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03)
바다새와 늑대 (302)화(303/347)
#146
화
나는 고민하는 기색으로 발카를 떠올렸다.
「난 네가… 날 믿어주면 좋겠어.」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을 떠올리면 당장 내가 발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눈앞의 이들에게 말을 하기에도 좀 그랬다. 나는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가 있긴 하지만, 좀 개인적인 일이라서. 발카 얘기를 너희랑 나눈 걸 발카가 알면 별로 안 좋아할걸.”
“오. 그럼 어쩔 수 없지.”
키이엘로와 도멤은 내 말에 깔끔하게 화두에서 손을 뗐다. 대신 그들은 열심히 알이 상한 옥수수를 골라내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솔직히 우리가 어른이 됐다지만 가족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도멤의 말에 키이엘로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잠시 헤맸다. 이런 주제가 등장한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조금 어색하고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 달리 둘은 한가롭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나는 얼핏 평화로울 정도인 풍경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의 침묵 틈으로 키이엘로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지 못하니까 더 그리운 것 같기도 해. 현실에 있을 수 없으니까 좀처럼 지긋지긋해질 수가 없는 거지.”
사실 나는 어머니와 있을 때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도 그분이 그리우니까. 그의 말에 나와 도멤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도멤이 말했다.
“솔직히 나도, 만약 가족이 지금 있다면 가끔 귀찮아하기도 했을걸?”
아버지도 도미나도 둘 다 손이 어지간히 가야지. 조용하게 맺어진 말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내 가족들을 떠올렸다. 어릴 적 돌아가신 탓에 미처 그에 관한 환상이 벗겨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 박제된 아버지와, 다투기도 다투고 밉기도 미웠으나 끝내 명예롭고 사랑했던 어머니와… 귀찮고 성가셨지만 어쨌든 귀엽고 사랑했던 동생들에 관해.
“그러네….”
나는 짤막하게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깨닫는 것이다. 설령 다투고 지긋지긋해지고 힘들더라도 온전한 가족이 있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었는지. 공교롭게도 그들이 너무 정답고 평범한 가족들이었던 탓이다. 그들이 주는 부담의 무게가 지나치게 압도적이지 않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탓이다.
“그리울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아버지의 일에 휘둘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내 상태와, 상황과, 목표에 관해 명확히 인지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아버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전처럼 죄책감이 가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키이엘로 말대로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해 갈무리해야 했다.
…나는 그 섬은 정말 지긋지긋하고 경멸스럽지만, 적어도 그 섬에서의 가족들은 정말로 그리웠다. 그건 가족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렇게 조용히 있었다.
* * *
그리고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을 단 한 사람은 지금 딱 죽을 맛이었다.
‘이 망할 동물들을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건데?’
우투그루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어깨에 내려앉은 묵직한 바다새의 무게와 팔목을 감고 있는 검은 뱀의 옥죄는 힘을 느꼈다. 그는 최대한 동물들을 무시하며 제 할 일을 했다. 여기에 그 하얀 뱀까지 있었더라면 그는 정말로 참지 못하고 로트렐리와 도멤을 찾아가 각자에게 동물들을 얼굴에 내던져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간, 너는 꽤 외롭게 자랐구나.』
그래서 우투그루는 갑작스레 간드가 입을 열었어도 그것을 무시해버릴 정도가 되었다. 인지하고 무시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일과 생각에 매몰되어 간드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자 검은 뱀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인간, 듣고 있나? 너는 원래 이렇게 외롭지 않을 운명이야.』
“이건 또 뭐야? 도멤 녀석 이런 것도 챙겨왔어?”
우투그루는 물자가 담긴 상자를 대강 살피다가 교묘하게 숨겨진 날붙이들을 보았다. 화약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도멤 성격에 이런 걸 굳이 말 안 하고 숨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있는지 모르고 가져온 건가? 홀로 웅얼거리는 우투그루는 유감스럽게도 세계의 뱀을 두 번씩 무시한 인간이 되었다. 발카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약간 딱하다는 눈으로 간드를 힐끔거렸다.
