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7)
바다새와 늑대 (36)화(37/347)
#36화
키이엘로는 거의 넋을 놓고 있었고, 도멤은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거의 그들과 비슷하게 멍하니 있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물었다.
“넌 우투그루 친구잖아.”
“그러니까 네토르가 의심하지 않을걸.”
브레딕은 연신 가늘게 웃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퍽 친절한 말투였다. 도멤이 다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냐, 우리가 말하는 책만 골라서 빌리면 충분히 의심할 수 있어.”
“다른 책들도 같이 빌리면 돼.”
아주 청산유수였다! 나와 도멤의 말이 막히자,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린 키이엘로가 물었다.
“왜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러자 뜻밖에, 브레딕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도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우투그루 친구인 네가 우리를 도울 리가 없잖아……. 나는 그 말에 이 상황이 좀 유치하지 않은가 생각했다가, 어차피 나이를 불문하고 서로 싫어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유치해질 수 있음을 상기했다.
그러나 도멤의 말에 브레딕이 바로 부정했다.
“막말로 만약 그랬으면 키이엘로를 엿 먹일 방법을 생각하겠지, 로트의 문제에 끼어들진 않을 거야.”
그야 그렇지……. 우투그루는 키이엘로를 유난히 싫어했고 브레딕에게는 친근했으며, 다른 선원들에게는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그건 나나 도멤이라고 딱히 다르진 않았다. 키이엘로는 대놓고 자신에게 엿을 먹였을 거라 말하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있었다.
너네 진짜 어떻게 되어 먹은 관계냐,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아낸 나는 브레딕을 보았다.
“그래서 왜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게, 사실은, 미안. 네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거든.”
브레딕은 양심적으로 고백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안타까웠지만 동시에 나도 흥미가 생긴 거야……. 그 말에 도멤이 인상을 찡그렸다. 넌 이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워할 수가 있어? 그러자 브레딕은 면목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거야…….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브레딕과 내가 크게 친한 관계도 아니고, 그처럼 학구열이 있다면 누구나 흥미로워할 법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은은하게 떨떠름한 기분은 있었지만, 굳이 트집 잡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브레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네토르한테 평소에 책을 빌린 적이 있어? 그 편집증 자식이 의심하지 않을 만한 방법을 알아?”
“쉬워. 일단 난 그에게 다른 책을 빌린 적이 있고, 너희랑 딱히 접점이 있지도 않은 입장이고, 심지어는 우투그루랑 친하지. 그리고 그 책만 빌리는 게 아니라 다른 책도 같이 빌릴 거야. 네토르의 책은 흥미로운 것들이 많거든.”
그 녀석의 책 상자는 아주 보물 상자야. 그 말에 나는 거기까진 말하지 말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섬에 있었을 땐 어머니와 랄티아의 영향으로 거의 작은 도서관 같은 집에 있었다. 불타서 사라졌지만, 어쨌든. 굳이 그 녀석이 좋은 꼴이라는 걸 알아 배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때 키이엘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읽는 곳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 곳에서 읽을 수는 없어. 그 녀석이 지나가다가 볼지도 모르잖아.”
나는 문득 이 상황이 굉장히 본격적으로 ‘네토르의 책 몰래 보기 작전’처럼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모호한 얼굴로 그들에게 아니, 나중에 육지에 닿았을 때 구해보는 건 어때, 하고 뒤늦게 말을 꺼냈으나 남자 셋은 들어먹지 않았다.
이들이 네토르를 엿 먹이는 것에 더 흥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나는 어차피 내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생각에 결국 셋 사이로 끼어들어 말했다.
“의사 양반의 선실은 어때?”
“그거 좋다!”
그들이 무릎을 쳤다. 만약 네토르가 불시에 들어오면 세운의 책인 척 하는 거지. 도멤의 잔꾀에 브레딕이 흥미를 보였다. 그 의사가 책을 많이 갖고 있어? 도멤이 대꾸했다. 그런 것 같던데. 글자는 우리가 쓰는 거랑 좀 달라 보였지만.
그야 제국이 아무리 자기들 문자와 언어를 강요해도 이리저리 흩어진 섬에서 나오는 방언과 자체적으로 변형되는 문자는 막을 수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제국의 압박이 있으니 글자가 달라봤자 눈치로 때려 맞출 수 있는 정도의 변형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정해진 건가? 내 말에 우리는 시선을 맞추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딕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일어나며 작게 말했다. 먼저 가 있어.
