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42)
바다새와 늑대 (41)화(42/347)
#41화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바다가 지금보다 얕고, 땅들은 조금 더 컸으며, 이어진 땅덩어리 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던 때에.
바다의 주인이 살아있던 때에.
그곳엔 표범과 함께 커왔던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에게 표범은 부모이자 지기였고, 스승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인간들의 손에 이끌려 돌로 쌓은 벽에 둘러싸인 곳으로 끌려가야 했다. 표범은 소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녀는 표범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쉽게 죽지 않는 표범도 지독하게, 기어코 죽여 버렸다. 소녀는 표범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표범은 자신의 부모이고 지기이며 스승이었기 때문에, 소녀는 그 울부짖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녀는 표범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슬픔과 공포로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다. 소녀는 자신을 돌로 만든 우리에 가둔 인간들을 죽였다. 정말로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다음, 소녀는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고 그곳에 별처럼 빛나는 표범의 눈을 넣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소녀는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라는 것은 오직 그 하나뿐.
모든 것이 안전한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소녀의 앞으로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푸른 머리칼이 다가왔다. 파도를 떼어낸 것처럼 하늘거리는 머리칼을 가진 그는 소녀를 보며 안타깝게 웃었다.
“너에게 숲을 줄게, 가여운 아이야.”
* * *
에르노리는 홀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숲의 바다의 수면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초월자들은 원래 다들 물 위를 걷는 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배를 몸통으로 감싸고 숲의 주인을 따라 나아가는 케찰 코와틀을 흘끔 보았다.
분명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뱀이었지만 에르노리가 나타나자 그다지 위압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문지르다가 키이엘로의 다리를 퍽 발로 찼다.
“옆구리 아파 죽겠네. 앞으론 제발 옷깃을 잡든 해. 내가 과연 뱀에게 머리가 뜯길지 네 손에 옆구리가 뜯길지 고민한 건 알아?”
“미안해…….”
키이엘로는 내게 맞은 다리를 문지르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나 다리 부러진 거 같아.”
“개소리 마.”
“안 통하는구나…….”
도멤은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통할 리가……. 비교할 걸 비교해, 키이엘로. 우리를 보고 우투그루가 혀를 찼다. 이 상황에 시시덕거릴 여유가 있냐고 타박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돌연 에르노리가 웃었다. 괜찮아, 내버려 둬 부선장. 귀엽잖아.
나와 도멤은 에르노리가 말한 부선장이 키이엘로가 아니라 우투그루인 것을 눈치채고 힐끔 우투그루를 보았다. 우투그루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에르노리는 지금도 배 밖에서 수면 위를 걷고 있었다. 숲의 주인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가 울렸다.
저기서 우리의 상황을 훤히 보듯 하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우투그루의 생각을 알아챈 것도 놀라웠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초월자들은 다들 이렇단 말인가? 우리가 조용히 하자, 에르노리가 걸어가던 것을 멈추더니 갑자기 내 뒤쪽에서 나타났다.
깜짝 놀라 물러나자 우리 셋의 등을 케찰 코와틀이 주둥이로 밀어 에르노리에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 도멤이 무심코 케찰 코와틀의 코를 짚었다가 식겁해서 손을 털어냈다. 에르노리가 대뜸 물었다.
“뭐야, 나 때문에 그래? 계속 얘기해. 난 너희처럼 노는 애들이 재미있더라.”
“어…….”
나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클루스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에르노리를 눈짓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문득 우리의 목표가 숲의 바다를 유람하는 것이 아니라 에르노리에게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고 상기했다. 그러나 그때 에르노리가 내 눈을 가리더니 혀를 찼다.
“무슨 짓이야? 내가 대화하고 있잖아.”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미안하네.”
클루스도가 침착하게 말했다. 에르노리는 우리에게 말하던 어투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네 아랫사람으로 보이나? 버릇없는 놈 같으니.”
그 말에 클루스도는 몸을 떨었다. 정중한 어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초월자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클루스도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우투그루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에르노리는 클루스도에게 사과를 듣자 만족한 듯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숲의 주인의 손을 눈에서 내리고 말했다.
