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43)
바다새와 늑대 (42)화(43/347)
#42화
있지, 그거 알아? 스스로의 눈을 뽑고 표범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소녀는 이미 그쯤엔 거의 죽어있었어. 넘어가는 숨만 꼴딱이며 피가 스미는 땅을 노려보았지. 그리고 생각했어. 숲에 돌아가고 싶어.
들려, 내 친구? 나는 너와 숲에 돌아가고 싶어. 더 이상 이것들을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네 눈을 내게 넣은 거야. 이제 푸른빛의 숲으로 돌아갈래. 그러면 너는 나와 나무를 타고 수풀을 달리게 될 거야.
하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여기서 죽게 되겠지. 숲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두 번 다시는…… 너도 만날 수 없겠지…….
그런데 그때 그가 나타난 거야. 모든 초월자의 어버이, 모든 초월자의 친우, 모든 초월자의…….
* * *
나는 눈을 떴다. 새파란 하늘을 잠시 노려보던 나는 눈을 뜨기 전 마지막의 기억이 덩굴에 감싸이던 것임을 떠올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팔뚝이 묵직해 시선을 돌리자 키이엘로가 내 팔을 잡은 채 쓰러져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슬쩍 키이엘로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지자 나는 한숨을 쉬고 손을 거뒀다. 대신 주변을 살폈다. 발카와 텐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은 온통 울창한 수풀이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숲의 주인도 커다란 뱀도 보이지 않으니 얼떨떨했다. 발아래엔 덩굴과 나무줄기가 있었지만, 그 끝은 바다 안으로 들어가 이어지는 길 따위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바다가 아니라 밀림 안에 들어온 기분을 느꼈다. 주변은 온통 녹음이 짙어 이곳이 망망대해라는 것을 잊게 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키이엘로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우리를 감쌌던 덩굴을 밟고 걸음을 옮겼다. 수풀이 있기 때문인지 바다는 푸른빛보단 에메랄드 같은 빛깔을 띠며 반짝였다. 나는 부츠를 벗어 옆구리에 끼우고 물 아래로 뻗어가는 줄기를 밟았다.
발바닥 아래로 닿는 찰랑이는 느낌과 줄기의 매끈한 느낌이 묘하게 소름이 끼쳤다. 그때 아래로 뻗어있던 줄기가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더니 길을 만들 듯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이어졌다. 나는 옆구리에 끼운 부츠를 고쳐 안고 뒤의 키이엘로를 흘끔 보았다.
에휴, 별수 있나. 시간 낭비할 것은 없고 에르노리가 날 죽이려 했다면 벌써 죽였지, 이렇게 장난을 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발을 내디뎌 줄기가 뻗은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녹음을 보며 하나의 작은 섬처럼 솟아있는 수풀을 넘어 옆으로 꺾자, 케찰 코와틀의 위에 유유자적하게 앉아 나를 반기는 숲의 주인이 보였다.
“왔어?”
“…….”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다가 하얗게 드러난 케찰 코와틀의 몸을 밟고 초월자에게 다가갔다. 뱀은 퍽 얌전히 있었다.
“……. 키이엘로는…….”
“말려든 거야. 잠깐 기절한 것뿐이고 곧 일어나, 걱정 마. 안 건드려.”
나는 남몰래 안심했다. 내가 검은바다는 어디 있는지 물으려 하는데, 내 질문을 가로챈 에르노리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해적들은 수풀 밖에 있어. 물론 좀 멀리 떨어져 있긴 한데, 아무튼……. 그들도 문제는 없어.”
“날 왜 데려온 거예요?”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러나 대화를 하자고 한 것과 다르게 초월자는 턱을 괴고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내 눈을 빤히 보더니 싱긋 웃었다. 수풀이 우거져 초월자의 뒤는 갈맷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러나 이파리 사이로 스며들어온 빛줄기가 그의 황금 월계수 관에 닿아 샛노란 빛을 흩뿌려 눈앞이 환했다.
한참 후 숲의 주인이 말했다.
“어쩜 루루미 언니에게는 못 당하겠어. 인연이란 신기하구나.”
“……바다의 마녀와 내기를 했어요?”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숲의 주인과 처음으로 만날 때 그는 루루미와의 내기를 언급했었다.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초월자를 두 번이나 본 데다 묘하게 순순했다. 루루미 때야 긴가민가했지만 에르노리까지 만나보자 그들이 나름 아량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물어보지 않고는 못 버틸 만했다.
밀림의 여왕은 말없이 다리를 꼬고 여전히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그리고 아까와 거의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느리게 입을 뗐다.
“그래. 그녀와 내기를 했지. 최근에 나를 찾아왔거든. 그러더니 글쎄, 대뜸 하는 말이 ‘넌 그 애를 도와주게 될 거야’라니!”
