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5)
바다새와 늑대 (34)화(35/347)
#34화
오로라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칼날 바람이 지나간 것 같았다. 해적들은 저마다 한숨 돌리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돛이 찢어진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이거 수선 조가 또 고생하겠는데. 그 말대로 흠집이 난 갑판이나 찢어진 돛을 유리 바다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수리하려면 힘들 것이 분명했다.
도멤은 정신없었던 전투가 지나간 것에 감사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몇 시간 동안 휘두른 창 때문에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는 손뼉을 두어 번 치는 것으로 그것을 떨쳐내고 등에 창을 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엔 로트와 키이엘로, 그리고 그들의 새와 늑대가 있었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도멤은 생각했다. 로트는 우리에게 무관심할 수밖에 없어. 같이 지낸 지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니고. 그러니 베제가 어찌 되든 내버려 두라는 말에 혼자 로트에게 실망한 것은 옳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은 대놓고 로트에게 뭐라 하지도 않았던 데다가, 홀로 꽁해졌을 뿐이었다.
로트에게 다시 말을 했을 때 그가 지었던 ‘우리가 언제 다툰 적이 있니’하는 얼굴에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적어도 실수한 건 아니구나……. 도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로 다가가 로트에게 물었다.
“괜찮아, 로트? 다친 곳은 없어?”
“……응.”
로트는 넋을 뺀 얼굴로 대답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도멤을 보았다가 발카를 보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키이엘로를 보았다. 로트는 다시 한번 난 괜찮아, 라고 하더니 도멤과 키이엘로가 보기엔 전혀 괜찮지 않은 새파란 얼굴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난간에서 손을 뗀 로트는 문득 제 팔을 살피더니 눈썹을 휠 뿐이었다. 키이엘로도 로트의 팔을 보더니 뭔가 할 말 많은 얼굴을 했으나, 그는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이 순간 셋은 모두 비슷했을 것이다. 각자 묻고 싶은 것은 있었으나 모두 입을 다물었다.
* * *
“베제, 괜찮아?”
베제가 다쳤다는 도멤의 말에 지저분한 몸을 씻고 우리 셋이 간 곳은 새로 들어온 의사가 있는 곳이었다. 짙은 녹색의 철릭을 걸친 이세운이 도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 다친 사람이 없는 것 같군! 그 말에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나는 다친 곳이 없는데…….
분명 괴이에게 팔뚝을 베였었는데, 그 상처는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워낙 정신이 없던 전투였어서 그런지 언제부터 상처가 없어졌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도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엎드려 앓는 소리를 내던 베제가 손을 들어 보였다.
“난 괜찮아. 아마도…….”
그러나 그 말을 세운이 곧장 반박했다.
“옆구리에 어깨에 다리에 안 베인 곳이 없소. 우라질 활쟁이면 이런 전투에는 끼면 안 되는 것 모르오?”
“쇠뇌거든요? 그리고 잘 싸울 수 있거든요?”
나는 칭얼거리는 베제를 한심하다는 듯 한 번 보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그때 문이 조금 열리더니 프라세가 고개를 내밀었다. 베제를 보러온 모양이었다. 프라세는 모여 있는 우리를 보고 조금 움츠러들었다가 후다닥 베제에게 달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도멤은 코밑을 쓱 문지르며 웃었다. 녀석, 착하기도 하지. 나는 그런 도멤을 힐끗 보았다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형, 괜찮아요?”
“물론이지! 이런 건 가렵지도 않아.”
그러나 베제는 세운이 상처 난 곳을 쿡 찌르자 펄쩍 뛰어오르는 원숭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아오! 아, 의사 양반! 프라세는 대번에 얼굴이 희게 질려서 세운과 베제를 번갈아 보았다. 키이엘로가 웃으며 말했다.
“가렵지야 않겠지.”
베제는 아니거든, 하고 괜스레 뚱기치다가 프라세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쓰다듬었다. 내 생각엔 프라세는 근접전에 소질이 있어. 근데 내가 맡게 되었으니 별수 없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과연, 하고 생각했다. 베제는 쇠뇌를 주로 다루는 것 같으니 프라세에게 근접전을 알려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몸소 오로라와 싸우는 것에 끼어든 거겠지.
“다른 사람에게 알려달라고 하면 되지 않아?”
