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89)
바다새와 늑대 (288)화(289/347)
#132
화
‘멋지기보단 무섭게 생겼던데…….’
적어도 그가 예지에서 본 모습은 그랬다. 무르하는 갑판 너머에서 북적이는 저녁의 항구를 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세라무티가 비교적 안전한 경유지로 뽑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언제나 무르하의 주술로 정박한 배를 가려야 했다. 그 탓에 무르하는 주술을 자주 사용하는 때면 약간의 피로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가 늘 나긋하고 유순하게 다니는 것은 단언컨대 이런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날을 세우고 대거리를 해댈 정도의 기력이 없는 낡아빠진 삼십 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르하는 주술을 설치하고도 묘하게 기운이 남아도는 것을 느꼈다. 주술사의 심력이 계산한 것보다 더 여유가 있는 감각이었다. 무르하는 최근 특별히 공부하며 심력을 키우려는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주술사는 홀로 조용히 짐작했다. 아마도 마녀와 초월자들이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한 것만으로 심력이 오른 것이리라.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최 그 마녀는 초월자들과 무슨 연관이란 말인가? 그것을 저 아이―랄티아―는 알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이었으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실 무르하는 혁명단의 수뇌로 활동하고 있었고, 원래가 주술사는 초월자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체화하면서도 함구해야 하는 운명이다. 말 못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은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때 몸소 항구를 살피러 갔던 에퀘야가 배에 올랐다. 그녀는 세라무티로 하선할 인원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당연히 랄티아 일행도 포함이었다. 그에 랄티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일행들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좋아요, 이제 대체 어떤 속셈인지 밝히겠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며?”
브레딕의 말에 무르하는 내심 놀라 그들을 힐끔거렸다. 에퀘야와 무르하는 세라무티로 향한다는 말 외에 단원들에게 아직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무르하의 기대를 배반하고 랄티아가 작게 말했다.
“최악의 경우엔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려는 수작이에요.”
무르하는 이쯤 되자 랄티아가 마녀의 동생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물론 랄티아도 정보가 부족한 만큼 반신반의하고 있고, 망망대해에서 당장 혁명단을 떠날 수 없었기에 가만히 있던 것이지만 그것을 주술사가 알 리 만무했다. 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은 무르하를 모르는 채 에퀘야는 감춰왔던 정보를 밝혔다.
제국과 전쟁을 할 수도 있고, 그것을 위해 흩어졌던 세력과 만나 결집하기 위해 세라무티로 왔다는 것. 그것을 듣고 펄펄 날뛰리라 생각한 랄티아는 의외로 침착했다. 소녀는 오히려 에퀘야를 보며 무언가 기다리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대경하는 것은 소녀의 일행들이었다.
에퀘야의 명령을 받은 단원들이 세라무티에서 누구를 데려와야 한다며 하선했다. 에퀘야는 다른 단원들에게도 공지를 끝낸 후 당연한 수순처럼 랄티아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에 무르하 역시 그림자처럼 에퀘야와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랄티아는 에퀘야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해줄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맞죠?”
“그래, 똑똑이.”
에퀘야는 능글맞게 대꾸했으나 시간을 들여 랄티아를 바라보았다. 랄티아는 그것을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쨌거나 검은바다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줘야 했던 에퀘야는 입을 열었다.
“너희가 찾던 해적들이 제국의 해군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예?”
그 말에 일행 중 가장 놀란 건 클레인스였다. 소년은 하몬이 걱정되는지 초조한 낯을 하며 손을 꾸물거렸다. 다른 일행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네토르가 침착하게 물었다.
“제국의 움직임은요?”
“그 외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어.”
“그건 아닐 텐데요. 그렇다면 제국과 왜 굳이 전면전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연금술이 위협적이라고 느껴서? 그 밖의 다른 기술들은 가만히 두다가?”
랄티아의 날카로운 물음에 에퀘야는 한숨을 쉬었다. 수배된 마녀의 이야기는 부러 그들이 랄티아 일행에게 하지 않던 이야기였다. 이전엔 그다지 주의 깊게 여기지 않았고―칼란투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여기는 서부 바다 혁명단의 배였다―, 이후엔 뭔가 알고 있다는 기색이 은연중에 드러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화두가 나올 정도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에퀘야는 짧은 시간 안에 말을 골라낸 것과는 별개로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연금술에 더해 수배된 마녀를 알고 있나?”