“…우리는 정보를 얻으러 왔어요.”
“정보……. 그래, 다들 그렇지 뭐. 너라고 다르진 않았겠지. 이해해.”
“우리는…….”
“아니, 잠시만.”
에르노리가 손을 들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자 숲의 주인은 배부른 사자처럼 웃었다. 어쩜, 착하기도 하지. 숲의 주인이 마치 ‘손’을 잘 이행한 강아지를 쓰다듬듯 나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색하게 시선을 굴리는데, 그녀가 느리게 말했다.
“네가 물어보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네?”
“그래, 누가 물어보는 게 좋을까……. 넌 어때?”
에르노리가 도멤을 가리켰다. 도멤은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내 뒤로 숨었다. 그러자 에르노리는 낄낄 웃었다. 쟤 귀엽다! 한참을 웃은 숲의 주인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갑판 위의 해적들을 보았다.
그때 숲의 주인이 우투그루를 가리켰다.
“네가 할래?”
“…….”
우투그루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침착하게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좋아. 질문할 기회를 세 번 줄게.”
“세 번?”
우투그루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스스로 아차 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대뜸 말했다.
“다섯 번.”
“흥정하기야? 안 돼. 세 번. 그냥 케찰 코와틀에게 시켜서 밖으로 쫓아낼 수도 있으니까 고마운 줄 알아.”
우투그루는 작게 쳇 소리를 냈다. 키이엘로가 내게 속삭였다. 쟤 방금 쳇이라고 한 거야? 나는 그에게 속닥였다. 그럼 뭐라 하겠니. 에르노리는 그런 우리를 힐끔 보고 웃었지만 딱히 언급하진 않았다. 우투그루는 그제야 조금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우투그루가 아니면 누가 한단 말인가? 에르노리는 같은 부선장인 키이엘로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우투그루가 고민하다가 도움을 구하는 듯 브레딕을 보자, 숲의 주인은 얼른 덧붙였다.
“혼자 생각해서 질문하기.”
“…….”
우투그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야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우투그루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항상 배의 일에 열심이었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곤 했었다. 하긴 초월자와 대화하는 것부터 평범한 인간이라면 부담이긴 할 것이다.
우투그루는 입술을 깨물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홉피아주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음, 좋은 질문이야.”
숲의 주인은 빙긋 웃더니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아주 잠시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손을 떼고는 말했다.
“사과나무 향이 짙은 곳으로 가고 있네.”
“……예?”
우투그루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에르노리를 보았다. 그게 끝? 도멤이 작게 중얼거렸다. 초월자는 그저 느긋하게 웃으며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뿐이었다. 검은빛의 손가락과 하얀 머리카락이 선명한 대조를 이뤄 마치 하얀 소금밭을 부드러운 갈퀴로 골라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다가 슬쩍 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이럴 수가, 네가 물어보는 건 반칙이라고 했잖아. 좋아, 조금의 호의를 베풀어 볼까. 그들은 화풀이를 하러 갔어.”
너무 두루뭉술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우투그루와 키이엘로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약간 놀란 것 같기도 했고, 조급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다지 좋은 소식을 들은 태도는 아니었다. 키이엘로가 입가를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유려한 눈썹이 찌푸려지자 지독한 고뇌를 하는 천사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나는 그가 저 별것도 없는 대답에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가 작게 물었다.
“뭔가 알아냈어?”
“나는……. 아니, 이건 나중에, 좀 더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키이엘로의 말에 나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발카는 뭐라고 하고 싶은 듯 부리를 딱딱거렸지만, 에르노리가 걸렸는지 조용히 있었다. 원래부터 과묵한 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며 고민하던 우투그루가 도박패를 던지듯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보를 통제하고 있죠?”
몇몇 해적들이 불평을 작게 늘어놓았다. 그건 누구나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으니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에르노리는 우투그루를 보며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눈을 접어 히죽 웃었다. 초월자의 눈이 마치 모든 것을 굽어보는 별처럼 일순 빛났다.
