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38)
바다새와 늑대 (37)화(38/347)
#37화
돛과 갑판이 모두 수선될 즈음 배는 속도를 높였다. 며칠간 추운 유리 바다에만 머무르며 그림 같은 풍경을 질리도록 보았기 때문에 도멤은 난간에 널린 빨래처럼 늘어져 꿍얼거렸다.
“키이엘로 말이 맞았어. 이 광경도 계속 보니까 질린다…….”
로트는 별말 없이 도멤을 흘끔대고는 갑판 위에 늘어진 자재들을 옮길 뿐이었다. 키이엘로가 보았을 때 로트는 아직도 바다를 바라볼 때면 시선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 금방 시선을 다시 돌려버렸다. 키이엘로는 생각했다. 로트가 일전에 바다가 싫다고 한 것은 아마 아버지의 죽음이 큰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키이엘로는 말수가 조금 줄어든 로트를 생각했다. 로트는 그들과 재미있게 대화를 하다가도 멈춰서 입을 다무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가 그럴 때마다 키이엘로는 로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심코 궁금해지곤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큰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어떤 아버지였는지, 로트는 자신의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좀 징그럽네. 키이엘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도 로트에 관련되면 키이엘로는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해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그건 좀…… 부담스럽고 징그럽지 않은가?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속으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캐내려 한다는 것은 말이다.
키이엘로는 텐의 털만 주물주물거렸다. 늑대는 뚱하고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참아준다는 듯 얌전히 키이엘로의 손에 털가죽을 쥐어짜였다. 그사이 도멤은 아무도 자신의 말에 대꾸해주지 않는 것에 상심하며 꿍얼거리고 있었다.
연신 텐을 쓰다듬던 키이엘로는 로트가 자재를 어깨에 짊어지고 수선 조의 선실로 옮기러 사라지자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하늘과 바다를 보았다. 해가 지고 있는 바다는 노란 작약 꽃잎처럼 물드는 하늘색을 받아 비단을 펼친 것처럼 보였다.
키이엘로는 분홍빛으로 걸린 구름을 쓰다듬듯 텐의 털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난 생각보다 그다지 질리지 않는 풍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언제 보든 예쁘잖아.”
하늘과 바다는 항상 같은 것 같아도 시간과 날씨와 구름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웠다. 오래 보면 질릴 거라 말한 것과 반대로 볼수록 빠져들고 있는 건 그였다. 반짝이는 석양빛을 받는 키이엘로의 모습을 명화 감상하듯 턱을 괴고 보던 도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이야길 어디 마을 아낙들에게 해줬다면 좋아서 꽃이라도 던져줬을 텐데 왜 하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꽃은 필요 없어.”
“나도 줄 생각 없었어!”
쌈박한 거절에 울컥한 도멤이 버럭 소리를 지르든 말든 키이엘로는 그림처럼 펼쳐진 광경을 보다가 지금쯤 로트가 갑판 위로 나왔을까 시선을 돌려 계단을 보다가 아무도 없자 다시 고개를 숙여 텐을 주물럭거렸다. 그런 키이엘로를 보며 도멤이 물었다.
“너 왜 로트하고는 놀아?”
“어? 뭐라고?”
“너 말이야. 로트랑 만나기 전에는 나랑도 지금처럼 자주 놀진 않았잖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야? 키이엘로는 도멤의 물음에 조금 멍해졌다. 그랬던가? 키이엘로는 자신이 물자 조달을 위해 배에서 내리기 전을 떠올려보았다. 그때 어떻게 지냈었지? 키이엘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하지 않았어?”
“아냐. 넌 항상 텐이랑 선미나 어디 외진 곳에 갔잖아. 그러다 잘 때쯤 해먹으로 돌아와서 나랑 가벼운 잡담 좀 나누긴 했지만 글쎄, 그때도 지금처럼 긴 대화는 한 적이 없어.”
도멤은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도 조금 거북한 듯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딱히 따지려는 건 아냐, 그냥……. 그는 그렇게 말을 얼버무렸지만, 키이엘로는 도멤이 삼킨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는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구나. 키이엘로는 그게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무슨 기준으로 이런 것이 정해지는가? 친밀감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반으로 세워지고 어떻게 유지가 되는 것인가? 친해졌다고 해서 이렇게 자신의 속을 터놓고. 터놓다 보면 맞지 않는 점도, 꺼림칙하다고 생각하는 점도 발견하게 될 텐데, 그때도 괜찮은 건가?
