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56)
바다새와 늑대 (55)화(56/347)
#55화
나는 키이엘로에게 말했다.
“굳이 따라올 필요 없어.”
“그렇지만, 로트. 머리도 아직 안 나았고, 어제부터 상태가 안 좋았잖아.”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보았다. 어슬렁거리며 키이엘로를 따라오던 텐이 툴툴댔다. 그냥 내버려 두래도 이럴 때만 말을 안 듣지. 내가 할 말이었다! 나는 얼굴을 짚고 미간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넌 겔라 부인 눈에 띄면 더 안 좋다며. 기분 상해하지 마. 네가 했던 말이고, 나는 그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키이엘로.”
“아, 물론, 물론 절대 그 집까지 가서 같이 청소하겠다는 의미는 아냐. 알지? 나도 헤더에게 볼일이 있긴 해서 그래.”
“……무슨 볼일?”
내 물음에 키이엘로는 잠시 시선을 피하다가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비밀이야.”
어이구, 깜찍한 새끼. 그래, 비밀 해라. 속으로 툴툴거린 나는 눈을 굴리고 걸음을 마저 옮겼다. 키이엘로는 옆에서 나를 따라오면서 시시때때로 다친 곳은 어때? 하고 물어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만해, 키이엘로. 내가 초인도 아니고 순식간에 상처가 나을 리가 없잖아.”
“알았어, 귀찮게 했네, 미안해.”
그렇다고 그렇게 풀 죽지 마! 나는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카가 내 어깨에 앉아 걱정했다.
『로트, 역시 나도 따라갈래.』
“됐어, 발카. 겔라 부인이 널 싫어하잖아. 어쩔 수 없어.”
『그 젠장맞을 부인!』
발카가 연신 시근덕대는 것에 나는 찝찝한 기분이 되었다. 딱히 우리가 그녀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감싸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욕하기도 좀……. 어쨌거나 나는 헤더의 집 앞까지 키이엘로와 간 뒤, 그에게 발카를 맡겼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볼일이 뭔지 안 알려줄 거야?”
키이엘로는 다시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나는 혀를 쯧 차고 그의 코에 손가락을 튕겨 딱밤을 놓았다. 키이엘로가 내게 얻어맞은 코를 문지르는 것을 보며 나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결연하게 주먹을 쥐어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다녀온다.”
“잘 다녀와. 오래 안 걸릴 것 같으면 헤더 집에서 기다릴까?”
“그냥 가.”
나는 그에게 손을 내젓고는 가타부타 않고 트라페 가로 들어섰다. 나름 결연하게 들어간 것과 달리 나는 트라페 가의 마당이 보이자마자 마음이 물러지다 못해 게을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좀 키이엘로 따라 헤더네 집에 들어가서 빈둥대다 오고 싶다……. 하지만 그 집엔 네토르가 있지. 그 녀석과 마주하느니…….
나는 잠시 더 생각했다. 아니, 네토르 놈은 이기는 게 어렵지 않으니 차라리 그놈이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몸은 성실하게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숨을 쉬던 나는 집 안이 소란스러운 것을 듣고 멈춰 섰다.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화들짝 놀라서 보니 우투그루였다. 그는 밖에 나와 있었던 듯 나를 데리고 집 뒤의 바닷가로 향했다. 나는 순간 의아해졌다. 우투그루가 밖에 있다면 집 안은 왜 소란스럽단 말인가? 내가 집을 힐끔거리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우리 집에서 신경 꺼.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그를 보았다.
“누가 왔어?”
“……아버지가 오셨지. 찾아갔던 어머니를 다시 돌려보내시려고.”
“왜 두 분이 같이 안 지내?”
그는 조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네가 알아서 뭐 해? 우투그루는 내게 날카롭게 말하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어색하게 눈만 땅바닥을 향해 굴리며 등 뒤로 손가락만 꼬았다. 그야 내게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조금 마음을 단단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 진지하게 충고를 하든, 정말 못 본 척 넘어가든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네가 저들을 굳이 감당할 필요는 없어, 알지?”
“…….”