에르노리는 하하 웃으며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더니 내가 눈만 굴리고 있자 돌연 분개하며 주먹을 싸쥐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 내가 대체 왜! 나는 싫어! 전부 죽어버리라 해!”
내가 그 서슬에 놀라 주춤 물러나는데, 뒤에서 뱀의 주둥이가 내 등을 받쳤다. 에르노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난 뒤, 갑자기 그녀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니? 나는 너를 보자마자 깨달은 거야. 그건 불가능해…….”
“……어,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절 죽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 그래서 내가 마녀에게 패배한 거야.”
‘마녀에게 패배했다’라, 상당히 불명예스럽게 들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케찰 코와틀에게서 살짝 떨어져 바로 섰다. 비단 그 얘기만을 위해 나를 데려오진 않았을 것 아닌가? 내가 에르노리를 빤히 보자 숲의 주인은 미소 지으며 자신의 월계수 관을 벗었다.
그러더니 거기서 잎을 두 개 따서 내게 내밀었다.
“그 고약한 마녀가 준 진주로는 부족하겠지.”
“아…….”
그러고 보니 루루미에게 받은 진주 중 하나는 사용하고 하나는 허무하게 도멤에게 먹여버려서 마지막 한 개만 남아있었다. 최근에 저주로 인한 통증이 잦아지는 것을 생각하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나는 황금빛의 이파리를 받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그냥 내 저주를 낫게 해주면 안 돼요?”
“그건 내 일이 아냐. 다만 더 물어볼 게 있을 텐데?”
“…….”
나는 에르노리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랄티아.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왜 그래? 동생의 정보가 궁금한 거 아냐? 초월자가 태연하게 물었다. 나는 계속 망설였다. 루루미를 만났을 때도 랄티아에 대해 물어볼 걸 후회했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으니 좋은 일인데.
하지만 물어봤다가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니라면?
일순 오한이 들었다. 랄티아의 안부를 물어봤다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듣게 된다면…….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주저하다가 딱 하나만 물었다.
“……아직 살아있나요?”
살아만 있으면 돼. 어디든 내가 구하러 갈 거야. 나는 이파리를 꽉 쥐었다. 단단한 이파리는 부서지지 않고 손바닥에 눌려 손톱과 함께 자국을 만들었다. 랄티아는 살아만 있으면 돼.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이든…….
널 구하기만 하면 언니는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에르노리는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 불안해진 내가 대답을 재촉하려는데, 뒤에서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키이엘로가 나처럼 부츠를 옆구리에 끼우고 줄기를 밟고 서 있었다. 키이엘로는 케찰 코와틀과 초월자의 사이에 있는 날 보고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이런, 불청객이네. 밀림의 여왕이 키이엘로를 보며 스산하게 웃었다. 오한을 느낀 나는 얼른 초월자의 앞을 막아서고 무심코 외쳤다.
“쟨 내 친구예요!”
“음?”
숲의 주인은 약간의 다급함을 담은 내 얼굴을 보더니 고양이처럼 히쭉 웃었다. 그으래? 네 친구야? 그러더니 나를 휙 돌려 키이엘로를 보게 하더니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손가락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어쩔까? 괘씸한데 죽일까? 너를 죽일 수는 없으니 머릿수라도 맞춰야지. 저 녀석을 나무에 매다는 거야.”
“이봐요!”
내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려 하자 에르노리는 쉬이, 하고 속삭이더니 내 머리 위에 턱을 얹고 키이엘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 널 죽일까, 이 애를 죽일까?”
키이엘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나를 보았다. 로트를 죽이려고 데려온 거였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에르노리가 웃으며 재촉했다. 어떻게 할 거냐니까? 그에 키이엘로는 생각에 빠졌다. 뭘 또 대답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꺼져! 그냥 꺼져!
그러나 정말로 뜻밖에, 키이엘로가 말했다.
“제가 죽는다면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 겉가죽만 멀쩡한 새끼가 방금 뭐라고 씨부렸단 말인가? 그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나는 에르노리를 밀쳤다. 내게 밀쳐진 숲의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을 거두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외쳤다.
“갑자기 무슨 변덕이에요? 안 건들겠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외치는 거 좋은 거 같아. 더 소리쳐볼래?”
“미치겠네! 초월자들은 원래 다 괴짜인가요?”
내가 어이가 털려 머리를 부여잡으며 외쳤지만, 초월자는 일개 필멸자를 굽어보며 느긋하게 가로되.
“확실히 재미있어.”
젠장! 나는 욕을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적어도 방금의 내 태도가 간덩이를 바다에 던진 모습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노리는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내가 무슨 짓을 달리 더 하겠어?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다고!”
“로트?”