그는 항상 이런 문제가 어려웠다. 늘 곁에 있는 타인을 예상할 수 없어 안절부절하게 되곤 했다. 키이엘로는 텐의 털을 만지다가 말했다.
“나는…… 내가 변했다거나 로트에게만 그렇다고는 생각한 적…….”
그때 문득, 키이엘로의 뇌리에 새파란 눈동자가 스쳤다. 싸늘한 바닷바람을 두른 것 같은 사람. 어깨에는 푸른 새를 얹고, 붉은빛으로 침몰하는 하늘을 등지고 휘어지던 새벽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스스럼없이 그를 아름다운 풍경에 빗대며 일컫던 친근함도. 키이엘로는 입을 꾹 다물고 텐을 쓰다듬는 것에 열중했다. 텐이 결국 못 참겠다며 일어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도멤은 키이엘로의 생각을 넘겨짚고 말했다.
“네가 다시 생각해도 그렇지? 너는 로트한테 유독 쉽게 마음을 풀었단 말이야. 뭐, 지금이야 우리 셋이 다 친하니까 별로 상관은 없어. 로트 덕분에 나도 너랑 더 친해진 것 같고.”
“너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하고 친해지고 싶은 거야?”
“나?”
도멤은 잠시 생각하다가 난간에 걸친 몸을 반듯하게 일으켜 바다를 보다가 말했다.
“그냥……. 사람은 누구나 좋은 점이 있잖아. 그걸 찾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상태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하다 보면 너나 로트 같은 친구가 생기는 거지 뭐.”
키이엘로는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으려고 하는 건데?’하고 묻고 싶었지만, 도멤이 후다닥 손을 내젓는 것이 더 빨랐다.
“그나저나 요즘 다시 로트가 우리랑 말을 안 하려고 한단 말이야. 문제야, 문제! 기껏 친해졌는데!”
아무래도 발카의 탓이 클까. 키이엘로는 생각했다. 로트는 발카를 숨기고 싶어 하니 무심코 아무거나 말하게 되는 친근한 관계를 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도멤이야 발카를 모르니까 별수 없나.
키이엘로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도멤이 돌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그 새 때문인 것 같지?”
키이엘로는 일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당황을 애써 감추고 도멤을 돌아보자, 도멤이 녹색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겨우 그런 거로 우릴 멀리한다는 건 아깝잖아. 키이엘로는 입을 달싹이다가 텐을 쓰다듬으려 했으나, 아까 전 텐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조금 떨어져 엎드려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키이엘로는 허공을 저은 손을 서로 꽉 마주 잡고 물었다.
“왜…… 그 새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음 순간 키이엘로는 이 질문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깨달았다. 동요한 기색을 너무 드러냈다. 키이엘로가 발카에 엮인 의문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도멤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키이엘로도 발카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눈치를 챈 상태였다.
“음, 뭐, 너도 알겠지만. 전에 괴이랑 싸운 뒤에 말이야. 로트가 혼잣말을 하고 있더라고. 사실 로트는 혼잣말을 많이 하는 편이기는 했어. 근데 굳이 남의 시선을 피해서 새를 보며 말할 이유는 없잖아?”
“…….”
“로트가 숨기고 싶어 하니까 딱히 아는 척은 하지 않는 거야. 우리도 다 터놓고 사는 것 같아도 남한테 말 않는 것 정도는 갖고 있는 법이고. 그래도 그 새를 감추겠다고 우리와 멀어진다면 아쉽잖아.”
도멤은 특유의 소년다운 미소를 지었다. 초목이 우거진 숲 같은 눈동자가 휘어지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도멤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도 로트도 조금은 틈을 내주란 거지. 나 요즘 너희랑만 놀아서 전에 놀던 녀석들이 도통 끼워주질 않아. 너희까지 날 버린다면 난 외톨이가 되어버릴걸. 사람도 별로 없는 배에서 외톨이가 셋이라, 우스꽝스럽긴 하겠네.”
키이엘로는 도멤이 저렇게 말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과 로트는 상관 않고 얼마든지 다른 친구를 사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키이엘로는 사탕을 뺏긴 아이 같은 기분이 되었다. 로트가 발카를 숨긴다는 것은 자신만 알고 있고, 그와 자신만 공유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멤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데다, 굳이 드러내지 않길 택한 것이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키이엘로는 자기 뺨을 세게 때렸다. 도멤이 갑작스러운 키이엘로의 행동에 대경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나쁜 말을 했나?”