우투그루는 내 말을 듣고 나를 잠시 빤히 쳐다보다가 뭔가 참는 것처럼 턱에 힘을 줬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냐.”
“네가 쉽게 떠날 수 없단 건 알아.”
“그래? 안다고? 그럼 좀 조용히 할 생각은 없나 봐?”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우투그루는 조금 일그러뜨린 얼굴을 했다가 말문이 막힌 듯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나는 아무렴 그가 생각보다 쉽게 떠날 수 없는 입장임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의 부모고, 그의 친구, 지인이 모두 이 섬에 있고, 그는 부선장이고……. 그라고 해서 저들이 마냥 좋진 않겠지.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아직도 간간이 큰 말소리가 들리는 집 방향을 곁눈질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너만 이렇게 참는 건 부당해. 너만 힘들게 버텨야 하잖아.”
“나도 알아.”
우투그루는 짧게 대꾸하더니 스스로의 답에 얼이 빠진 듯 멈칫했다. 그러더니 백사장에 나뒹굴던 나무둥치 위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눈치만 보며 멀뚱히 서 있었는데, 이틀 전처럼 그가 빠르게 말했다. 앉아. 나는 이번에도 슬쩍 그의 옆에 앉았다.
파도치는 소리에 묻혀 트라페 가의 소음이 멀어졌다. 나는 우투그루에게 말했다.
“너도 그게 부당한 걸 알면서 왜 그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해?”
우투그루는 가라앉은 얼굴로 바다를 노려봤다. 그의 검은 눈이 금발 사이로 선명하게 침잠하고 있었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항상 그러시는 건 아냐.’ 그러나 이 말을 하고 난 이후 그는 조금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투그루는 이어 말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으실 때만 예민해지셔서 그러는 거야. 최근이 조금 더 심해지신 거지, 원래는…… 원래는 자상하고 좋은 어머니셔. 항상 그랬지. 지금도 그냥 피곤하시니까 그러는 거야.”
“…….”
“……키이엘로가 섬에 오고 사생아가 있었단 걸 알게 된 뒤로 충격을 받으셔서 그래. 나까지 어머니를 등지면 이제 누가 그 집에 머무르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투그루는 침착하게,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말했다. 난 괜찮아. 나는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넌 전혀 괜찮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들 괜찮지 않은 것을 감추고 괜찮은 것처럼 살아가는걸. 나는 그래서 그것을 꼬집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클루스도 아저씨는? 왜 그는 다른 곳에서 머무시는 거야?”
“아버지는 어머니가 저렇게 구는 걸 못 견디시는 거야. 별수 없는 일이지. 대신 내게 어머니를 잘 챙겨달라고 하셨어.”
나는 조금 황망해졌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나는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우투그루의 얼굴을 보자 그것도 뚝 그쳤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물었다.
“너는 그게 다 괜찮아?”
우투그루는 말을 잇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숨만 몰아쉬다가 입을 다물고 몇 번이고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나는, 그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는 겨우 서두를 꺼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우투그루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잠시 석상처럼 굳어있던 그는 느리게 말했다.
“다정한 분이 아니면 좋겠어.”
그냥, 좀…… 마음 놓고 원망하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우투그루가 클루스도를 원망하고 싶어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야 우투그루는 항상 그에게 충직했는걸…….
“그렇다고 그가 충분히 다정해?”
“아니.”
그는 그게 우습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인제 와서 궁금하네. 그가 작게 말했다.
“그가 키이엘로에게도 이런 식으로 다정했을까.”
나는 조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우투그루는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아. 그는 열기가 몰렸던 눈가도 어느새 멀쩡해진 채였다. 나는 그의 태도가 조금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괜찮은 척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러나 그 말은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때 트라페 가에서 클루스도가 박차고 나가는 듯, 두 어른의 목소리가 보다 쩌렁쩌렁 울렸다. 당신 제발 이러지 마! 내 잘못도 잘못이겠지만, 당신이 이러니까 내가 못 버티는 거야! 오, 클루스도, 이 악랄한 사람아!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해? 당신과 내가 같아?
