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15)
바다새와 늑대 (314)화(315/347)
#158
화
‘아버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바닷길이래.’
옛적 로트렐리의 목소리가 랄티아의 심장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마치 항해하는 배를 닮았고, 가야 하는 길은 바다 아래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지. 사는 건 파도에 흔들리고 풍랑에 휘청이며,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수없이 길을 찾으려 애쓰는 일이라고 하시더라.’
랄티아는 그때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래서?’ 로트렐리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서 난 매번 서툰 항해사가 되어 옳은 길이 어딘지 헤매고 있어.’
난 옳은 길을 찾아야 해.
랄티아는 마지막으로 헤더를 돌아보았다. 혁명의 인파에 뒤섞여 헤더의 금발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머리칼과 같은 햇빛이 눈이 아프도록 랄티아를 내리비추고 있었다. 우는 항해사는 눈물을 거두고 끝내 혁명가가 되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들의 딸은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녀도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눈물짓던 항해사는 항로를 찾아냈을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이다. 랄티아는 순간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흐려지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파도 위를 헤치며 내달리는 것 같았다. 랄티아는 종아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왔으나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헤더, 당신은 당신의 선택이 어디까지 데려갈지 알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만약 나도 항해사가 될 수 있다면, 내 선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요?
그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랄티아의 손을 클레인스가 붙잡았다. 랄티아는 흐트러진 주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커다랗게 뜨인 은색 눈동자를 보았다.
‘두고 봐요, 틀렸다고 말해줄 거니까.’
찰나의 순간, 랄티아는 그것이 푸른색으로도 보인다고 생각했다. 조각나버린 바다의 주인이 스몄다 사라진 궤적처럼, 푸른빛이 산란하는 태양의 광채처럼 클레인스의 눈동자에서 파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랄티아만의 사정이었다. 클레인스는 곧장 랄티아를 부축했다.
“큰일이에요, 지금 테드 그 인간뿐만 아니라 검은바다에게도 우리의 존재가……. 잠깐, 호흡이 왜 이래요? 울었어요?”
설마 달리는 게 힘들어서? 클레인스의 당황과 황당이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내저은 랄티아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중요한 거 아니야. …헤더는 혁명단에 남겠대. 우리와 같이 가지 않겠대.”
“…그 누나는 그럴 것 같긴 했어요.”
클레인스는 그렇게 말하고 팔을 벌렸다. 소년 역시 내내 더위 속을 내달린 탓에 목덜미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말했다.
“그럼, 달리기 힘들어 보이는데 탑승할래요?”
랄티아는 가타부타 않고 그에게 안겼다. 의외로 순순한 태도를 단순히 급박한 상황 탓이라고 생각한 클레인스는 뒤에서 다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검은바다의 선원을 피해 달렸다. 광장 주변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랄티아는 아직도 미묘한 감각에 사로잡혀 폭음과 장병기의 마찰음이 포말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 스쳐 지나가는 인파 사이로 랄티아는 예의 그 소머리 같은 인영을 보았다.
랄티아는 저절로 움츠러들며 클레인스의 옷깃을 바투 잡았다. 쉼 없이 뛰고, 물결처럼 우르르 각자의 길로 향하는 인파 사이에서 그 인영만은 꼿꼿이, 그리고 선명히 랄티아를 쫓아오고 있었다.
「흥미로워.」
또 그 소리였다. 대체 저게 뭐지? 랄티아의 눈이 공포로 물들 즈음, 클레인스가 헉, 하며 다급하게 멈춰 섰다. 그것과 동시에 뒤에서 쫓아오던 인영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랄티아는 다시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까 허공을 바라보다가 클레인스가 아예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에 의아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검은바다의 선원들을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클레인스에게 어디로 도망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주변을 보니 항구 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랄티아는 한여름인데도 스산하게 올라오는 오한을 느꼈다. 클레인스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선원들 사이에서 클루스도가 앞으로 나왔다. 그의 손아귀에는 테드가 붙들려 있었다. 꼴을 보니 이곳저곳 구른 것처럼 보였으나 랄티아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클레인스는 낭패라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랄티아를 내려줬다. 그리고 그는 검을 빼 들고 앞에 늘어선 이들을 마주했다. 하몬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이곳에서 잡힐 수는 없었다. 클루스도가 말했다.
“너희가 뭔가를 꾸미다가 어그러졌다는 건 알겠다.”
“…….”
“마땅히 갈 곳도 없을 텐데 순순히 따라오는 게 낫지 않겠나?”
“하몬 아저씨는요?”
클레인스의 물음에 클루스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암만 내게 칼을 들이밀었어도 그는 내 친우야. 어떻게 죽이겠어?”
“속지 마, 널 꼬시려는 수작이야.”
랄티아가 곧장 뒤에서 속닥였다. 클레인스도 클루스도의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에 속을 정도로 어리진 않았다. 클레인스는 클루스도가 있는 곳을 노려보며 말했다.
“순순히 잡히진 않을 거예요.”
“유감이군.”