나는 우투그루의 도박이 어떤 원리로든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들의 상황이 좋지 않거든.”
“…….”
우투그루는 그 대답만으로 무언가를 눈치챈 듯 나를 보았다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대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옆의 둘에게 속삭였다. 에르노리는 직관적인 답보다 단서를 던져줘. 그러니까 방금 우투그루의 질문에 그 이유를 말해준 거 같아.
도멤이 작게 감탄했다. 우투그루도 나름 머리를 쓰는 부선장이긴 하구나. 나는 그러게, 하고 가볍게 대꾸해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투그루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우리는 우홉피아주와 어디서 마주치게 될까요?”
“호오.”
에르노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제법이야. 그렇게 말한 숲의 주인이 눈을 감고 웃다가 돌연 황금색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여러 대답이 있지. 그러나 너희는 지금 당장 나가서 네가 알아낸 곳으로 간다고 해도 그들과 마주치지 않는다. 좀 더 중요한 순간이 있은 후에야 그들과 마주할 거야. 그러니 나는 대답해줄 수 없다. 모든 건 선택의 문제거든.”
초월자는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황금 월계수 관이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약간의 장난꾸러기 같던 아까의 행동과는 다르게 매우 오래 살아온 고목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초월자는 고아해 보였고, 우아한 동시에 위압감이 있었다.
낮게 갸르릉거리는 고양이 같던 목소리가 일순 표범의 것처럼 낮게 으르렁 울렸다.
“아직 거쳐 가야 하는 것이 남았다. 괴물, 폭풍, 뭐, 그러한 것들…….”
에르노리는 느리게 돌아 케찰 코와틀의 목과 머리에 난 가지들을 밟아 그 위에 올랐다. 초월자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맞추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에르노리가 싱긋 웃으며 우투그루를 보았다. 우투그루는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에르노리를 보고 있었다. 에르노리는 심술을 부리는 것 같은 얼굴로, 초월자의 위압감에 짓눌린 해적들을 일별하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숲의 주인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든 여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배반자를 골라내는 일.”
명심해. 그렇게 말한 초월자가 왕좌에 앉는 것처럼 뱀의 머리 위에 느긋하게 앉았다. 이상. 숲의 주인이 그렇게 말하자, 여태 숨을 참았던 듯 도멤이 옅게 숨을 뱉어냈다. 하얀 머리카락이 온화한 바람에 날렸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적구나…….
“이제 모든 답변은 끝.”
그 말에 우투그루가 곧장 클루스도에게 뭐라고 속닥였다. 클루스도가 눈을 부릅뜨고 우투그루에게 뭐라고 되묻는 것을 보는데, 키이엘로가 작게 속닥였다.
“마지막 문답은 조금 이상한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말에 키이엘로는 나와 비슷하게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직 우홉피아주를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 해도 더는 에르노리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암만 미치광이라고 해도 우홉피아주가 검은바다와 싸우다가 숲의 바다로 올 리도 없다.
그런데 다시 만난다니. 게다가 배반자? 도멤이 속닥였다. 우리 중에 설마 첩자가 있는 건가? 나는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전에 말했을 땐 그들이 금방 들통나곤 한댔잖아. 내 말에 도멤은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모르지, 이번엔 정말로 작정하고 숨어있는 것일지도…….”
나는 곧장 네토르를 떠올렸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키이엘로가 말했다.
“걘 아냐…….”
“뭐? 어떻게 확신해.”
“걔는 거의 초창기 인원이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있었을 리가 없지.”
나는 입을 비죽였다.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거라던데……. 돌연 케찰 코와틀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그제야 문득 내 주변을 나무줄기가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클루스도와 대화하던 우투그루가 내 쪽을 보고 깜짝 놀라 선미루의 난간을 붙들었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뱀의 머리 위에 앉은 밀림의 여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 내 볼일을 좀 해결할까.”
“로트!”
깜짝 놀라 키이엘로가 내 팔뚝을 잡는 것과 동시에 덩굴들이 우리를 감싸 조여들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하게 물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