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87)
바다새와 늑대 (286)화(287/347)
#130
화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샤를리나 황녀는 그렇게나 소란스럽게 닥쳐온 것치고는 흐릿하게 지내다가 백려를 떠나 제국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백려에서는 샤를리나가 백려를 찾은 날과 떠나는 날만 소란스러웠을 뿐, 제국의 거물이 온 것치고는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세운은 탁자에 내려놓은 샤를리나 황녀의 전서 향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군, 그래.”
“원.”
왕자라기보다 산을 쏘다니는 야렵꾼 같은 복장을 한 원이 머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풀어 내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 망할 황녀를 암살해야 했어.”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네. 가뜩이나 정세가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아.”
“정세? 어느 쪽을 말하는 건가? 충애하여 마지않는 우리 백려의 거머리들 말인가, 제국의 돼지들을 말하는 건가?”
“자네는 제발 부탁이니 그런 말씨 좀 고치게.”
세운의 타박에 원은 입꼬리를 비죽 늘렸으나 그뿐이었다. 세운은 고개를 설설 저었으나 속은 영 복잡했다. 샤를리나 황녀의 행적이 영 미심쩍은 건 사실이었다. 그 안락한 제국을 벗어나 백려에 와서 그런 제안을 하다니. 그렇게 할 정도라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퍽 필사적이어야 맞지 않나?
그런 것치고는 샤를리나는 지나치게 미련없는 태도로 떠났다. 전서 향을 주기는 했으나 말마따나 그것을 사용하는 건 세운의 자유였으니……. 그는 문득 떠올렸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백려는 제국에 붙어 득세하려는 거머리들과 중도를 지키려는 이들, 제국을 반대하는 이들로 정세가 난장판이었다.
도현이 중도를 지키려 애쓰고는 있다고 하지만 친제국파가 득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그들은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친제국파는 세상 사리에 밝고 변화에 앞장서는 이들이다. 그러나 세운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그저 나라의 고혈을 빨며 국가를 팔아치우는 매국노일 뿐이었다. 그런 마당에 정말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만약 전쟁이 난다면 백려는 더 불안정해질 것이 분명했다. 친제국파인 놈들이 백려를 위해 싸울 리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백려의 정보나 자원을 제국으로 팔아넘기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당장 닥친 일이 아니니 허투루 발을 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원이 세운의 앞에 잘 접힌 서신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
“중부에서 온 서신.”
“칼란투에게서?”
세운이 망설이지 않고 서신을 펼쳤다. 중부 특유의 거친 종이에 칼란투의 괴랄한 글씨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세운은 그것을 보며 이 필체는 모방하려야 할 수 없으리라 짐작했다.
‘동부의 대장에게.’ 언제나와 같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들은 에퀘야 때와 마찬가지로 세운을 당황하게 했다.
샤를리나 황녀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에 더해 제국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인다. 그 수배된 마녀와 관련하여 제국의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알아본 바로는 캐시언 후작이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캐시언 학파의 인물을 주의할 것.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으나, 정보원에 따르면 후작은 학파의 수장 가문답게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다. 그와 자주 만나는 애시포드 남작은 마녀를 수배한 인물이고, 굳이 바다새를 찾는 것을 보면 그것을 이용해 무언가 실험을 하려는 것 같다. 실험도 문제지만 제국의 기술이 이 이상 성장하도록 둘 수 없다. 제국과의 분쟁에 지쳐가는 식민지가 늘어가는 가운데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 전쟁이다. 곳곳의 반군들이 속속 제국에 항복하고 있고, 투지는 날이 갈수록 시들어간다. 이 상태로 대치가 길어져 봐야 우리는 혁명에 가는 숨만 겨우 이어놓은 채 세월에 깎여 흐려질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제국이 버거운 적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걸어보려 한다.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해 연합군이 된다면 제국의 폭거를 막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부의 칼란투가, 게슈베르송과 백려의 무운을 빌며.
추신. 수배된 마녀는 되도록 우리가 보호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모른다. 혹여 제국에 이용되어 그들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거나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면 보호가 아니라 처리를 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세운은 그것을 다 읽고 말을 잃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바다새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맙소사, 로트……. 자네를 두고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한단 말이오?”
