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16)
바다새와 늑대 (315)화(316/347)
#159
화
게슈베르송은 중부 바다의 한가운데에 있는 섬이었다. 제국과의 거리는 백려보다는 멀지만 케르헤티보다는 가까운 편이었다. 백려가 제국에 심한 내정 간섭을 받음과 동시에 사람과 자원, 자본을 비롯해서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탈당한다면 케르헤티는 군사적인 지배를 받으며 섬의 특산물을 거의 모조리 빼앗겼다. 그에 반해 게슈베르송은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 제국이 그들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은 ‘경제’였다.
제국은 그들에게 막대한 채무를 짊어지게 하고, 시장 경제부터 시작해 수많은 상단과 나아가 국가부채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제국은 백려에 통치 수단과 교통수단을 설치하고 케르헤티에 군사시설을 확충하는 것과 달리 게슈베르송에는 공장을 설치했다. 공장의 관리인은 게슈베르송의 고위인사거나 제국인이었고, 직원은 게슈베르송의 평범한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국에서 지은 공장에 의해 섬의 환경이 파괴되고 하늘이 까맣게 가려졌으나 돈은 매우 잘 벌렸다. 게슈베르송에서 만들어진 공산품들은 다른 섬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어느 정도 제국의 강매가 있기에 가능한 결과였으나, 어쨌든 그 특이성 때문에 게슈베르송의 소위 ‘윗사람’들은 대부분 친 제국의 기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게슈베르송은 어딜 보아도 혁명단이 점거한 불온한 섬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 나라의 왕족이 대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동부 바다와 서부 바다의 혁명단과 달리 칼란투는 정말로 못 배워먹은 서민이 깃발을 든 경우였다.
게슈베르송이 혁명단에 의해 점거된 것은 공장 직원들의 노동자 보호를 위한 시위가 발단이었다. 규칙적인 출퇴근, 정확히 주는 주급, 보장되는 휴식 시간, 그런 사소한 것을 위해 모인 이들을 향한 제국의 강압적인 제압이 불난 곳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한가한 생각이라니.”
칼란투는 혀를 차며 세운의 서신을 째려보았다. 칼란투는 한쪽 얼굴에 주욱 그어진 흉터가 있었는데, 그레고리 허스튼, 그러니까 애시포드 남작과의 대치 중 얻은 상처였다. 칼란투는 자신의 얼굴 한쪽을 다쳤다고는 하나 애시포드 역시 눈 한쪽을 잃었으니 대등했다고 생각하곤 했다.
“마녀와 안면이 있으니 심하게 대하지 말아 달라고? 하!”
칼란투는 야멸차게 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얇은 코트를 쥐어 어깨에 걸쳤다. 듬성듬성하게 짧은, 물 빠진 은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긴 머리가 내려와 허리춤까지 늘어져 흔들렸다. 칼란투가 문을 열고 나가자 화약과 매연의 냄새가 가득한 게슈베르송의 정경이 펼쳐졌다. 세운의 서신을 옆의 고철 통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쑤셔 넣은 그녀는 으르렁거리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운 이 자식은 제국군 사이에서도 아는 얼굴이 보이면 봐주자고 할 참인가? 우습기 짝이 없어.”
그러나 그렇게 말한 것치고 칼란투는 깊게 신뢰하는 이들 한정으로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얼굴에 길게 내려온 흉터를 긁적이며 칼란투가 웅얼거렸다.
“뭐, 그 마녀가 우리 편에 서준다고 한다면 굳이 처리할 필요까지는 없겠지.”
하지만 에퀘야가 전한 예언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칼란투는 수배된 마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어르고 달래서 우리 편으로 순순히 회유가 된다면 칼란투도 딱히 그녀를 적으로 삼진 않을 것이니 말이다. 마땅찮은 기색으로 끙 소리를 낸 칼란투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순찰을 돌 시간이었다.
* * *
내가 호되게 엄포를 놓은 이후로, 세계의 뱀은 더 이상 예전 같은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기쁘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꺼림칙했다. 그래서 할 말을 다 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그간의 이야기들이 정말로 전부 자신들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나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었나? 그러나 내 마음이 어떻든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가고, 배는 파도를 헤치고 나아간다.
게슈베르송에 배가 닿자마자 나는 곧장 정박했다. 꼭두새벽에 도착한 시간 탓에 도멤과 키이엘로는 퍽 피곤한 얼굴이었다. 반면 우투그루는 언제나와 같은 낯빛이었다. 나는 새벽에 도착할 것을 알고 미리 잠을 자뒀다고는 하지만, 우투그루 저 녀석은 왜 저렇게 멀쩡한 건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적당히 짐을 챙기고 하선을 준비하며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어떻게 평범한 사람으로 위장할 것인가’가 주된 화두였다.