간드는 눈만 끔뻑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가여운 인간, 메흐의 힘과 가깝지 않았더라면 제 삶을 마저 살았을 터인데.』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이번 역시 우투그루는 간드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이제 혼자 중얼거리는 것도 멈춘 채 일에 몰두한 상태였다. 간드는 이쯤 되자 오기가 생겼다.
『인간아, 너는 이들과 휘말린 죄로 무엇 하나 손에 쥐지 못한 채 미진하게 끝나게 될 것이다.』
“뭐?”
약간 크게 꺼낸 말에 그제야 우투그루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검은 뱀은 짧게 만족감을 느낀 직후 아차 했다. 일개 인간이 제 말을 못 들었다고 심술이 치미는 것을 보면 세계의 뱀 역시 초월자들처럼 오랜 세월 속에 마모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우투그루는 간드의 말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의 반응은 이랬다.
“뭔 또 헛소리야?”
『…….』
세계의 뱀이 옆에 있는 탓에 평소처럼 우투그루에게 닿지 못할 넋두리도 하지 못하던 발카는 질린다는 얼굴로 날아 선반 위에 앉았다. 그러자 검은 뱀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말 그대로다. 네가 만약 온전한 네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멀리로 떠나는 게 좋을 게다.』
“그러니까 뭔 헛소리냐고.”
우투그루로서는 속 터지는 소리였다.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브레딕을 찾아야 이 망할 녀석들과 깔끔하게 손 털고 떠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우투그루는 신랄한 말투로 간드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누구는 좋아서 여기에서 죽치고 있는 줄 알아? 나도 내 친구 찾으면 이 녀석들하고 계속 같이 있을 이유는 없어. 그때는 너희 세계의 뱀이 로트렐리와 그 따까리들을 데리고 무슨 딴따라 춤을 추는 내 알 바 아니라고.”
『그런 말이 아냐. 깊게 연관되기 전에 떠나라는 거지.』
“그러니까 나도 브레딕만 찾으면 뜰 거라고.”
물론 키이엘로와만 있었다면 모를까 우투그루가 로트렐리 일행과 함께 지내는 게 몸서리날 정도로 싫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간드의 말은 좀 뜬금없을 정도였다. 우투그루는 물자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그래, 도멤은 생각 외로 자신과 별로 안 맞는 녀석이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놈이지. 로트렐리는 생각보다 어울리기 쉽고 타인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 지내는 게 어렵지도 않았고 말이다.
물론 키이엘로는 논외였다. 잠시 뚱한 얼굴로 키이엘로의 잘난 낯짝을 떠올린 우투그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간드의 말을 무시했다. 이미 세계의 뱀이니 뭐니 하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좀 말려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로트렐리나 도멤 성격에 다른 사람도 아닌 우투그루가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하며 떠나려고 한다면 굳이 붙잡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어, 잘 가라, 건강하고.’ 이런 식으로 안녕을 빌어주면 또 모를까.
그리고 키이엘로 녀석은……. 우투그루는 짧게 생각하고는 괜히 선반을 노려보았다. 그 새끼는 자신이 있든 말든 아무 신경 안 쓰겠지. 혹은 저가 떠난다고 하면 오히려 두 손 들고 기뻐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우투그루는 혀를 쯧 찼다. 그것을 보던 간드가 말했다.
『너는 인연을 좀처럼 저버리지 못하는 자로군.』
“뭐야? 브레딕만 찾으면 뜬다는 소리는 헛으로 들었어?”
『너는 가련한 자로다. 너를 봐주지 않는 이들에게도 너무 많은 마음을 내준다. 그것이 너에게 독이 되어 너는 결국 어떤 인연도 붙잡지 못하고 살아가겠구나.』
간드의 어투는 정말 불쌍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했으나 우투그루의 속을 긁어놓기엔 충분했다. 우투그루는 불쾌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제 팔뚝에서 간드를 잡아떼어냈다. 그의 손아귀에 우악스럽게 머리가 잡혔으나 간드는 딱히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우투그루는 검은 뱀을 흘기며 을렀다.
“고매하신 세계의 뱀이 통찰력도 좋군, 그래. 근데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되겠냐? 네가 나에 대해 대체 뭘 아는데?”
간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혀만 날름거렸다. 우투그루는 혀를 차고 대충 뱀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마저 물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간드에게 발카가 말을 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