“야! 너 미쳤어? 죽는다고 아주 기도를 해라!”
내가 키이엘로에게 버럭 윽박지르자 키이엘로는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망설이는 얼굴은 정말로 빛이 났으므로, 초월자인 에르노리까지 휘파람을 불었다. 잘생겼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키이엘로의 얼굴을 철썩철썩 때리고 싶었다. 저 허우대만 멀쩡한 머저리 새끼!
나는 연신 씩씩거리다가 에르노리를 보았다. 숲의 주인은 미소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안 죽일 거죠?”
“그래. 손도 안 댈게.”
“손 안 대고도 죽일 수 있잖아요. 안 죽일 거죠?”
끈질기긴! 안 죽여! 됐니? 에르노리는 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말했다. 아주 농담도 못 해. 그는 내가 이런 장난을 치면 좋아했는데……. 뭐라고 더 중얼거리던 에르노리가 내 턱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웃었다.
“그래, 추억을 불러일으키지만. 너는 정말로 다른 사람이구나.”
그도 아니면 그저 내가 그를 몰랐던가……. 흐릿한 목소리에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자, 초월자는 웃으며 내 얼굴을 마구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키이엘로를 흘끔 보았다.
“아까 나와 문답한 녀석과 혈육인가?”
“음, 네.”
“넌 늑대와 함께 있었지?”
“네.”
키이엘로는 착실하게 대꾸하면서도 걸음을 옮겨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줄기를 징검다리 삼아 가까이 와도 초월자와 깃털 달린 뱀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에르노리는 황금빛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래…….’하고 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초월자는 자애롭게 웃었다.
“내 너희와 닮은 이들을 알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키이엘로가 눈썹을 슬쩍 휘며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초월자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 뺨을 더 쓰다듬고는, 천천히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얼음처럼 굳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키이엘로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좋아. 즐거운 시간이었어. 이제 데려다줄게.”
에르노리가 나를 놔주고 손을 저어 나무줄기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키이엘로는 그 틈에 자신의 셔츠 소매로 내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초월자는 다 이런가? 키이엘로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낸들 알아?’하고 대꾸해줬다.
우리는 케찰 코와틀의 위에 올라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느긋하게 수면 위를 유영하는 케찰 코와틀의 위에서 초록색 보석 빛깔의 바다를 바라보는데, 키이엘로가 나를 타박했다.
“눈 떴는데 혼자 웬 수풀 안에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웃기지 마, 자살희망자야. 그러게 누가 좋다고 덥석 ‘제가 죽을래요!’하고 손들래?”
“그렇게 말 안 했고, 손도 안 들었어!”
“제법 잘 지껄이네.”
나는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렸다. 로트 너 정말 깡패야? 키이엘로가 황당해하며 말했지만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 정말로 심각했다면 키이엘로가 죽었을 것이다. 물론, 안타깝긴 해도 내가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그의 대답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같았다.
나는 나와 키이엘로를 두고 말한다면 한참을 고민하겠지만 어쨌든 결국 랄티아를 구하기 위해 나를 택할 테니까. 나는 문득 그것이 랄티아를 위한 결정인지 내 목숨을 위한 결정인지 헷갈렸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거기서 정말로 그렇게 말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나는 내가 내 이득을 셈하는 만큼 키이엘로도 제 삶을 위해 셈하며 살았으면 했다. 말이 나온 김에 그를 발로 차자, 뱀 위에서 한바탕 구를 뻔한 키이엘로가 가지를 쥐어 몸을 추스르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약간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서는 요사스럽게 웃었다.
“로트, 날 친구라고 해줬지?”
“너 그거 도멤한테 말하면 뒤질 줄 알아.”
내가 사색이 돼서 위협하자 키이엘로는 여우처럼 눈을 접어 웃으며 으스댔다.
“어? 왜 내가 도멤한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너 나랑 도멤 말고는 친구 없잖아.”
“…….”
제대로 정곡을 찔린 키이엘로가 말을 잃자 나는 내심 안심하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키이엘로는 맞은 어깨를 감싸며 소심하게 툴툴댔다. 이상하게 유독 아프다……. 나는 혀를 차며 그를 노려보았다. 넌 좀 맞아야 돼. 애초에 내가 덩굴에 싸이든 말든 거기에 왜 끼어들어?
내 말에 키이엘로는 머뭇거리다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나는 정말이지 저 얼굴만은 어떻게든 후려쳐 뭉개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이엘로는 그 찌질이 같은 성격답게 매우 구질구질한 대답을 했다.
“네가 내 친구잖아.”
나는 잠시 무슨 욕을 쏟아줄까 생각하다가 에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랄티아를 구할 때까진 이 이쁜 찌질이를 도멤과 내가 잘 돌봐서 사람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싹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