“웃기는 고민이지만, 로트 넌 눈을 가리면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까? 딱 수배서 같은 조합 사이에 눈을 가린 사람이라니, 너무 티 나잖아.”
“키이엘로 얼굴을 망가뜨리는 건?”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좋은 생각인 거야? 나는 잠시 황당했다. 우투그루는 자신이 이 사이에 껴서 견원지간 같은 키이엘로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해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키이엘로를 제외한 우리 셋은 숙연해졌다. 솔직히 키이엘로는 얼굴을 가려도 특유의 분위기 탓에 눈에 들어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결국 우투그루가 말했다.
“그냥 누구 할 것 없이 전부 가리는 게 나아. 괜히 누구는 보여주고 누구는 가려서 의심을 받는 것보단 총체적으로 수상한 집단이 되는 거지. 게슈베르송이라면 그럭저럭 알아서 여러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지 않겠어?”
“그것도 그럴듯하네.”
내가 순순히 동의했음에도 우투그루는 묘하게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에 나는 눈썹만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봐?”
“우리가 어떤 대비를 해도 대체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 적이 없다는 걸 방금 네 대답으로 상기해서.”
“어쩌란 거야.”
“그래, 그리고 아무런 대비 없이 그냥 갔다가 곧장 걸리는 것과 나름 시간이 지난 뒤에 걸리는 건 차이가 크잖아.”
도멤이 나름 격려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나는 역으로 희망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결국 결론적으론 걸린다는 거잖아. 어쨌거나 우리는 돈을 약간 챙기고 얇은 로브로 무장한 채 배에서 내렸다. 발카는 작은 벌새 크기로 변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시도 때도 없이 불평을 쏟아낼 바다새는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뭍에 닿자 갑판에서 쬐던 햇빛과는 차원이 다른 강렬한 더위가 끼쳐왔다. 대번에 키이엘로가 질색을 했다.
“날이 정말 무더워졌네.”
“여름이니까.”
게슈베르송은 지평선이나 산의 능선보다 먼저 굴뚝들이 보였다. 시꺼먼 연기를 뱉어 내는 굴뚝들은 드높았으나, 몇몇 굴뚝을 제외한 것들은 아무것도 내뿜지 않고 우뚝 솟아만 있었다. 그것을 보고 도멤이 의아한 듯 말했다.
“오늘이 휴일이던가?”
“파업을 하는 중인 거야.”
키이엘로가 그렇게 말하며 후드 아래로 손부채질을 했다.
“게슈베르송의 공장 대부분은 제국이 지었다고 들었어. 산도 밭도 죄다 밀어버리고 우후죽순 지은 거라더라.”
“그렇게 공장을 지어서 뭘 해?”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다 만들어. 무기도 만들고, 기성품도 만들고……. 그리고 수출하고, 게슈베르송 사람들까지도 그걸 사게 만드는 거야. 실상을 따지자면 제국에게만 돈이 돌아가는 구조인 거지.”
“순 양아치에 날강도 놈들이네.”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소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제국으로 가기 위해 게슈베르송에 들른 이유는 게슈베르송이 제국의 간섭에 부정적인 곳이라는 것도 있지만 총기도 있었다. 화약 무기는 제국에서 독점하고 있긴 하지만 게슈베르송에서 화약을 제조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키이엘로가 말한 것이다. 하기야, 제국이 암만 화약 무기를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비싼 값이나마 포탄이나 화약 자체는 돌아다니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검은바다든 우홉피아주든 해적질을 하기 꽤 고단해졌을 것이 뻔했다. 중요한 무기 공장을 게슈베르송에 뒀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구식 화기라도 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의 경험으로 우리는 창검보다는 멀리서 확실하게 제국군을 조질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나와 도멤 외에는 원거리 무기에 처참한 능력치를 가진 키이엘로와 우투그루 탓에 그다지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총이 없더라도 제국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그런 계산이 들어 온 것이었다.
…그나저나 저 사이 안 좋은 형제 둘이 나란히 활엔 젬병이라니. 활 쏘는 능력도 유전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일행들 사이에서 걸음을 옮겼다. 도멤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도 제국 덕을 보는 게 하나 있긴 해. 육지 정세가 마냥 평화로웠다면 무기를 차고 다니는 게 이상하게 보였겠지.”
“그 덕에 시도 때도 없이 거리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는데 말은 잘한다.”
“우리가 무기를 숨겨야 하는 일이 없단 측면에서 말한 거지!”
우투그루의 퉁명스러운 말에 도멤이 우, 소리를 내며 야유했다. 나는 둘의 만담을 흘려들으며 키이엘로에게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