나는 거북한 기분이 들어 괜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나보다 수십 살은 많은 어른들이 큰 소리를 내며 감정을 실어 다투는 것은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클루스도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이 작게 보였다. 우투그루는 백사장에서 멀거니 서 있다가 그것을 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갔으나, 우투그루가 내 기척을 읽고는 날 돌아보더니 멈춰 섰다.
“넌 여기 있어.”
“뭐? 왜?”
그러나 우투그루는 말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시 우왕좌왕하는 걸음으로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트라페 가 쪽으로 걸음을 조금 옮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겔라 부인이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우투그루에게 욕을 하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트라페 가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우투그루가 문을 닫고 서서 몇 마디 집 안을 향해 말하는 것이 보였다. 사실 겔라 부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내 쪽으로 빠르게 오더니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가.”
그때 갑자기 집 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깜짝 놀라 마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우투그루가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무슨 소리야? 뭐가 깨진 것 같은데. 거의 속삭이는 내 말에 우투그루가 바싹 마른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
나는 코앞에서 무참한 시체를 발견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그를 보았다. 우투그루가 이어 말했다.
돌아가.
우투그루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뒤돌아 트라페 가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겔라 부인이 몇 번 더 소리치는 것 같더니 처량한 곡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들었다면 소름이 쭉 돋았을 것 같은 비명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보다가 걸음을 옮겨 트라페 가를 벗어났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해? 내가 무슨 도움을 주겠어. 나는 내 코도 석 자고, 그는 딱히 누가 도와주길 바라지 않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문득 브레딕이 떠올랐다. 브레딕은 이걸 알까?
그는 우투그루의 절친인데 이걸 모를 리가……. 나는 생각이 닿는 즉시 헤더의 집 앞에서 하얀 문에 노크했다. 정원의 풀 내음이 끼쳐오더니 헤더가 나무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울타리가 낮아 문을 열 필요도 없이 나와 마주한 헤더가 인사했다.
“신입! 키이엘로는 아까 막 떠났는데, 엇갈렸나 보다.”
“그건 괜찮아요. 헤더, 브레딕의 집이 어딘지 알아요?”
브레딕? 헤더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마을 어귀를 손으로 가리키며 브레딕의 집을 알려줬다. 내가 고맙다고 하고 바로 떠나려 하자, 헤더가 아쉬운 어투로 말했다.
“벌써 가니? 키이엘로도 그렇고 너도 뭐가 그리 바빠?”
“브레딕한테 물을 게 생겨서 그래요.”
“그래, 나중에 키이엘로한테 완성품 나한테도 보여 달라고 해줘.”
완성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헤더는 몰라? 하고 되묻더니 눈을 굴렸다. 어쨌든 말만 전해줘! 나는 일단 알겠다고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브레딕을 어떻게 떠볼지가 관건이었다. 나는 헤더의 집 앞을 벗어나 브레딕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 * *
브레딕은 다행히 집에 있었다. 그는 책이라도 보고 있었는지 코에 안경을 걸친 채로 문을 열고는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트? 나는 고개를 까딱이고 말했다.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
“나한테? ……그래, 일단 들어와.”
나는 그의 집으로 들어서며 약초 향을 맡았다. 의학을 혼자 공부한다더니 빈말은 아니었던 듯, 그의 집은 온통 약초와 약병,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내심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자, 브레딕은 안경을 책상이 있는 창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세운이 도와줘서 더 늘었어. 너무 그렇게 빤히 보지 마, 부끄럽다.”
“세운이 있으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딱히……. 세운이 기약 없이 머물고 있다고는 해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야. 있는 때에 배워둬야지. 어디에 또 쓰게 될지 누가 알아?”
나는 더 덧붙여 말하진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브레딕의 집까지 오면서 계속 생각했던 말이었지만 약간의 긴장감이 섞였다.
“너 우투그루 일 알아?”
“우투그루?”
브레딕이 그 이름이 내게 나오자 의외였는지 한 번 되묻고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우투그루가 왜?”