클루스도가 허리춤에서 곡도를 빼 들었다. 클레인스는 지지 않겠다는 듯 검을 고쳐 쥐었으나, 랄티아는 다시금 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망한 것 같다. 우리는 아마 잡혀가게 될 것이다. 네토르와 베제는 아직도 인쇄소인가? 마담 릴리와 로지안나는 생각보다 별일 아닌 것 때문에, 혹은 우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일 때문에 혁명단에 정보를 전하기 전 행선지를 틀었을 것이다. 아까 극단분자들이 테러를 자행했던 것을 보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우리는 여기서 검은바다에게 잡힐 것이다. 랄티아는 확신에 가깝게 생각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불현듯 떠오르는 확언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클레인스가 반항하게 되면 그는 크게 다칠 것이다. 그 결과는 바꿀 수 있나? 랄티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네가 행동한다면. 내면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그럼 잡힌 뒤 상황은 최악이 아닐까? 랄티아는 다시금 자문했다. 이번에도 어떤 예감이 속삭였다. 글쎄, 어쩌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지도. 내면이 다시금 이죽였다. ‘우리의 바다’를 불러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는 랄티아의 의식 밖에서 웅얼거렸다.
정말 흥미로워.
랄티아는 곧장 클레인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부딪힐 듯 팽팽해졌던 공기가 다른 의미로 돌변했다. 클레인스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클루스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랄티아는 주머니 가방 안에 있는 피스톨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클루스도를 그것으로 쏘고 도주하기, 퍽 괜찮은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왠지 그렇게 되면 더 최악을 경험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랄티아가 말했다.
“투항할게요. 나와 클레인스는 순순히 따라가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뭐지?”
“하몬을 살려둬요.”
랄티아의 말에 클레인스가 퍼뜩 놀라며 랄티아를 보았다. 소년의 얼굴이 일순 애처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랄티아의 말에 클루스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랄티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우라서 죽이기 싫다고 했으면서… 아니나 다를까 거짓말이었죠? 나쁜 어른이네요.”
그쪽 아들들은 댁이 그러는 거 알아서 도망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랄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패륜적인 말을 거론해서 클루스도의 심기를 건드는 것은 지금으로선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클루스도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들고 흐음, 하며 침음을 흘렸다. 그때 클루스도가 역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우리에게 순순히 오겠다고 하는 거지?”
“싫으면 말고요.”
랄티아는 가타부타 않고 피스톨을 꺼내 클루스도를 겨눴다. 그 위력을 똑똑히 아는 검은바다의 선원들이 움찔 물러났다. 테드만이 랄티아가 뭘 하는 건지 몰라 ‘저런 고물이 총이라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루스도는 재보는 것 같은 눈으로 랄티아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랄티아가 순순히 검은바다로 들어오는 게 나쁠 것이 없었다. 클루스도가 손짓하자 선원들이 쭈뼛거리다가 랄티아와 클레인스를 붙잡았다.
그에 테드가 서둘러 외쳤다.
“저, 저는 놔줘요! 부탁이에요!”
그는 아까 전의 테러에서 잔해에 깔리는 것은 가까스로 피했으나 그대로 검은바다에게 잡힌 상황이었다. 테드는 붙들린 채 싹싹 빌었다.
“애시포드 남작에게는 함구하겠습니다. 애초에 이제 랄티아를 잡았으니 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부탁입니다…….”
테드를 응시하던 클루스도는 어깨만 으쓱였다.
“어차피 우리는 곧 애시포드 남작에게 향할 걸세. 랄티아를 보이고, 몸값을 두둑하게 받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 잠깐 우리와 있는 것뿐이야.”
“아뇨, 아뇨. 저는 제국군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랄티아는 자기가 세라무티에 있었다고 광고한 상황이잖습니까. 제가 말을 잘 전해두겠습니다. 랄티아가 독단으로 돌발행동을 했을 뿐 검은바다는 애시포드 남작에게 속인 것이 일절 없다고…….”
그 말에 클루스도는 선원들을 보았다. 선원들은 이번의 이 ‘한탕’이 어떻게 되든 클루스도에게 전부 내맡긴 모양이었다. 그에 클루스도는 문득 디겔과 우투그루가 그리웠다. 그들이 자신의 곁에 있었다면 그럴듯한 조언을 해줬을 것이다. 결국 클루스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의 몸이 된 테드는 얼른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냅다 도망갔다. 그것을 보며 랄티아는 어쩐지 검은바다에 붙잡힌 것이 정말로 자신에게는 그다지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스톨을 뺏기면서, 랄티아는 생각했다. 일단 우리에게 하몬이 줬던 돈의 상당 수준은 브레딕에게 있지. 그리고 테드는 말한 것과 달리 의리가 없는 놈이니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거짓말이든 뭐든 불사할 것이고, 클루스도를 위해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일개 해적보다는 귀족에게 붙는 게 더 합리적이긴 하지. 하몬의 생존은… 반쯤은 보장되었다. 사실 클루스도가 ‘아까 약속한 건 뻥이란다’ 하고 하몬을 죽여버려도 랄티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불시에 랄티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슨 확신이었지, 그건? 미래에 확실함이라곤 하나도 없다. 하물며 랄티아는 수많은 단서가 있어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성격이다. 그런데도 아무 근거 없이 당장 검은바다에게 붙잡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다니?
“이제 어쩔 거죠?”
그때 클레인스가 랄티아에게 속삭였다. 그에 랄티아는 그를 묵묵히 보다가 말했다.
“나도 몰라.”
“…….”
클레인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으나 랄티아는 그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테러와 전투 탓에 항구는 비교적 한산했고, 민간인들은 그들을 보고 다소간의 경악만 할 뿐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어 보였다. 광장에서부터 시작된 테러와 맞물린 항쟁은 항구에 웬 해적이 있는 것보다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랄티아와 클레인스는 선원들에게 붙잡혀 검은바다로 끌려갔다. 함성과 비명, 고함이 아우성치는 세라무티에서 검은 배가 유유히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