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07)
바다새와 늑대 (306)화(307/347)
#150
화
“그때 저는 처음으로 삶을 뒤덮는 분노가 뭔지 알았어요.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죽고, 저는 눈이 그나마 치료되기 전까진 앞을 아예 보지 못했죠.”
클레인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우홉피아주가 습격한 말로틴을 찾아온 검은바다에서, 유일하게 그런 저를 발견하고 돌봐준 게 하몬이에요. 로트 누나가 랄티아에게 중요한 것처럼 하몬은 제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
“아마 내가 헤더 누나처럼 혁명단과 검은바다 일 사이에서 망설일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저는 무조건 하몬을 선택할 거예요.”
“왜요?”
“그런 질문은 이상하네요.”
랄티아의 물음에 클레인스는 고개만 기울였다.
“혁명단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엔 하몬과 같은 사람도 포함이죠. 코앞의 소중한 사람을 포기하면서 혁명단에 가담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해요.”
“…헤더는 그러려는 것 같던 데도요?”
랄티아의 묘하게 불퉁한 말에 클레인스는 어깨만 으쓱였다.
“헤더 누나의 소중한 사람은 이미 다들 죽었잖아요. 헤더 누나는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어요.”
그에 랄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클레인스는 주전자를 챙겨 일어난 채 느리게 걸음을 떼며 말했다.
“지금이야 하몬의 상황도 검은바다의 상황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고 있지만, 전 기회가 된다면 하몬, 그 아저씨와 함께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목적이 없는 것 같다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클레인스는 그렇게 말한 뒤 미련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걸음을 옮겼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가 층계참으로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있는 랄티아에게 클레인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다 말고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늦지 않게 이만 주무세요.”
짤막하게 말한 뒤 클레인스는 정말로 제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랄티아는 심통 난 얼굴로 무릎에 덮어둔 책의 표지만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원적이고 평화롭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형용 못 할 언짢음과 불편함이 감도는 밤이었다.
* * *
아침이 밝자 브레딕과 네토르는 계획했던 대로 인쇄소로 향했다. 인쇄소 겸 잡지사를 운영하는 곳이었으나 실상은 몰래 혁명단의 소식지도 집필하는 곳이었다. 아직까지 제국의 눈에 걸려 폐업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세라무티라는 위치적인 특색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더는 아침 일찍 나와서 일행들에게 자신은 혁명단에 먼저 가서 에퀘야를 돕기로 했다는 의사를 밝혔다. 브레딕은 좀 걱정하는 기색이었고, 클레인스는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랄티아는 마땅찮은 얼굴이었으나 어쨌든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라고 했다. 헤더는 그런 랄티아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결국 별다른 말 없이 혁명단의 본거지로 향했다. 랄티아와 클레인스는 내내 쓰던 마담 릴리의 건물에서 있었다.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로트렐리가 정보를 접하고 찾아오기까지는 최고 일주일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 랄티아와 일행들은 아무도 모르는 이 작은 건물에서 지내는 편이 안전했다. 에퀘야가 협력을 약속한 만큼, 정보의 공개로 인해 이어지는 관심과 공격은 혁명단을 향할 테니까 말이다. 어차피 제국과 전쟁을 선포한다면 로트렐리의 정보가 더해지든 아니든 혁명단은 대대적으로 조명을 받게 되어 있으니 랄티아는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은 추호도 없었다.
여름이 무르익은 세라무티의 아침이었다.
검은바다가 세라무티에 정박했다. 클루스도는 긴장감이 감도는 세라무티를 살피며 항구에 배를 대고, 함저 구역에 처박아뒀던 하몬을 끌고 나오라고 명령했다. 선원들의 손에 이끌려 갑판으로 나온 하몬은 팔을 뒤로 묶인 채 지친 낯을 들었다. 그는 클루스도의 냉막한 얼굴과 마주치자 냅다 그의 발치로 침을 뱉었다. 그것에 클루스도의 인상이 찌푸려지든 말든, 하몬은 태연하다 못해 거만한 동작으로 주변을 에둘러 보고는 말했다.
“세라무티로군. 제국에 곧장 닿기엔 쫄렸던 모양이지?”
“그렇게 큰소리치는 것도 얼마 가지 않을 걸세. 세라무티에선 마장석 기구를 보충할 수 있을 거거든.”
“어디 해 보시지 그래.”
클루스도의 으름장에도 하몬은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호쾌하게 웃었다.
“어디 나를 당장 죽여봐! 마장석 기구도 보충하고, 눈엣가시 같던 나도 죽이고, 얼마나 좋아? 그러나 못 하겠지, 클루스도, 멍청한 새끼.”
하몬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페데르만도 못한 놈이다. 페데르 그놈은 배짱이라도 컸지, 네놈은 소심하고 우둔한 주제에 제가 뭐라도 되는 양 굴고 있을 뿐이야. 기껏 한다는 게 페데르 그 망할 놈의 흉내라는 것도 추잡하기 그지없다.”
