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14)
바다새와 늑대 (313)화(314/347)
#157
화
랄티아는 때에 맞지 않게 벙쪘다. 헤더가 완전히 자신들에게 벗어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랄티아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요?”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도 너에게 방해물만 될 거야.”
“언제는 우리 언니한테만 의지하더니 이제 와서요? 이제는 혁명단에 의지하기로 했어요?”
랄티아는 그것이 어림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랄티아는 헤더가 아주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아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직은’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반면 헤더는 랄티아의 말에 한숨을 쉬고 말했다.
“지금 이럴 시간 없어, 랄티아. 난 갈 거야. 너도 내가 방해라고 했잖아. 나도 거기에 동의해. 그러니까…….”
“……진심인 거네요, 그렇죠?”
랄티아는 왠지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항상 자신과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헤더가 떠난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간 헤더가 떠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더는 완전히 떠나려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와 함께 광장으로 세라무티의 자경단, 전사들과 소식을 들은 혁명 단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전쟁보다는 투쟁에 어울리는 함성이 광장을 울렸다.
현실감 없이 멍해진 생각 위로 랄티아가 무심코 내뱉었다.
“…그동안 미안해요, 헤더.”
생뚱맞고 영문 모를 사과였다. 랄티아의 말에 헤더는 의아한 얼굴로 소녀를 돌아보았다. 랄티아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전 헤더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해도 제 언니가 살길 바랐어요. 그런 사람 어찌 되든 좋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가 당장이라도, 서둘러 죽어서 더 늦지 않게 언니에게 진주가 오길 바랐어요. 헤더는 제게 방해물이 되지 못해요. 전 헤더가 인질로 잡혔어도 상관없이 저와 언니를 위해 행동했을 거예요.”
랄티아는 묘한 희열이 마치 오한처럼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여태 헤더를 거북해하고 타박하던 것은 자신의 허물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내내 말하지 못해서. 그 죄책감과, 그럼에도 언니 탓에 헤더가 자신을 버릴 리 없다는 어떤 확신 때문에.
랄티아는 놀란 표정을 한 헤더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신뢰 없이 행동하기 때문이에요. 나부터 다른 사람을 배신할 생각으로 가득한데 다른 사람을 순순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랄티아가 처음으로 거의 날것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헤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헤더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헤더는 그저 랄티아를 바라보고 있다가 짧게 물었다.
“그게 미안한 거야?”
“……네.”
“괜찮아.”
너무 순순히 대꾸하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랄티아는 홱 소리가 나도록 얼굴을 들어 올렸다. 헤더는 랄티아가 그랬듯 일부분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사실 나도 그랬어.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동안……. 모르는 척 로트의 진주를 아버지에게 먹일까, 그냥 확 그래 버릴까 하고 수도 없이 생각했지.”
“하지만…….”
“맞아. 안 그랬지.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다가 죽어갈 때도……. 무수히 생각했어. 그냥…, 그냥 당장 일어나서, 그가 입을 벌리고 삼킬 수 있을 때 그걸 먹여버리자고. 근데 그러지 못했어…….”
헤더의 얼굴이 점차 슬픔에 일그러졌다. 목구멍 너머로 꾹 삼키는 것은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울음이었다.
“옳은 일을 했는데, 그때의 선택이 잘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운데, 동시에…… 동시에 너무 후회돼. 왜 그때 움직이지 못했지? 아니면 적어도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해야 했는데.”
난 아마 그때까지도 아빠가 영영 사라진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나 봐. 랄티아는 흔들리는 낯으로 헤더를 바라보았다. 헤더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한 방울 넘친 감정은 바닥으로 스며들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헤더의 얼굴에는 넘칠 만큼 찰랑이는 서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헤더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쓰다듬던 아버지의 손에 제 눈물이 닿았을까, 그것이 가장 두렵고 후회가 되었다. 싸우고 다투다 끝내 어색하고 서먹해진 채 끝난 시간이 지독하게 후회되었다. 같이 있을 시간을 늘릴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맞이할 깊은 잠을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헤더는 그것을 인정할 줄 알았다.
“우리는 서로 미안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떳떳해. 난 로트의 진주를 뺏어서 아버지에게 주지 않았고, 너는 초조한 와중에도 우리 아버지를 서둘러 죽이거나 와서 어깃장 놓거나 하지 않고 나와 그가 이별할 수 있게 기다려줬어.”