나는 슬슬 우리가 거의 첩자 놀이에 빠진 일곱 살짜리 애들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진심인가? 하지만 인제 와서 빠질 수도 없었다. 그래, 괜찮아. 우리끼리만 이러고 놀면 되지, 뭐.
브레딕이 가고 난 뒤 남은 우리 셋은 얼른 세운의 선실로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세운이 아이고, 하며 퍼드득거렸지만 우리는 상관하지 않고 목적부터 말했다.
“세운, 우리 여기서 책 좀 읽어도 될까요?”
“해적이 책도 읽소?”
“비밀작전이거든요!”
“맞아, 비밀작전. 아, 그리고 여차할 때 세운 책 좀 쓸지도 몰라요.”
우리의 말에 세운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설명하기도 전에 브레딕이 문을 열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빼었다가 우리가 있는 것을 보고 으스대는 공작새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들어왔다.
도멤이 구시렁거렸다. 뻐기기는. 우리가 네토르랑 사이만 좋았어도……. 나는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만해, 유치하게 군다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유치하게 굴진 말자. 키이엘로는 브레딕이 품에 가득 안은 책 중 우리가 노리는 책을 빼서 내 앞에 내려두었다.
브레딕이 다른 책은 보이지도 않냐며 볼멘소리를 하다가 책을 책상 한쪽에 우수수 내려놓고 팔을 주물렀다. 책이 꽤 무거웠던 모양이었다. 내가 서둘러 책을 펼치자, 도멤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더니 아까와 달리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오로라 파트를 찾는 거지?”
“응. 거기에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침착하게 종이를 넘기며 생각했다. 적어도 그것이 정말로 아버지였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나아가서, 이 안에 다른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나는 ‘오로라의 괴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보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로 넘기자마자, 나와 키이엘로는 동시에 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해당 목차의 페이지가 모두 뜯겨있었다! 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책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의 키이엘로도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였다. 도멤이 우리 둘의 반응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그래? 설마…….”
“설마 맞아. 이게 그 부분이야. 책장이 뜯겨있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브레딕도 내 말에 벌떡 일어났다. 뭐? 이런 책을 막 뜯다니 미친 거 아냐, 네토르! 이 녀석은 책이 더 걱정이구만. 나는 눈을 굴리고 페이지를 더 넘겨보았다. 그러나 삽화가 아닌 책장은 모조리 뜯겨있는 데다가, 삽화가 있는 페이지의 뒷면은 대부분 역시 삽화였다.
나는 바다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파도에서 사람을 건져내는 삽화를 시큰둥하게 일별하고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이래서야 뭔가를 알아낼 수는 없겠어. 내가 바라는 건 오로라가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이라는 전설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한숨을 쉬며 바다의 주인이 마녀에게 찔리는 삽화를 빤히 노려보고 있는데, 도멤이 말했다. 맞아, 저자가 누구지? 그걸 쓴 게 누군지 기억해둬서 육지에 갔을 때 책을 찾아보자. 그 말에 키이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게 낫겠다.
나는 펼쳐뒀던 곳에 손가락으로 책갈피를 하고―브레딕이 너 책 좀 접해본 티가 난다, 하고 중얼거렸다― 표지를 덮었다. 책의 표지에는 전과 같이 「겨울 바다의 마법」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아래 저자의 이름이 적히는 곳엔 「――갈」이라고 쓰여 있었다.
키이엘로가 완전히 한숨을 쉬며 발치에 앉아 있던 텐을 끌어올려 털을 쓰다듬었다.
“네토르, 치밀한 자식…….”
“이 새끼는 진짜 뭐가 문제지?”
이름이 쓰인 곳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책이 낡기도 했으나 유독 작자에만 손때가 탈 일도 없으니 이건 거의 고의라고 해도 무방했다. 브레딕은 안타깝게 탄식했다. 흥미로운 주제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네.
그 말에 도멤이 넌 눈치 좀 챙기라고 작게 쏘삭이며 브레딕의 발을 밟았다. 그러자 브레딕은 그제야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딱히 네 아버지가 흥미롭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알지? 나는 어련하겠냐는 얼굴로 그를 한 번 일별하고 책갈피 해 둔 책장을 다시 폈다.
오로라의 괴이에 대한 목차는 모두 뜯겨나가 있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삽화와 가장 마지막인 다음 목차와 붙은 페이지였다. 나는 온통 바다가 그려진 삽화를 휙휙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짤막하게 남은 글을 보았다.