그의 악담에 클루스도는 참지 못하고 하몬을 후려갈겼다. 하몬은 억 소리를 내며 휘청였지만, 여전히 형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클루스도는 하몬을 찢을 것처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리며 선원들에게 말했다.
“돛대에 묶어둬라. 일이 끝나면 처형한다.”
하몬은 돛대에 묶이면서도 그다지 두려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야 하몬은 정세를 잘 알았다. 세라무티는 뒤숭숭한 상황이고,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갈등 탓에 물가 역시 불안정할 것이 분명했다. 설사 내부가 점차 안정되고 있다고 해도 큰 물자가 돌고는 있을까? 마장석 기구 같은 것을 팔 정도로 물량이 풀려 있겠는가? 만약 구매할 수 있다고 해도 여러 다리를 건너 알게 된 브로커를 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클루스도는 그런 식으로 믿는 구석이 있어 세라무티로 온 것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하몬은 함저 구역에만 처박혀 있기엔 아까운 인재였으나 클루스도는 그것을 몰랐다. 한편 베제는 프라세와 요한과 함께 갑판에 있었다. 하몬을 보며 불편한 얼굴을 하던 베제는 고민했다. 일전에 하몬이 짐을 꾸리고 있다가 육지에 정박하면 달아나라고 한 적이 있지. 그것이 지금일까? 요한은 마뜩잖은 얼굴로 클루스도를 보고 있었다. 그가 베제에게 말했다.
“느 혹시라도 허튼짓할 거면 그러지 말고 쪼매 참아라.”
베제는 낮은 요한의 말에 슬쩍 그를 보았다.
“하지만 하몬은…….”
“나야 물론 하몬보다 보는 눈은 떨어지지만 서도, 클루스도 아재는 이제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다야. 한 번 허투루 걸리믄 그땐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는 겨.”
요한의 말에 베제는 프라세의 어깨만 가만히 쥐었다. 베제는 눈만 질끈 감고 이내 프라세를 보았다. 기회가 있다면…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럼 프라세는… 사과나무 섬에 있는 프로데나 지제나 누님은……. 베제의 고뇌가 깊어지는 가운데, 세라무티에서는 그런 검은바다를 발견한 자들이 있었다.
“……저것들 뭐야?”
“왜 그러니, 로지.”
“아, 아니, 릴리 이모. 잠시만요.”
마담 릴리와 세라무티의 항구 시장에 나와 있던 로지안나는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스카프를 머리 위로 둘러맸다. 두 여자에게 가격을 깎으라고 오만소리를 다 듣던 상인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로지안나가 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해적선인가? 셀리팜의 배로는 안 보이는데. 그들의 원군일지도 모르겠어.”
“저딴 놈이랑 지금 누굴!”
로지안나는 울컥해서 외쳤으나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배는 분명 검은바다의 것이었다. 그간 봐왔던 해적선을 착각할 리가 없었다. 로지안나는 검은바다에서 누가 내리거나 이변이 있지 않은가 살피다가 문득 랄티아를 떠올렸다. 혁명단의 선전포고가 오늘이란 것도 말이다. 게다가 군도로 가 있던 셀리팜 역시 로지안나로부터 소식을 접하고 세라무티로 오는 중이었다.
“오……, 안 돼, 안 돼…….”
로지안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들고 있던 과일을 가판 위로 내던졌다. 그에 상인이 무어라 불만을 토하는 것을 듣지도 않은 채로 로지안나가 마담 릴리에게 말했다.
“이모, 저 잠깐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괜찮죠?”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니? 저 배 때문에?”
“네.”
로지안나는 사뭇 비장한 얼굴을 했다. 서둘러 랄티아 일행에게 저 사실을 알려야 했다.
“검은바다의 배예요.”
그 말에 마담 릴리의 얼굴도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들은 과일을 사려던 것을 관두고 서둘러 랄티아가 있는 건물을 향해 뛰었다. 마담 릴리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며 로지안나에게 물었다.
“검은바다가 왜 이곳에 오지?”
“저희야 모를 일이죠.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이렇게 오다니….”
“랄티아의 정보가 퍼지면 곧장 위험해지겠구나.”
“그렇죠. 생각보다 위협이 더 가까이에서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들이 상정한 위협이라곤 끽해야 세라무티에 숨어있던 제국의 정보원들이나 혁명단을 싫어하는 제삼의 세력들이었다. 검은바다는 어디 멀리에 있을 것이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나다니……. 로지안나와 마담 릴리는 서둘러 랄티아 일행의 건물에 도착했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클레인스였다.
“두 분 괜찮아요? 누가 이렇게 급하게 뛰어오나 했어요.”
이미 둘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특정한 그가 안으로 들어오라며 비켜주자, 로지안나는 가타부타 않고 들어가 곧장 랄티아를 찾았다. 랄티아는 라운지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로지안나와 마담 릴리의 다급한 기색에 약간 긴장을 느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검은바다가 왔어.”
“네?”
로지안나가 서둘러 말했다.
“아직 혁명단의 선전포고도 시작되지 않았고, 네 정보는 풀리지 않았어. 그런데도 세라무티에 지금 정박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