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93)
바다새와 늑대 (292)화(293/347)
#136
화
그러나 헤더의 그런 위로는 오히려 날카로워진 랄티아의 심기를 긁는 결과를 초래했다. 랄티아는 대번에 눈을 사납게 뜨며 헤더를 보았다.
“전 여전히 혁명단이 우리 언니를 아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헤더야 좋겠죠, 혁명단에 의탁하는 데다 우리 언니까지 볼 수 있을 테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전 혁명단에게 우리 언니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절대로!”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야? 난 솔직히 네가 아직까지 혁명단을 경계하는 것도 이해를 못 하겠어.”
이번에는 헤더도 물러서지 않았다. 헤더는 미간을 좁히며 랄티아의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풀썩 앉더니 말을 이었다.
“넌 혁명단을 무슨 제국과 맞먹는 악당으로 보는데, 우리가 누리는 많은 권리는 혁명단 같은 사람들이 이룩한 거야. 지금은 심지어 제국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는 거라면 로트도 꺼리지 않을 텐데 왜 그래?”
“무모하고 행동 범위가 지나치게 커서요.”
“무모하다고? 그 무모한 행위가 얼마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꿔뒀는데.”
헤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항변했다. 그러나 랄티아는 헤더의 말에 선명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런 건 여유 있는 사람이나 신경 쓰라고 해요! 전 그런 일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좋은 일을 하려는 건 알겠는데, 그거에 내가 휘말린다고요. 우리 언니가 휘말린다고요! 이 사람들이 항상 옳은 선택만 할 수 있겠어요? 우리 언니는 제국에서도, 해적들도 노리는 사람인데 혁명단이라고 안 그럴 거 같아요?”
“랄티아, 넌 너무…….”
랄티아의 말에 헤더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소녀가 더 빨랐다.
“그래요! 난 사람들 못 믿어요! 다 못 믿는다고요! 어떻게 믿어요? 의도가 어떻고 목적이 어떻든 다들 나한테 위협적인 작자들인데!”
그 말에 헤더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랄티아의 이런 속내를 노골적으로 듣는 것의 거의 처음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헤더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왜… 왜 위협적이라고 생각해? 왜 못 믿는데? 우리는 여태 너를 위해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어떻게 믿어요? 어느 순간 어떻게 돌변할 줄 알고. 이제 알겠어요? 절 그냥 둬요! 제가 이것저것 다른 일에 휘말리게 두지 좀 말라고요.”
헤더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랄티아, 넌… 넌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우리한테 의지해도 된다고.”
“대체 왜요? 대체 뭐가 그렇게 그쪽들을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로 만들고 전 할 수 있는 거 하나 없는 여자애로 만드는데요?”
“사실이 그러니까!”
헤더가 절박하게 외쳤다. 그 말에 랄티아는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해졌다가 이내 격노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소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헤더는 떨리는 목소리로 랄티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너도 무의식중엔 알고 있을걸? 랄티아, 나나 브레딕? 네토르? 물론 부족한 녀석들이지. 근데 우린 어른이잖아. 적어도 내 한 몸 내가 책임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하지만 넌 아냐.”
넌 아니라고. 헤더가 굳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랄티아는 그녀에게 무어라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른의 강압적인 표정이 아니라 동생인 자신을 보는 로트렐리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랄티아 넌… 넌 물론 대단하지만, 굳이 네 쓸모 있음을 우리에게 강조하지 않아도 돼. 넌 아직 어리잖아. 어른도 아니라고. 우린 널 도와줄 거야. 넌, 넌 집도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시고, 돈도 충분하지 않고, 제대로 돈을 벌 나이도 안 되고, 아직 어린 여자애니까. 그런 애를 도와주고 보호하는 건 네 쓸모에 따라 결정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야.”
“…….”
“내가 욕심이 많아서 혁명단 일에도 솔깃하고 줏대가 없어서 이리저리 휘둘린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건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런 것과 네 보호는 양립될 수 있어!”