“아니, 아니……. 그냥 좀 자괴감이…….”
“자괴감?! 아니, 그런 심각한 감정이? 갑자기?”
키이엘로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지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자신이 때렸기 때문이다……. 텐이 옆에서 혀를 찼다.
『혼자서 삽질 좀 하지 마, 키이엘로.』
그렇지만……. 키이엘로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도멤은 알다가도 모를 키 크고 잘생긴 친구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로트가 갑판으로 올라와 나오고 있었다. 로트! 그를 부르는 도멤의 말에 키이엘로도 고개를 들었다가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 날카롭게 빛나는 파란 눈동자를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째 저 눈동자만 보면 좀처럼 느긋해질 수가 없었다. 로트의 눈은 새벽과 바다를 떼어다 빚은 듯이 새파랬고, 그 눈이 번뜩일 때면 키이엘로는 어렸을 때 난생처음 보았던 바다의 물비늘을 떠올리곤 했다. 숲과 맞닿았던 푸른 바다를. 그때 텐이 말했다.
『너는 좀 더 많은 사람을 겪어볼 필요가 있어.』
그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여태 키이엘로가 만나본 인간상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것을 따져 묻기엔 도멤과 로트가 충분히 가까워졌기 때문에, 키이엘로는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로트는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어 수다를 떨려 드는 도멤이 피곤한 듯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다가, 뭐라고 떠드는 도멤의 말에 못 이기겠다는 듯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키이엘로는 그 변화를 눈치챈 도멤의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신나졌다는 것을 느꼈다. 문득 키이엘로는 자신도 그 사이에서 웃으며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키이엘로가 머뭇거리며 일어나 그들에게 걸음을 옮기자, 텐은 그를 빤히 보다가 느리게 그 뒤를 따라갔다. 친구, 친구가 뭐길래. 친밀한 관계가 뭐길래? 키이엘로는 아직도 그것의 근본을 알지 못했고, 그런 것이 마치 모래 위에 지어진 누각처럼 덧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웃고 떠드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애초에 그는 왜 그들과 웃고 떠드는 것이 때로 굉장한 보물을 품에 안은 것처럼 흡족한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키이엘로는 이유가 없는 호의란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혹여 후에 로트나 도멤이 그 이유를 드러내더라도 그다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키이엘로! 들었어? 로트가 숲의 바다에서 같이 낚시해준대!”
도멤은 마치 내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로트가 도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조금 굳어 있던 셋의 관계에 온풍이 부는 것을 의미했다. 키이엘로는 도멤이 어떻게 저런 넉살을 갖고 태어난 건지 궁금했다.
키이엘로는 문득 배에 오르기 전의 도멤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주 짤막하고 단편적인 기억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것에 더 골몰하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낚시 자신 있어, 로트?”
“너 전직 낚시꾼을 얕보지 마.”
“맞아! 로트는 낚싯배에 오른 적 있댔잖아. 안 돼, 난 자신 없다고…….”
왜? 작살이라도 던져서 잡아봐. 넌 창 잘 다루잖아. 로트의 말에 도멤이 그거랑 이거랑 같아? 하고 볼멘소리를 냈다. 키이엘로는 그들의 대화에 웃으면서 생각했다. 진짜 이상한 일이야.
지금도 그들과 웃고 떠드는 것이, 심지어는 텐의 털을 쓰다듬는 것보다 더 편안하다는 게. 하지만 동시에 외줄에 올라탄 것처럼 위태롭다는 게.
원래 다들 이런 기분으로 사람을 만나는 걸까?
그런 의문 사이로 디겔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리 바다를 벗어난다!”
동시에 한 점 바람과 파도 없이 잔잔하던 공기가 훅 일어났다. 키이엘로는 스치는 바람과 함께 휘날리는 도멤의 고수머리와, 로트의 턱을 스치는 그의 깃털 귀걸이를 보았다. 눈앞으로 이리저리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잡은 키이엘로는 로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 것을 보았다.
먹을 푼 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피부를 스치며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그 무채색 사이로 흩날리는 귀걸이의 붉은 산호조각과 파란 깃털 장식은 시선을 저절로 빼앗아 갔다.
키이엘로는 문득, 외줄에 매달린 느낌이더라도 로트와 도멤이 자신을 친근하게 느낀다면 못 버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때로는 주변의 친근한 웃음만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질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