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4)
바다새와 늑대 (33)화(34/347)
#33화
“언니, 너무 탓하지 마.”
랄티아가 말했다. 랄티아는 언제나처럼 옆구리에 책을 끼우고 또렷한 회색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랄티아를 보다가 고개를 다시 숙이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랄티아는 한숨을 쉬고 내 옆에 앉았다.
모래사장을 밟는 소리와 함께 치맛자락을 정리해 쭈그려 앉은 랄티아는 내게 말했다.
“언니 탓이 아냐.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알아.”
“기다리지도 마. 지금 마을에서 언니를 보고 다들 수군거려.”
“상관없어.”
내 짧은 대답에 랄티아는 하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올 확률은 0에 가까워. 언니 자신을 좀 챙겨! 바다에도 나가고!”
“바다에 나가라고?”
나는 눈을 치켜뜨고 랄티아를 노려보았다. 내 매서운 기색에 움찔 몸을 떤 랄티아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라 쓰러진 나무를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나무통이 얇은 쿠키처럼 쪼개졌다.
“그래, 넌 내 머리통에 바다 아니면 뱃놀이만 들어있는 줄 아는 거지.”
“언니…….”
“넌 네 계산이 틀리리란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는구나. 그렇지?”
나는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리며 사납게 말했다. 귀 열고 똑똑히 잘 들어, 랄티아. 나는 이제 더는, 더는…….
더는 이 바다가.
* * *
나는 눈을 번뜩 떴다. 차가운 물살이 뺨을 누르며 지나갔다.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오로라의 등에서 검을 뽑기 전에 끌려다녀야 했다. 무심결에 벌어지려 한 입을 다른 손으로 누르며 나는 숨을 참고 주변을 훑었다. 밤바다의 안이라 그런지 어두웠지만, 흐릿하게 빛나는 괴이 덕에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다 나는 내가 검을 꽂아 넣었던 괴이에게 붙어있던 밀가루가 떨어진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것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아니, 다른 괴이들도 모두 바다 안에서는 형태가 보였다. 마치 불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것 같은 모습의 괴이들은 저마다 바다에서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물결이 오로라의 색을 띠며 희미하게 명멸했다.
나는 그 모습에 미약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바다에 귀속되었으면서도 바다에 있는 것을 괴로워했다. 괴이들의 모습을 보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괴이는 어린 생명이 바다에서 죽었을 때 길을 잃고 생기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괴이들의 사이로 간혹 뱃사람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들이 보였다. 왜 어른의 모습도 있는 거지……? 그들도 괴이처럼 불투명한 유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발버둥 치는 어린 괴이들과 다르게 그들은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한참을 괴이들을 살피던 나는 나를 끌고 다니던 괴이가 멈춘 것을 느꼈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것의 등에서 드디어 검을 뽑아낸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멀리 떨어지진 않았지만, 꽤 깊이 들어와 버렸는지 배의 밑판이 머리 위에 있었다.
위로 올라가려 발장구를 치는데, 돌연 서늘한 것이 내 발목을 휘감았다. 깜짝 놀라 밑을 본 나는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뱃사람 옷을 입은 남자 괴이가 내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슬쩍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가는 공기를 황급히 손으로 막은 나는 발을 흔들었다.
「이봐.」
“!”
괴이가 말을 했다! 게다가 옹알이하는 것처럼 소리만 지르고 칭얼대는 어린 괴이와 다르게 그는 확실하게 사람의 말을 했다. 그것은 나를 보며―사실 괴이의 눈동자는 조각상의 그것처럼 반질반질했지만 왜인지 날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을 이었다.
「너 우리를 알지.」
뭐래, 알 리가 있나. 나는 발을 마구 흔들어 그것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괴이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암만 내가 물속에서 숨을 오래 쉴 자신이 있다 해도 이제 슬슬 무리였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괴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 우리를 알지, 우리를 알고 있지, 길을 잃은 우리를 알지…….」
모른다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때 위에서 무언가 풍덩 빠지더니 빠르게 내려왔다. 도르래가 달린 밧줄이었다. 나는 그것을 빠르게 잡아챘다. 그리고 당기자, 밧줄이 서둘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직도 내 발에 괴이가 매달려있는 것과, 다 올라가기 전에 숨이 막히리란 것이었다.