나는 그도 나를 떠보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브레딕도 나에게 그에 관한 걸 밝히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걔가 요즘 이상하게 굴어서. 그러니까…… 내 머리의 상처도 말이야, 겔라 부인과 싸우는 우투그루를 말리다가 난 상처거든.”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만약 브레딕이 겔라 부인과 우투그루의 일을 모른다면 그러려니 하거나 내가 말한 화두에 집중해 말할 것이다. 혹은 우투그루가 말했을 다른 핑계나. 하지만 만약 우투그루의 일을 알고 있고, 내가 이 일을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면…….
“너 무슨 헛소리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다닌 건 아니겠지!”
나는 때에 맞지 않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의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빠르게 말했다.
“진정해, 브레딕. 네가 만약 우투그루의 일을 모른다면 이런 식으로 반응할 리 없겠지. 아냐?”
“너! ……너 무슨 생각이야?”
“그냥, 우투그루가 너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을 뿐이야.”
내 말에 브레딕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 옆의 의자를 끌어다 앉고 물었다.
“브레딕. 너도 알고 있었던 거지?”
“뭘? 대체 뭐를? 우투그루가 겔라 부인에게 덤비지 못하는 거? 클루스도 아저씨가 훌륭한 선장일지언정 가장으로는 형편없다는 거? 겔라 부인이 때때로 우투그루에게…….”
브레딕이 말을 멈췄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손찌검을 한다는 거. 브레딕이 색이 옅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래, 그거까지. 그래서 뭐? 나한테 뭘 어쩌라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너도 알았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 아냐. 왜 아무도 이걸 몰라? 왜 너는 그를 돕지 않아?”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너만 다 안다고 생각하지도 마. 빌어먹을, 나도 노력했어. 하지만 생각해봐. 우린 이 섬에 종속되어있고, 어디로 훌쩍 떠나기엔 부족해. 또 그런 걸 결심할 정도로 이곳의 생활이 아주 고단한 것도 아냐.”
브레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담배 생각이 나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말하자면, 용기가 부족해. 게다가 우투그루는, 누가 놓아주려 하겠어? 그 망할 귀부인은 우투그루를 자기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고 있고, 클루스도 아저씨는 자기 아들이 안쓰럽지만 그뿐이야. 그는 더 나서는 걸 피곤해해. 굳이 집안의 문제를 겉으로 티 내기도 낯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원래 그 나이대의 아저씨들이야 다들 그렇지만.”
“그래서 손 놓고 있었단 거야?”
브레딕은 내 말에 혀를 내둘렀다. 말했잖아, 나도 노력했다고! 그는 돌연 벌떡 일어나 방에 딸린 작은 주방으로 가더니 주전자에 떠 놓은 물을 넣고 끓였다. 조금 진정하려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브레딕이 말했다.
“이런 이야기 하는데 맨손이면 너한테 주먹질을 할지도 몰라.”
브레딕은 물이 끓자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차를 내왔다. 침착하게 보였지만 내 앞에 찻잔을 놔주는 손이 은근히 거칠었다. 평소 느긋하고 부드러운 편인 그의 성정을 생각하자면 별일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고 홀짝였다. 그리고 곧장 씹어뱉듯 말했다.
“젠장, 전혀 진정이 안 되네. 어디까지 했었지? 그래, 나도 노력했다고……. 진심이야.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 여건만 되면 바로 우투그루와 휴가를 핑계로 다른 섬으로 날라버릴 거라고.”
“가능하겠어?”
내 물음에 브레딕이 우는 것처럼 얼굴을 씰룩였다. 그는 찻잔을 내려두고 말했다. 아니.
“검은바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찾아댈 게 뻔하지. 그렇다고 진짜 도피하기엔, 글쎄. 그건 또 클루스도 아저씨가 가만히 둘까. 겔라 부인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투그루가 원하지 않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희 친구를 뛰어넘은 사이는 아니지? 그럼 끼어들기 민망해지는데.”
내가 참지 못하고 묻자, 한차례 브레딕의 작은 약방 같은 집이 떠나가라 욕설이 울려댔다. 야! 너는! 친구가! 해주는! 호의도! 이상하게! 보는! 거니! 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격분한 브레딕에게 나는 귀를 막고 외쳤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농담도 못 하게 해.”