“프라세를 맡게 된 게 나고, 이 배에서 가장 친한 것도 나야.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람한테 가라고 하면 어색할 거 아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프라세를 맡고 싶다고. 베제는 안경을 셔츠에 대충 닦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쇠뇌도 다루다가 여차하면 그거로 후려칠 때도 있어. 근접전 전문인 놈들만큼은 안 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베제는 그렇게 꿍얼거리다가 안경을 쓰고 말했다.
“그런데 로트 어째 기운이 없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나? 그러자 프라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한 괴이와 그 밖의 나이가 들어 보였던 것들이 떠올랐지만 입을 다물었다. 괜히 말해서 해결될 것도 없는데,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쳐서 그런 거야. 내 말에 눈을 굴리던 도멤이 대뜸 물었다. 밤바다라도 보러 갈래? 나는 그 말에 이번엔 좀 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조용히 프라세의 머리를 쓰다듬던 키이엘로가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로라의 괴이가 바다 쪽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아, 맞아. 깜짝 놀랐어! 여태 그놈들이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거였다니. 그리고 밀가루를 뿌릴 생각을 한 것도 기발했어.”
화제가 바뀐 것이 반가운 듯 도멤이 말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형태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 내 말은, 흩어지지 않는 뚜렷한 몸체 말이야.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나는 천천히 내가 보았던 단서를 늘어놓았다.
“일단 갑판이 패이던 것.”
“그게 왜?”
도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뭐 단일적으로 있었다면 단서라고 할 것은 못 되었다. 칼바람에 베이는 일도 있는 것이 바다니까. 대신 우투그루가 들고 있던 횃불에서 보였던 어렴풋한 투명한 엇갈림이 그것들에게 몸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게 몇 번 보이니까, 못해도 그것들이 공격하는 순간에는 형태를 갖추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그들에게 베였을 때 남았던 물기로 말하자면 뚜렷한 단서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며 형체가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물기를 머금고 있겠는가? 그리고 오로라에 대한 정보가 더해졌다. 그들은 이른바 바다에 속한 것들이다. 그런데 바다를 벗어나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그러니까. 생뚱맞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 모든 결론으로 그들에게 형태가 있다면 밀가루 따위를 뿌려 모습을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하늘로 뿌려봐야 그들은 바다에서 오는 것이니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였다. 내 말에 세운이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총명한지고!
세운의 뒤에서 어느새 조용히 서 있던 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멤도 웃으며 말했다. 그 정신없는 때에 그런 걸 생각하다니 머리 좋다, 로트. 너는 바다에 빠지기까지 했잖아. 그 말에 나는 조금 낯간지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칭찬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티를 낼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까스로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부드럽게 웃고 있던 도멤이 돌연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그런데 발목이 멀쩡하다고?”
“뭐, 뭐야.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옆에 있던 키이엘로가 지레 놀라서 슬쩍 그와 떨어졌다. 나도 갑자기 딴사람처럼 구는 도멤의 태도에 속으로 깜짝 놀라서 어깨를 굳혔다. 그러나 도멤이 뭐라고 더 말을 하기 전에, 세운이 펄펄 뛰며 나를 보았다.
“뭐요! 다쳤는데 가만히 있는 거였소? 미련하게 굴지 말고 빨리 내보시오!”
“아니, 아니……. 도멤이 과민반응하는 거예요. 난 괜찮아.”
진짜야! 내가 덧붙였으나 그다지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베제는 자기가 제일 많이 다친 주제에 콧대를 높이 세우며 떵떵거렸다. 왜? 자신 있으면 의사에게 내보여봐! 도멤은 꾸준하게 나에게 크게 다친 게 아니어도 의사가 있는 김에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고, 키이엘로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심통 난 얼굴로 바지를 조금 걷어 괴이가 붙잡고 늘어졌던 발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나를 포함해 선실의 모두가 헉 소리를 내었다. 발목에 푸른 멍이 손가락 모양으로 든 것도 모자라 주변까지 붉게 물들어있었다.
세운이 기겁을 하며 어디선가 하얀 막자사발을 들고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막자를 두드려 약초를 빻아댔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미친 거 아니오?! 나는 그와 거의 비슷한 톤으로 외쳤다.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프라세는 거의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형, 뼈는 괜찮아요? 애석하게도 이쯤 되자 나는 내 감각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도멤이 그런 내 등짝을 철썩 때렸다.