「하여, 그 바다를 기다리는 존재는 비단 태초부터 바다의 존재였던 이들뿐만은 아닐 것이다.」
역시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화가 치솟아 책을 던질까 했지만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는지, 키이엘로가 침착하게 말렸다.
“로트, 책 던지지 마. 텐 털 만질래?”
텐이 역정을 냈으나, 그걸 모르는 도멤은 이 틈을 타 슬쩍 텐을 쓰다듬었다.
나는 됐다며 손을 내젓고 책을 완전히 덮어 브레딕에게 넘겼다.
“그 미친 편집증 새끼한테 다시 잘 돌려줘.”
“그래……. 그럴게.”
브레딕은 자신의 흥미를 채우지 못해 아쉬운 것 같았지만 아무렴 크게 손해 본 것은 없으니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때 선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우리는 지레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안도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도멤이 앓는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아, 뭐야 우투그루였잖아……. 잠깐, 우투그루!?”
“뭐야.”
대번에 불퉁하게 대꾸한 우투그루는 우리 세 명을 보았다가 누가 봐도 같이 어울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앉은 브레딕을 보고 눈썹을 휘었다. 그러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느리게 물었다.
“브릭?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어, 그, 아냐……. 잠깐 로트랑 말할 일이 있었어.”
브레딕은 어색하게 일어나 우리에게 눈짓하고는 우투그루에게로 후다닥 향했다. 우투그루는 키이엘로를 불쾌하다는 듯 보다가 나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는 금세 신경을 거뒀다. 나는 의외라는 눈으로 우투그루를 보았다. 저 딱딱한 놈이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다 있네.
우투그루는 클루스도의 일로 왔는지, 세운에게 말을 걸더니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 침착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조금 거북했는지, 키이엘로가 속닥였다. 우리 나가자. 네토르의 책이 멀쩡했다면 읽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지금이야 흐지부지되었으니 굳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별말 얹지 않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도멤이 나에게 작게 말했다. 선장님 상태는 아무래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지진 않았나 봐. 우투그루가 세운과 얘기하는 것을 보자 실감이 확 난다며 고개를 젓는 도멤의 뒤로 키이엘로는 미묘하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나는 키이엘로에게 물었다.
“걱정되진 않아?”
“어? 누구? 아……. 선장님?”
키이엘로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걱정되지……. 하지만 우투그루가 챙기고 있잖아. 그 말에 도멤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야! 그래도 네 아버지잖아! 그 순간 키이엘로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도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었다가 미묘하게 자책감 서린 얼굴이기도 했다.
나는 도멤의 어깨를 잡아 말리고 키이엘로를 향해 말했다.
“뭐,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아무래도 너는, 음, 보통의 상황이랑 다르니까 내가 뭐라고 조언할 수는 없는 것 같고.”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는 키이엘로나 도멤에게 돌연 가족이 괴이로 변해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것 외에도 딱히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비슷한 예로 키이엘로에게 클루스도는 아버지라고는 하나 보아하니 사이는 어색한 것 같고 위치는 사생아니 내가 공감할 수는 없었다.
도멤도 내 말에 그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래도 부모님과 대화하는 건 중요해.”
음, 정설이구만.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와 도멤은 키이엘로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키이엘로는 아차 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의 침묵을 애써 모르는 척하려는 것 같았다.
“가자.”
우리 셋은 조금 어색하게 갑판 아래로 향했다. 나는 동시에 천천히 생각했다. 어쩌면 방금은 우리 셋이 지켜오던 선을 조금 밟아버린 걸지도 몰라. 우리는 항상 서로의 모르는 구석을 굳이 들춰내지 않고 징검다리 건너듯 대해왔다. 나는 숨기는 것이 있어서, 키이엘로는 방어적인 성격 때문에, 도멤은 사려 깊은 태도 때문에.
무엇이 내내 지켜오던 그것을 무심코 건드리게 했는가?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친근해져 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법한 것을 말하고, 꿍꿍이를 꾸미고, 시답잖은 잡담을 하면서 무심결에 서로에게 말을 얹는 것도 거리낌이 없어져 버렸다.
이건 결코 좋지 않아.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건 정말로, 결코 좋지 않은 일이야.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이것을 예전부터 경계했으나 소용이 없는 일임도 역시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노 없는 배처럼 파도에 떠밀려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