결국 밧줄에 매달려 올라가던 도중 입에서 공기가 터져 나왔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 힘을 다해 밧줄을 꽉 잡았다. 괴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보고 비슷한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자기들도 비슷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다행히 물을 삼키기 전에 나는 수면 밖으로 빠져나왔다. 드디어 입에서 공기 방울이 아닌 흰 입김이 나오자 나는 얼굴에서 물기를 닦고 놓칠세라 밧줄을 틀어쥐었다.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요란하게 콜록거리자 위쪽에서 기겁한 도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트! 괜찮아?”
“빨리 끌어올려!”
나는 대꾸할 수도 없이 계속해서 콜록이고 있었다. 밧줄을 당기던 브레딕과 베제가 인상을 구겼다. 왜 이리 무거워? 그 말에 키이엘로가 황급히 달려와 대신 밧줄을 잡아당겼다. 과연 둘이 올리던 것보다 빠르게 위로 올라왔지만, 키이엘로도 의아한 것 같았다.
“뭐지? 이건 너무 무거운데…….”
나는 그제야 기침하던 것을 멈추고 아래를 보았다. 물 밖으로 나온 괴이는 매달려있는 상태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리를 흔들자 도멤이 기겁했다. 로트, 가만히 있어! 다시 빠질지도 몰라! 나는 소리쳤다.
“괴이가 내 다리에 매달려있어! 밀가루를 뿌려!”
내가 그렇게 외쳤을 때였다. 돌연 분노한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왔다.
「너도 우리를 버리려 하는구나!」
그 소리에 일순 오한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동시에 수면에서 괴이들이 일제히 튀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외쳤다.
“발카!”
내 생각을 알아챈 발카가 밀가루가 든 자루를 잡고 높이 날아올라 바다 쪽에 뿌렸다. 그러자 괴이들이 다시 드러났다. 내 다리에 붙어있는 괴이를 제외하고도 선체에 붙어 씩씩대는 괴이들과 바다에서 나오는 괴이들이 일제히 발카를 보았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발카를 향해 뛰어오른 괴이를 텐이 물어 챘다. 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완전히 문 텐이 옆으로 괴이를 던지며 컹 짖었다.
『키이엘로! 그 녀석 빨리 잡아 올려!』
상황만 아니었다면 내가 물고기냐고 화를 냈겠지만, 키이엘로 마저 식은땀을 흘리며 밧줄을 당기고 있자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점점 다리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마치 바윗덩이가 다리에 매달린 것 같았다. 수면이 들끓는 것처럼 불안하게 물결쳤다. 내가 아픔에 악 소리를 내자 괴이와 싸우던 도멤이 달려와 난간에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로트, 왜 그래!”
“내 다리에 죄다 매달렸어! 망할, 키이엘로, 그만해!”
“안 돼, 너 다시 바다에 빠질 거야!”
키이엘로가 내 말에 고함을 쳤다. 그때 무언가가 날아와 내 다리에 매달린 괴이를 맞췄다. 보통 화살보다는 짧고 두꺼운 것이 퍽 박히자 괴이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우수수 떨어지는 것에 잔잔하던 수면이 첨벙청범 물보라가 쳤다.
그제야 제힘을 쓰게 된 키이엘로가 빠르게 나를 올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던 것을 피고 위를 보았다. 쇠뇌? 그리고 나는 곧 안경에 반사된 빛과 함께 숨을 몰아쉬고 있는 베제를 보았다. 동시에 키이엘로가 이제 밧줄 대신 내 손을 잡고 난간 위로 올렸다.
도멤이 서둘러 내 다리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잡혔던 다리가 조금 저릿했지만 부러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대신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것에 몸을 떨기도 전에 괴이가 덤벼들었다.
날카로운 낫 같은 팔을 쳐내고 피하는데, 몸을 피한 곳으로 볼트가 날아들어 괴이를 꿰뚫었다. 괴이가 쇠를 긁는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슬쩍 도멤과 키이엘로, 베제를 살폈다. 그들은 이번에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검을 꺼내 들었다. 도멤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있었다.
“로, 로트, 나는 정말로, 네가 죽는 줄 알고…….”
“내가 왜 죽어?”