“야! 봐봐, 내가 뭐랬어!”
“악! 미쳐, 등짝에도 멍들겠어!”
“그래, 도멤. 좀 더 살살 쳤어야지.”
키이엘로가 슬쩍 내 편을 들며 끼어들자 도멤은 속 터진다는 듯 가슴을 탕탕 때렸다. 살살 쳐서 말을 듣냐?! 무슨 요한이나 할 법한 말을 잘도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등으로 손을 돌려 문지르다가 발목을 보았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나까지 한쪽 침상에 앉아 발목에 약초와 간단한 붕대를 감고 쉬라는 처방을 받아야 했다. 가만히 그걸 보던 키이엘로가 막 떠오른 것을 말한 것처럼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의사가 생겨서 다행이야.”
“응, 그렇지. 세운, 고맙게 생각해요.”
도멤이 맞장구를 치며 세운에게 인사하자 세운은 대충 만류하듯 손을 흔들곤 도구들을 정리할 뿐이었다. 오로라 때문에 선체에 입은 피해를 모두 수리하기 전까지는 천천히 배를 몰 계획일 거라며 잡다하게 대화를 하던 도중 나는 몰려오는 피곤함을 느꼈다.
밤 중 내내 피 터지게 싸우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숨을 돌리게 되었으니 지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내가 침상에 몸을 늘어뜨리자 프라세는 간이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물었다. 형, 졸려요? 나는 어어, 하고 대강 대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오늘은 여기서 다 같이 잘까? 베제가 은근한 투로 묻는 것에 도멤이 혀를 찼다. 무슨 파자마 파티해? 그러더니 도멤이 다시 이어 말했다. 난 좋아. 키이엘로의 얼굴이 물이끼가 낀 수조에 고개를 박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 멍청한 남자 셋은 기어이 침상을 끌어다 자리를 만들어 누웠다.
진심인가……. 나는 혀를 끌끌 찼으나,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세운과 원은 우리를 보고 허허롭게 웃더니 자기 둘만 의료실의 안에 딸린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베제가 프라세에게 이쪽에 누우라며 손짓했다. 조용히 있던 발카는 불쾌한 듯 내 머리맡에 앉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다 큰 놈들이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기에 나는 속으로 조용히 발카에게 유감을 표했다. 드러누운 채로 할 것도 없어서 한동안 잡담을 하던 우리는 동시에 피곤해져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키이엘로가 말했다. 우리 이제 조용히 하고 자자. 그 말에 그래, 하고 한목소리로 말한 우리 다섯 명은 눈을 감았다.
“…야, 근데 오늘 오로라 좀 이상하지 않았냐?”
“자자고 했잖아!”
베제가 꺼낸 말에 도멤이 꽥 소리쳤다. 프라세는 웃음이 터져서 큭큭 웃고 있었고, 키이엘로와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아니아니! 오늘 오로라 정말 이상하잖아! 원래 안 이런다며! 베제는 항변하듯 이건 꽤 흥미로운 이야기야, 하고 강조했지만 키이엘로가 그것을 뚝 끊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지 말자…….”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사실 나는 베제가 그렇게 떠드는 것이 퍽 기꺼웠다. 피곤했지만 잠들기엔 어째 꺼림칙했다. 차라리 베제와 도멤이 수다를 더 떨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조금 더 시답잖게 떠든 뒤에, 그들은 내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곧 잘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베제와 도멤은 오히려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그들에게 굳이 입을 열어 시끄럽게 굴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몸을 고쳐 누웠다.
조용해진 틈에 금방 잠들었는지, 프라세가 색색 소리를 내며 조용해지자 베제는 숨소리처럼 작게 속삭였다. 프라세 잔다. 그 말에 도멤도 속삭였다. 우리도 자자, 피곤했잖아…….
그리고 정말로 넓은 선실 안은 조용해졌다. 나는 배가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한 고요 안에서 잡념이 몰아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오로라의 괴이는 무엇일까. 내 아버지는 길을 잃었을까?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까?
결국 영원히 바다에 삼켜져 버린 걸까.
해적들과 웃고 떠들 때는 찌를 틈도 없던 머릿속이 진흙탕처럼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몸을 돌려 벽을 보고 누웠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기 힘들었다. 뒤늦은 외로움 같기도 했고 허전함 같기도 했으며, 옅은 상실감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한참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만 되풀이하던 머리는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