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92)
바다새와 늑대 (291)화(292/347)
#135
화
로지안나는 그 점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시니컬하게 눈썹을 비죽 올렸다.
“그래서 꽁꽁 숨어있다가 둘 중 누구든 걸려서 개같이 망하겠다고? 뭐, 내가 말한 방법을 사용한대도 소식을 듣고 몰려온 제국군에게 망할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모험이니까. 그리고 정말로 로트렐리와 재회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글쎄. 혁명단이 위협적일까? 걔들 중엔 키이엘로도 있고, 로트렐리 걔도 평범한 애는 아니잖아.”
그 말이 끝나자 그들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브레딕이 얼른 랄티아에게 말했다.
“난 반대야.”
“난 찬성.”
브레딕 다음으로 말한 것은 네토르였다. 랄티아는 그 둘을 의외라는 듯 보았다가 헤더와 클레인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클레인스는 고민하는 것 같다가 찬성했고, 헤더 역시 잠시의 숙고 끝에 찬성에 한 표를 던졌다. 그에 브레딕은 애가 타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정보가 풀리고 세상에 이름이든 뭐든 알리게 된다면 재회한 그 이후엔? 편하게 살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그 말은 언니보단 우투그루를 걱정하는 발언이네요.”
“그야 당연하지. 로트 걔는 이미……. 아, 미안, 랄티아. 근데 너도 알잖아?”
브레딕의 말은 랄티아에게 딱히 유감도 아니었다. 랄티아는 약간 막연해진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항상 명확한 계획과 확실한 실현 가능성 앞에서만 움직이는 랄티아에게 모험을 결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럼…….”
그때, 마음을 굳힌 랄티아는 무어라 말하려다 선실의 문을 보았다. 선실 문에는 색색의 돌이 엮인 장식이 걸려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보던 랄티아는 일행이 그녀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낄 때쯤 거칠게 내뱉었다.
“……이런 망할.”
무르하의 주술 표식이었다. 왜 알아채지 못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랄티아가 곧장 일어나 그것을 홱 낚아채 내던지자, 문이 열리며 에퀘야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거, 엿들어서 미안해.”
“뭐야? 주술이라고?”
브레딕 역시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더는 로지안나와 마담 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었어요?”
“뭐? 우리가? 아냐!”
“전혀 몰랐단다.”
마담 릴리와 로지안나 역시 적잖게 당황한 상태였다. 술렁이는 공기 속에서 마담이 침착하게 에퀘야에게 말했다.
“서부 대장, 이건 좀 심했군요.”
“미안합니다, 마담. 하지만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설명할 명분이 있어요.”
에퀘야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선실 안으로 들어와 랄티아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에 랄티아가 황당하고 약간 분노한 얼굴로 그녀를 보자, 에퀘야는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와 협력을 해, 똑똑이. 우리도 얼마 전에 너희가 찾는 정보가 수배된 마녀와 연관된 거라는 걸 알아챘으니까.”
“뭐라고요?”
“제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중엔 수배된 마녀 역시 포함되어 있다. 제국이 그 마녀를 두고 벌이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내 언니를 마녀라고 부르지 마요.”
“그럼 뭐라고 부르나? ‘로트’?”
에퀘야의 말에 랄티아는 거의 까무러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창백한 얼굴을 하자 브레딕과 헤더가 일어나 에퀘야의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어른이 되어서 괜히 애 자극하지 말아요.”
에퀘야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물러났다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동부 바다의 이야기를 듣고 그쪽엔 정보를 요청하지 않더니, 이제야 알겠더군. 세운이 그 마녀와 자신이 면식이 있다고 잘 대해달라고 언급했거든.”
“뭘 원하는 거예요?”
헤더와 브레딕의 뒤에서 랄티아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에퀘야는 간결하게 말했다.
“지금까지와 별로 다르지 않아. 취급도 다르지 않을 거고.”
에퀘야는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이내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말했지, 혁명단은 소외된 이들을 보호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네가 언니와 떨어진 연약한 십 대 청소년인 이상, 그리고 수배된 네 언니 역시 제국에게 부당하게 쫓기고 있는 이상 우리는 너희를 보호할 거야.”
그 말에 헤더는 약간 감탄하는 얼굴이 되었다. 감명받은 눈치였다. 클레인스 역시 원래도 혁명단에 남는 것에 찬성이었으나 좀 더 안심한 기색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는데. 네토르만이 약간 남 일을 말하는 것처럼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에퀘야는 랄티아를 보며 턱짓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 것이다.
랄티아는 차라리 이 캐럭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답지 않게 만약을 생각했다. 그러나 네토르가 맞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으나 결국 랄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이전과 별반 변화가 없을 거라는 에퀘야의 말은 염연히 따지면 옳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변화가 있었다. 바로 혁명단 단원들의 반응이었다. 그 전엔 그럭저럭 무심하게 일관하거나 랄티아 일행의 소소한 활약을 연료 삼아 말을 붙이던 이들은 랄티아가 수배된 마녀의 동생이라는 소리에 수군덕대기 바빴다. 그것에 신경 줄이 얇게 저며지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랄티아는 빠르게 주어진 상황에 적응했다.