내 말에 도멤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쓴 것을 삼키듯 말했다. 너하고 한 마지막 대화가 다투는 것이었다면 난 나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조금 황당해지고 말았다. 그게 다툰 것이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코끝이 조금 찡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도멤 저 녀석은 진짜 물러빠진 놈이었다.
괴이는 아직도 갑판 위로 뛰어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오는 줄 알았던 그들이 밀가루를 뒤집어쓰니 바다에서 조용히 뛰어오르는 것이 잘 보였다. 그때 베제가 쏜 쇠뇌의 볼트에 맞은 괴이를 브레딕이 가르는 것이 보였다. 괴이는 비명을 지르더니 우는 것 같은 얼굴로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나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투명하고 끔찍했던 외관과는 다르게, 그것이 부서진 가루는 마치 산산이 깨진 별의 잔해 같았다. 그것을 보고 괴이를 해치울 수 있음에 고취된 해적들이 그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냈다. 나는 돌연 넋을 놓고 일견 평화로울 정도로 난장판에서 그걸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난간에 괴이의 손이 올라왔다. 나는 흠칫 놀라 그것을 찌르려다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다른 괴이와 다르게 그것은 내 다리를 잡았던 어른 모습의 괴이처럼 사람 손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굴을 내밀었을 때 나는 피가 얼어붙는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깨달아버렸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뜯어보듯 그것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입술을 떨며 읊조렸다.
“……아빠?”
내가 작게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칼이 그것의 이마에 박혀 들었다. 괴이를 찌른 네토르가 난간에서 그것을 떨어트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넋 빼고 뭐 하는 짓이야?”
나는 그에게 쏘아붙일 정신도 없었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것이 있던 난간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토르는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괴이가 어린 것만 있는 게 아닌 거지?
왜 아버지의 모습을 한 괴이가 있는 거지…….
클루스도가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로라가 물러간다! 그 소리에 해적들은 총력을 가해서 남은 괴이들을 공격해댔다. 쇠뇌로 공격을 하던 베제는 괴이들이 멀어졌음에도 그들을 겨누고 쏘려 했다. 나는 그것을 막았다.
“관둬. 물러가잖아.”
“또 올지도 몰라! 기껏 눈에 보이게 되었는데…….”
“그러다 괜히 자극한 꼴이 되어서 되돌아올지도 몰라.”
베제는 그제야 쇠뇌를 내리고 혀를 찼다. 그래. 너도 추워 보이는데……. 나는 더 듣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머리가 온통 어지러웠다. 넋이 바다에서 길을 잃으면 괴이가 된다고 했다. 어린 생명뿐만이 아니라 어른도 바다에서 죽어 길을 잃을 수 있는 걸까? 너무 먼 바다로 나가 버려서 길을 잃은 건가?
정말 아버지도 그렇게 길을 잃고 괴이가 된 걸까? 그게 정말 아빠였을까?
그때 어깨 위로 코트가 덮였다. 키이엘로였다. 그는 내게 춥지 않냐고 묻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이상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 로트?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발카가 자루는 어디에 둔 건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드디어 끝났네. 걱정했어, 로트.』
“그래…….”
『왜 그래, 상태가 안 좋아?』
아니, 난 괜찮아. 나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가 전혀 믿는 얼굴이 아닌 키이엘로와 발카를 보고 침을 삼켰다. 우리는 전부 밀가루를 뒤집어써서 지저분한 상태였다. 괜찮다고 말할 상태가 아니긴 했다.
나는 다시 잔잔해진 바다를 보았다. 아까와 똑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이젠 그렇게 감명 깊지도 시선을 사로잡지도 않았다. 나는 오히려 바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아빠는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를 삼켰던 바다가 이번엔 그를 헤매게 만들고 있나? 왜 넋이 바다에서 길을 잃는가? 그게 정말 아빠였어도 끔찍했지만, 만약 아빠 흉내를 내는 것이라면 더더욱 끔찍했다.
발카와 만났던 바다, 내가 사랑했던 바다, 내가 염원했던 바다는 언제나 신기루와도 같았다.
나는 이제 더는, 더는…….
“……지친다.”
발카가 의아하게 나를 보았다. 나는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내가 발카와 대화하는지 알 수 있는 거리에 누군가가 있는지 살피는 것은 무심코 잊은 채 중얼거렸다.
“나는 역시 바다가 싫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