그래서 난 우리가 굳이 서로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되고, 또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헤더의 말에 랄티아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용 불가능한 일들을 모두 스쳐 지나가듯 회피한 소녀에게 헤더의 말은 피할 수 없는 파도였다.
기묘한 예감이 든다. 로트렐리로만 이루어진 자신에게 또 다른 것들이 도달하고 자신은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예감. 그런 랄티아를 두고 헤더는 후련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네 행동이 그 어떤 배반도 아니라는 걸 알아, 랄티아. 우린 그저 소중한 사람이 떠나가지 않길 바란 것뿐이야.”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겹쳐진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옳은 선택을 했어. 그리고 넌 아직 미숙했고, 난 그걸 이해할 줄 알아.”
난 그거면 됐어. 그것만으로 괜찮아. 헤더의 말에 랄티아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헤더는…… 그녀에게 완전한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더는 서로에게 걸릴 것 없는 말끔한 상태가 되어, 어떠한 미련 한 줌 없이 ‘좋았다’, 하고 말한 뒤 등을 돌려 나아갈 수 있는 작별을 말이다. 랄티아와 마주 보며 헤더가 입을 열었다.
“전에…… 네가 나에게 그랬잖아. 나만의 선택을 하라고. 난 지금 그걸 한 거야.”
랄티아는 자신이 정말로 의지할 곳 없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시늉을 하는 것이, 주변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불안으로 스스로를 떠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랄티아는 어떠한 커다란 불신이 자신을 꿰뚫고 있음을 느꼈다. 빛이 닿으면 자신을 살필 수 있듯이, 새삼스럽게 말이다.
너무나 익숙한 빛이었다. 랄티아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찬란함을 이미 알았다. 자신의 길을 택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의 눈부심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어김없이 랄티아를 떠나간다는 것도……. 자신을 떠나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기 남을 거야. 굳어진 랄티아의 뺨을 닦아준 헤더는 단단하고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아. 이제 나는 검은바다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에 살 거야.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는 네가 가야 하는 길을 가. 헤더의 말에 랄티아는 마치 누군가 등을 떠민 것처럼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랄티아는 헤더를 떠나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갔다. 헤더가 자신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은 랄티아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메여 있으리라 여긴 것은 오히려 랄티아였던 것이다.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가? 얼마나 가소롭고 알량한 생각이었던가? 이곳은 배 위가 아니라 육지였다. 수많은 사람이 서로 스치며 살아가는, 그 움직임에 끼쳐오는 운김이 해류처럼 퍼진 곳이었다. 랄티아는 헤더와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자신과 그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로트렐리에게 묶여서 있는 그런 모습이.
하지만 그것은 랄티아뿐이었고……. 랄티아는 자신도 무언가를 느끼고 선택할 때라는 것을 체감한다. 사실 그녀가 만나온 모두가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그러했다. 그녀는 우홉피아주의 포로들이 제게 퍼붓던 악담, 하몬의 이야기, 브레딕의 이야기, 클레인스의 이야기, 클루스도의 이야기……, 그런 것들을 차례로 떠올린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심코 서로를 짓밟고 만다. 서로를 보듬지 못하고 밀쳐낸다. 랄티아는 그것이 싫어서 도망친 것이다. 이성, 논리, 냉소, 그런 것들로 무장한 채, 감정과 교류를 담아 다가오는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부정하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척 경계해서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애썼다.
거대한 불신과 의심은 어느 순간 맹신이 된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필코 상처입힐 것이라는 맹신, 세상에 제대로 된 믿음과 선의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는 맹신. 이 순간, 랄티아는 자신의 맹신이 배반당했음에도 그렇게 서럽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명백한 오답이라고 결론 내렸음에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결국 그 불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들은 냉소로 둘러싼 무장이 아니다. 그저 매 순간, 모두가 옳은 선택을 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모든 순간의 옳은 선택이다.
분노가 치밀어도, 슬프고 서러워도, 특별히 사랑하거나 그러지 않아도, 옳은 것을 택하는 것.
그저 옳은 것을 택하는 것.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고 우리를 가장 구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랄티아는 차오른 숨을 헐떡이면서도 먼 곳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광장을 벗어날 즈음, 클레인스가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오며 무어라 외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미 한계치까지 움직인 랄티아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향하는 길목에 그가 있는 것이, 자신이 뒤로하고 나온 곳엔 헤더가 있는 것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