랄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헤더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좋은 소리인가. 그래, 헤더의 말마따나 랄티아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랄티아는 헤더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기 이전에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뜨겁게 열기가 몰린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랄티아는 차갑게 말했다.
“정론이네요. 하지만 전 알아요. 전 그걸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아무도 그러지 않아요.”
“하지만….”
“장담컨대, 혁명단의 모두가 저를 이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 생각을 해요. 저를 인질 삼아 언니를 휘두르고, 나아가 제국을 칠 궁리를 하겠죠.”
“랄티아. 그건 네가 고민할 일이 아냐. 넌 우리한테 의지해도 돼.”
“제 언니가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랬겠죠.”
그 말에 헤더는 다시금 말을 잃었다. 그러나 헤더가 붙잡기도 전에 랄티아는 대화를 무참하게 끊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홱 몸을 돌렸다.
“랄티아,”
“따라오지 마요!”
들판에서 보았던 무언가에 의한 감각이 아직 남은 랄티아는 뒤이어 일어나는 헤더의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서슬에 놀라 헤더가 멈춰서자 그런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던 랄티아는 이내 서둘러 계단을 넘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던 랄티아는 2층 복도에서 클레인스와 마주쳤다. 그는 약간 놀란 얼굴로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는데, 누가 봐도 라운지에서 있었던 헤더와 랄티아의 실랑이를 들은 얼굴이었다.
“너도 나한테 뭐라고 하려고?”
랄티아는 클레인스를 대할 때 으레 나오던 어색한 화법도 갖다 치우고 날카롭게 말했다. 클레인스는 짧게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헤더 누나의 말도 랄티아의 말도 어느 쪽이든 틀린 쪽은 없다고 생각해요.”
“…….”
“그냥 서로의 상황과 입장이 다른 것뿐이겠죠.”
클레인스는 거의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치만… 싸우지는 마세요.”
그 말에 랄티아는 약간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 ‘또 저 무책임한 평화 지론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번에는 왠지 소년과 말을 나눌 기운마저 쭉 빠진 기분이었다. 랄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클레인스를 응시하다가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엎어진 랄티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대체 그게 뭐였을까? 뭔가 이상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헤더는 이해할 수 없고, 클레인스도 가깝기보다 먼 사람 같고, 유일한 안식처인 언니는 위태롭고, 주변은 사람이든 사회든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랄티아는 미약한 공포가 발목을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해서 계획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던 것이 너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살아가는 것이 바닷길과 닮았다고 하시더라.’
랄티아는 문득 로트렐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람이 살며 가야 하는 길은 바다 아래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지. 사는 건 파도에 흔들리고 풍랑에 휘청이며,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수없이 길을 찾으려 애쓰는 일이라고 하시더라.’
랄티아는 그때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래서?’ 로트렐리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서 난 매번 서툰 항해사가 되어 옳은 길이 어딘지 헤매고 있어.’
랄티아는 문득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옳은… 옳은 길? 그게 다 뭐야. 자신은 애초에 옳은 것보다 쉬운 것을 택하는 사람이다. 자신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들 옳은 것보다 쉬운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난 나쁘지 않아. 랄티아는 오히려 자신이 궁지에 몰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틀린 자각도 아니다. 그녀는 실제로 궁지에 몰려있다.
게다가 최근엔 이상한 게 날 따라다니는 것 같아, 언니. 랄티아는 속으로 웅얼거리며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것… 소의 뿔 같은 것이 달린 존재……. 그것이 말했었지. ‘아주 흥미로워.’ 그 말을 듣는 순간 랄티아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그것에게 빨려 들어가 흡수되는 것만 같은 감각.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것에게 완전히 뒤섞여 사라지는, 아니, 전혀 다른 무언가로 남아버리는 것만 같은 감각.
그 감각과 함께 복잡한 이념과 생각이 충돌하고 뒤섞인다. 대지 위에서, 랄티아는 그 뒤섞이는 혼합의 흐름을 피하고자 한 겹 이불의 방어막을 두르고 웅크렸다.
괴이쩍은 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