그 말에 랄티아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에퀘야는 가늘어지려는 눈을 애써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마녀가 수배된 이유가 바다새 때문이라는 건 공공연하지. 바다새 한 마리로 뭐 얼마나 대단할 일을 할 수 있겠나 싶어서 그간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지만, 연금술의 존재가 대두된 이상 혁명단은 제국이 이전보다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이전에도 위협적이었지만, 정말로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이지.”
연금술에 관해 알려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다새의 존재야 신기하긴 했지만 몸보신이 되냐 싶은 정도의 존재감이다. 그러니 신기한 것에 목을 매는 귀족들이나 호들갑을 떨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연금술과 바다새가 더해지면 뭐가 가능할지 모른다. 단순히 단서로만 존재할 때는 과한 걱정이라고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제국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러니 우리는 그 마녀가 제국에게 붙잡히기 전에 제국을 쳐서 공격하려는 거다.”
에퀘야의 말에 일행은 어느 정도 납득한 얼굴이었다. 헤더는 로트렐리의 이야기가 전혀 생각 못 한 곳에서 튀어나오자 그제야 로트렐리의 상황을 실감했다. 전혀 모르는, 얼핏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입에도 쉴새 없이 오르내리는 중인 거다. 그때 랄티아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이 배에서 곧 내려야겠네요.”
“뭐?”
랄티아의 말에 당황한 것은 에퀘야와 무르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일행들도 에퀘야의 눈치를 보며 랄티아를 보았다. 브레딕이 속닥였다.
“랄티아, 왜 그래? 여기에 있으면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여기에 있게요?”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면 어디든 안전한 곳은 사라질 거야.”
“차라리 피난민 사이에 껴있는 게 낫지 전쟁 한복판에서 지내라고요? 뻔뻔하기도 하지.”
랄티아의 통렬한 말에 에퀘야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똑똑아, 말을 좀 곱게 하자.”
“곱게 들어주면요.”
에퀘야는 한숨만 쉬었으나 내심 초조해졌다. 수배된 마녀의 동생을 붙잡아두는 편이 혁명단에게 좋을 것이다. 세운의 말도 있었고 말이다. 그때 하선했던 혁명 단원들이 어떤 여자 대여섯 명과 함께 배에 올랐다. 사람을 맞이해 약간의 소란이 일자 브레딕은 고개를 돌렸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마침 육지에 닿기도 했으니 딱이죠. 저희는 여기서 하선할 거예요.”
랄티아가 무어라 에퀘야에게 말하는 동안 그녀의 뒤에서 브레딕이 네토르를 콕콕 건드려 갑판의 구석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네토르 역시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동안 제가 준 도움과 그쪽에서 제공한 정보의 격차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쯤 되면 우리에게 무언가 감추고 있다고도 의심할 수 있고요.”
네토르가 헤더에게 무어라 속닥거리자 헤더는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클레인스 역시 기묘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랄티아가 열심히 무어라 말하는 동안, 에퀘야와 무르하는, 유감스럽게도 랄티아의 이야기보다 소녀 일행의 변화를 더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챈 랄티아가 미간을 좁히며 에퀘야를 보았다.
“제 말을 듣고 있긴 해요?”
“음, 그게…….”
“……이런 태도니까 제가 더 신뢰를 못 하는 거예요. 제가 어리다는 건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저를 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아니, 똑똑아, 그게 아니라…….”
그때 모든 상황의 원인이 일행들을 발견했다. 여자들 사이에 있던 금발의 여인 역시 표정이 이상해졌다. 랄티아의 뒤에 있던 일행과 그녀는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퀘야가 어영부영 자꾸만 자기 뒤를 보자 그제야 랄티아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랄티아는 얼이 빠진 제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얼이 빠진 여성을 보았다.
그러나 랄티아로서는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여자는 결이 좋은 백금색 생머리를 허리께까지 늘어뜨리고 얼굴은 마치 윤슬을 담아둔 것처럼 아름답고 반짝거렸다. 연한 갈색 눈동자는 크게 뜨여 있었는데, 그 바보 같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청순한 분위기가 가감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둥글게 뭉쳐 묶은 화려한 중년 여인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로지안나. 아는 사이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