그가 아는 로트렐리는 안 그래도 삶이 퍽 고달팠던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드디어 동생을 되찾고 평화롭게 살 거라고 하던 어리고 젊은 친구였다. 그런 로트렐리를 향해 수배가 내려왔을 때도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세운은 이제 거의 그녀에게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로트렐리가 보인 그간의 일들은 범상치 않은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젠 로트렐리를 둘러싸고 제국과 혁명단이 부닥치려는 것이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로트렐리와 면식이 있는 세운으로서는 저절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운에게 원이 말했다.
“자네의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 애를 걱정할 때가 아냐.”
“……그래, 원, 자네 말이 맞네.”
로트렐리에게 느끼는 측은지심과 별개로 그들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애써 로트렐리에 관한 이야기를 머리에서 몰아내고 칼란투의 서신의 내용을 다시금 살폈다. 세운은 초조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국과의 전면전을 칼란투가 먼저 제안할 줄은……. 위험한 수가 아닌가?”
“위험하긴 하지만 기다리던 소리지 않은가. 칼란투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어. 투지를 잃어가는 섬이 한두 곳인가? 이대로라면 제국은 고분고분해진 이들을 거느리며 지금보다 더한 짓을 일삼겠지.”
원의 말에 세운은 끙 소리를 겨우 삼키며 고민했다. 원이야 제국과 싸우는 것을 원하는 입장이니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혁명단의 거사나, 암살, 시위 등은 산발적이고 부분적이다. 일어나도 그것의 파장이 그렇게까지 거대하지 않다. 하지만 전쟁은 말이 다르다. 혁명단의 전쟁이라니.
단순히 유격전으로 단원들끼리 제국을 치자는 말이 아니다. 국가와 연합하고, 다른 바다의 혁명단과 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만들어 제국과 맞선다. 그건 제국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일이긴 하나 그들 입장에서도 총력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세운은 원을 보며 말했다.
“만약 그렇다고 한들 우리 백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구가할 수 있겠는가? 왕께서 전쟁에 찬동하시리라는 확신이 드는가? 제국은 전쟁을 빌미로 백려를 더욱 가혹하게 뜯어갈 걸세.”
“이상한 말을 하는군, 세운. 제국과의 전쟁이 백려에게 위험할까 걱정된다면 백려는 연관되게 하지 않으면 될 일이네. 칼란투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보낸 서신 같은데 답지 않게 허둥대는군.”
원의 말에 세운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친우의 얼빠진 표정을 보면서도 원은 그의 손에서 칼란투의 서신을 가져와 다시금 읽으며 말했다.
“칼란투는 연합을 하자고 했지. 연합군이라는 이름 아래 몇몇 국가의 이름은 감출 수 있어. 눈 가리고 아웅이더라도 말이지. 그리고 이 전쟁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당연히 제국의 패망이나, 세부적인 목적은 투지를 잃은 이들을 다시금 결집할 수 있도록 투쟁심을 불어넣는 것에 있네. 그리고 혹여 징집이 우려된다면, 우리가 나서야지. 백려 군인들을 징집한 곳을 들쑤시면 겁이 나서라도 섣불리 징집할 수 없을 거야. 또한 징집병에 연합군이 섞여 있을까 두려워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자네가 이렇게 제국을 들이받는데 미친 멧돼지처럼 굴지 않는다니…….”
물론 세운은 원의 의견 중 몇 가지는 다소 무모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의원에게는 이 왕자님께서 ‘알 게 뭐야, 제국 쓸어버리자고’하고 외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세운의 말에 원은 눈썹을 올리며 그를 흘겼으나 이내 무시하고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칼란투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에는 앞서 말한 이유 외에도 더 미뤘다간 제국과의 기술격차가 더 일어날 거라는 불안감이 바탕이 되겠지. 그것을 생각하면 결국 우리도 결단을 내려야 할 걸세. 물론, 자네가 생각하듯 좀 더 몸을 숙이고 때를 살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직감이 드는군.”
원은 그렇게 말하고 탁자 위의 호롱불에 서신의 끄트머리를 들이밀었다. 서신은 이내 불에 타 사라졌다. 세운과 원은 이미 서신의 내용을 외웠고, 그들 외에 칼란투의 서신을 읽을 필요가 있는 자는 없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세운은 침묵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고뇌하던 세운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제국의 황녀가 어쩐지 순순히 물러간다고 생각했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