“지금 상황이 농담할 상황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한 차례 소강상태가 지나가고 브레딕이 다시 침착하게 차를 마시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래서 네가 알게 된 건 좀 의외였어.”
나는 별 뜻 없이 되물었다. 아닌 것 같은데? 브레딕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 사실, 아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 그렇지만 대부분이 우투그루에게 협박을 당하거나…… 스스로 관심을 두지 않거나……. 더 옛날엔 그냥 평범한 집안 훈육이라고 넘어가곤 했지.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손찌검까진 몰라도 겔라 부인이 우투그루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 거야.”
하지만 이런 일은 남이 섣불리 나서기엔 너무……. 말을 얼버무리던 브레딕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는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미약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그럼 무슨 생각이라도 있던 거야? 내가 알게 되면 뭐가 바뀌는 계획 같은 게?”
“사실 나는 그냥 네가 아는지 궁금했어. 우투그루와 가장 친한 친구는 너니까.”
나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래서 네가 알고 있는지 좀 중요했지. 적어도 내가 할 일을 상의해볼 수는 있잖아.”
“……뭔가 정말 본격적으로 저지르려는 것 같은 대사라서 굉장히 불안해진다. 나 차 좀 더 끓여 와도 될까?”
“일단 들어. 말하기 전에 먼저 일러두는데…… 내 특기는 깽판이야.”
브레딕이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착하게 주전자에 물을 넣어 더 끓이기 시작했다. 차가 아니라 진액이 우러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걱정하지 마, 소소하게 칠 거야. 마을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모른다고 하니까 됐어. 겔라 부인에게 그러지 말라고 못을 박아야지. 이왕이면 클루스도 아저씨한테도…….”
“너 진짜 겁도 없어!”
브레딕이 결국 기함하며 내게 외쳤다.
“절대 안 돼! 너는 절대 손대지 마! 네 그 깽판이라는 거, 어떨 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절대 아냐!”
“하지만…….”
“제발, 로트! 이제 며칠만 있으면 출항이야. 우투그루도 그 집에서 나와 배에서 지낼 수 있어. 배에서도 아버지만 챙기는 효자 놈이라 나도 속 터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섬보단 나아! 어쨌든, 정말로 내일모레면 출항이잖아. 얌전히 있어.”
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그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래, 정말로 어떨 때는 내가 앞뒤 안 가리고 나서서 나아졌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대부분은, 정말 많은 경우에서 그건 오히려 악효과였던 때가 많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식어있어 나는 금방 찻잔을 내려두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내 대꾸에 브레딕은 안심한 듯 숨을 길게 내쉬고, 내 찻잔에 따뜻한 차를 다시 따랐다. 하얀 김이 잠시 올라왔지만 손댈 마음은 사라졌다. 나는 차를 바라보다가 브레딕에게 물었다.
“그럼 뭘 하는 게 좋지?”
“왜 굳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나는 그 말에 어쩐지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나는 다시 대꾸했다. 나는 이만 가볼게. 브레딕이 차를 마저 마시고 가라고 말했지만 나는 약간 경황없는 것처럼 그의 집을 벗어났다.
왜 굳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거야? 그러게. 왜 굳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하지만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내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할 자격이 있나? 나는 조금 불쾌해졌다. 뭐란 말이야, 방금 그 생각은. 우투그루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서란 거야? 나는 길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때로는 내가 나서는 게 도움이 안 될 때가 있어.
이미 신물 나게 겪어봤잖아.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 내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정말로 잘난 척밖에 되지 않아.
넌 대단한 사람도 뭣도 아냐! 바로 뒤에서 들린 것 같은 목소리에 홱 돌아봤지만 내 뒤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계속 걸어갔다. 그래, 이제야말로 정말로 마음을 접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브레딕도 날 말렸고, 우투그루도 바라지 않아.
정말로 그런 일은 이제 됐어. 내 일에만 신경 쓰자.
그리고 그래야만 해. 나는 기운 빠진 걸음으로 키이엘로의 집을 향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