어차피 세라무티의 건물에서 지내는 동안 랄티아는 단원들과 자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에퀘야 역시 슬금슬금 모여드는 세력들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대장들끼리 서신을 주고받느라 바빴다. 랄티아는 자신의 일행들과 어떤 식으로 소식을 내야 할지 상의하는 일 외에는 짧게 산책만 할 뿐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이었다. 랄티아는 바깥바람 좀 쐬라는 브레딕의 성화에 못 이겨 터덜터덜 건물 뒤편으로 산책을 나왔다. 보통 브레딕은 이 시간엔 위험하다며 랄티아를 혼자 보낼 위인이 아니었으나, 랄티아는 혼자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세라무티에서 기거하는 건물은 놀랍게도 얼마 전 마담 릴리의 소유로 돌아섰는데, 뒤쪽의 들판까지 모조리 사유지라서 외부인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둑한 들판에는 여름이 만연해서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옅은 습기와 더위가 맞물려 있었다. 달빛에 의지해 풀벌레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웃자란 들풀 사이를 자박자박 걷던 랄티아는 얼마 걷지도 않은 채 우뚝 멈춰 섰다. 산책마저 귀찮아진 소녀는 여기서 시간이나 때우다가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풀밭 사이를 더 걸어봤자 벌레만 물리지.
랄티아는 주어진 상황에서 적응하려 애썼고,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혁명단에 붙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관한 계산을 끝냈고, 그에 관해 일행과 재차 상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랄티아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보다 로트렐리였다. 자신의 모험에 로트렐리가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못내 싫었다. 물론 로트렐리가 랄티아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됐는데 뭘 어째. 걍 살아!’ 이런 호탕하다 못해 무책임한 말을 했겠으나 랄티아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때 랄티아는 누군가 들판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꽤 오래전부터 서 있던 사람일까? 랄티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약간 얼이 빠졌다. 그것은 꽤 키가 컸다. 그리고 머리에 소의 것처럼 위로 휘어진 뿔이 있었다.
그것을 보자 랄티아는 저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일전에 누카르아에 정박했을 적 배에서 목격했던 그 인영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 탓에 이전보다 그것이 자세히 보였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땅 아래로까지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 역시 가린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달과 비슷한 빛깔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 시선에 눈길을 빼앗긴 랄티아는 그것의 입꼬리가 히죽 위로 올라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미소를 보자 랄티아의 등골을 타고 오한이 내달렸다. 뭔지는 몰라도 위험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랄티아는 떠밀리듯 주춤 뒤로 발을 내디뎠다가 곧장 뒤로 돌아 달아났다.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운 존재감이 도망치는 랄티아의 등을 사정없이 내찔렀다. 멀리 나오지도 않았는데 건물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팔다리의 힘이 느리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랄티아는 이 감각을 어디서 느꼈었는지 벼락같이 깨달았다. 꿈에서 도망칠 때의 감각과 유사했다. 빠르게 움직이는지 아닌지 모르겠는 그 기묘한 감각과……. 랄티아는 이끌리듯 공포에 질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벌어진 거리가 없는 것처럼 아까와 같은 간격을 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늦게 그것이 손에 어떤 두루마리 같은 긴 종이와 펜을 들고 있다는 것이 랄티아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눈여겨보기 전에 랄티아와 그것의 눈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그것이 손에 쥔 깃펜을 한 번 움직이고, 웃고 있던 입이 열렸다.
「아주 흥미로워.」
랄티아는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이었다. 그녀는 제 코앞에 드리워진 손에 반사적으로 악 비명을 질렀다가 놀란 헤더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허덕이며 진정했다. 당황한 헤더가 머뭇거리며 멈춰있던 손을 다시 움직여 랄티아의 이마를 쓸었다.
“무슨 일이야? 악몽이라도 꿨어? 산책은 잘 다녀온 것 같더니.”
“산책이요?”
랄티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이 일행들과 함께 지내는 숙소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숙소의 라운지에 있는 소파였다. 랄티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빠르게 사위를 살피다가 창밖을 보았다. 숙소 주변의 들판엔 여전히 사람이 없었고, 랄티아가 나갔던 때와 시간이 크게 지나지도 않은 듯 여전히 달은 같은 곳에 떠 있었다.
“…제가 언제 산책에서 돌아왔어요?”
“조금 전에. 기분 좋게 들어와서는 소파가 편하다고 누워서 잤잖아.”
헤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랄티아는 눈을 꾹 감았다가 파르라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헤더는 어떤 오해를 한 건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로트는 너무 걱정하지 마. 혁명단과 함께 하고 있고, 모험이긴 하지만, 로트도 비범한 애니까 분명 다 잘 풀릴 거야.”
“뭐라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