에 등을 기대 드러눕듯 하며 손을 내저었다.
“가라, 잡놈들아. 쓸데없이 기운 빠지니까 난 잠이나 더 자련다.”
프라세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고 베제는 불안한 얼굴로 하몬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베제는 결국 안경을 고쳐 쓰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예…. 명심하고 요한에게도 전할게요…….”
베제가 프라세를 데리고 함저 구역을 나서자 홀로 남은 하몬은 생각했다. 어쨌거나 일은 벌어져 버렸다. 클루스도는 정말로 제국과 접촉을 시도했고, 무시될 경우가 크던 일은 공교롭게도 성사되어버렸다. 하지만 우홉피아주와 협력을 했던 그 소장이 과연 정말로 우홉피아주와 우호적이기만 했을까? 정말로 우홉피아주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할까? 베제에게서 들은 일을 보면 제국의 안팎으로 크고 작은 소란이 겹겹이 쌓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평화로움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하몬은 로트를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건 사고에 휘말리고 커다란 폭풍을 부르는 씨앗이 그녀다. 알아서 우리의 손을 벗어나준 폭풍에 다시금 뛰어든 꼴이 된 것이다. 그에 더해 제국과 접촉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내 목숨은 정말로 하루살이가 된 셈이군. 하몬은 남일처럼 생각했다. 제국에서 마장석 기구를 운반해오지 않을 정도로 우둔한 사람이 아니니 클루스도는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새로운 마장석 기구로 바꾸는 것은 꽤나 큰 금액과 시간이 드는 일이니 아직 여유는 있다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들 같은 클레인스가 걱정이긴 했으나 계속해서 잘 도망치고 있다면 된 일이다. 하몬은 어두운 허공을 노려보다가 낄낄 웃었다.
“멍청한 클루스도……. 페데르에게 옮은 그 오만함이 너를 파멸로 이끌 게다.”
그는 한참을 어두운 구석에서 낄낄거리다가 기침을 성마르게 하다가를 반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