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59)
바다새와 늑대 (58)화(59/347)
#58화
네토르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이 공포로 하얗게 표백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그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헤더가 급히 일어나 그를 붙잡았다.
“네토르, 진정해봐. 우리 아직 로트 이야길 안 들었고…….”
“여자라고? 농담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춤 일어났다. 발밑이 선뜩했다.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었다가도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텅 빈 것 같다가도 온갖 복잡한 생각이 우글우글 기포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많은 생각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무수한 물음표만 만들어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이제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남자인 시늉을 할까? 아니, 그럼 그때는 변명할 여지없이 정말로 사기꾼이 되고 말잖아. 그렇다고 여자라는 걸 인정해?
‘계집년이 어딜 섬 밖을 나돌려고 해!’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네토르를 붙들고 있던 헤더가 놀라서 내게 달려와 내 등을 쓸었다. 신입, 괜찮아? 너 안색이 안 좋아……. 침착해, 신입. 신입! 로트! 나는 헤더의 손을 밀어내고 네토르와 눈을 마주했다. 입을 여는 짧은 순간에 섬광처럼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여자라는 걸 네토르가 알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배에서 내리나? 내가 그들을 속였다고 생각할까? 랄티아를 구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이들이 날 괘씸하게 여겨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설득하다가 발카의 얘기가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야 해? 아냐, 키이엘로나 도멤이 날 도와줄 거야.
그 애들이 과연 날 도와줄까?
나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붙들어 기대서고 싶은 마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키이엘로나 도멤이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디디고 섰던 땅이 사실은 살얼음판이었다는 것처럼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말했다.
“비밀로 해줘.”
그렇게 내뱉은 나는 내 스스로를 마구 때리고 싶었다. 이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달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네토르가 의미 모를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헤더가 네토르를 보았다. 그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내가 왜?”
“……부, 부탁이야.”
나는 멍청이처럼 말하면서도 깊은 치욕감을 느꼈다. 애초에 왜 내가 여자라는 것을 이렇게 감추고 조마조마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불합리함과는 별개로 나는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생각했다. 정말 정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고 빌자. 그리고, 그리고……. 그래도 안 된다면…….
나는 테이블 위의 포크를 보았다. 그때는 그냥 저놈 목을 찌르고 바다에 던진 뒤에 배를 훔쳐 달아나야지. 헤더는…… 헤더도 입막음하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순간, 네토르는 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너무 거대하게 보였다.
네토르가 다시 똑같이 물었다. 내가 왜? 나는 울컥해 소리쳤다.
“나도 속이려는 생각은 없었어! 나는 내 여동생만 되찾으면 이 해적선에도 더 머물지 않을 거야. 우홉피아주에게서 내 여동생을 되찾을 때까지만 비밀로 해줘. 제발.”
네토르는 말없이 나를 보았다. 저 자색 눈동자가 지금처럼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지? 내가 여자라는 걸 들켜서……. 왜 여자면 안 되는데? 몰라, 망할! 내가 내내 들어온 답은 ‘계집년은’이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뭣 같은 말들뿐이었다고!
나는 테이블을 짚는 척 손가락으로 포크의 손잡이를 건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던 절망감 사이로 분노가 차가운 한기를 흩뿌리며 기어 올라왔다.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도 이보다 차갑진 않으리라.
분해. 화가 나……. 모두가 내 존재를 부정하고 내가 있을 곳을 지우려 해. 나는 그것들에 등 떠밀릴 때마다 혹한 같은 분노를 상기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포크를 단단히 쥐고 네토르에게 다시 말했다.
“비밀로 해줘.”
네토르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헤더는 혹시라도 그가 도망갈까 두려웠는지 정원 대문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네토르가 그녀를 밀치고 달아난다면 헤더가 그곳을 막고 있는 건 사실상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조금 고마웠다.
잠시 동안의 정적 후에, 네토르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좋아.”
나는 반사적으로 포크를 손아귀에 말아쥐다가 약간 얼이 빠져서 그를 보았다. 헤더도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를 보았다. 뭐라고? 내가 되묻자, 네토르는 한숨을 쉬고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알았다고. 비밀로 해줄게.”
내가 눈만 깜빡이며 서 있자, 그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대신 조금 정리 좀 하자…….”
나는 느리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는데, 미처 놓지 못한 포크를 보고 네토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왜 쥐고 있어? 그 말에 정직하게 말해줘야 하는지 짧게 고민한 나는 간단하게만 말했다.
“왜일 것 같아?”
네토르는 입을 일자로 펴며 내 시선을 피했다. 헤더까지 둥글게 모여 앉자, 네토르가 입을 열었다.
“너 대체 왜 남자라고 속인 거야?”
“속인 적 없어. 멋대로 오해받은 걸 해명할 기회가 없던 거야.”
“그럼 왜 남장을 하고 있는데?”
“대체 내 어디가 ‘남장’인 건데? 그냥 머리 좀 짧고 바지를 입었을 뿐이잖아.”
나는 그가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이 그가 대답한 순간 내가 공격을 실패한 뒤 역습받아 정신을 잃고 꾸는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놈이 소름 돋게 왜 나에게 욕설이나 비꼬는 말 없이 평범하게 말을 한단 말인가? 내가 두드러기가 난다는 반응을 보이든 말든, 네토르는 머리를 짚으며 입술을 말아 물더니 다시 물었다.
“보통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적어도 어깨 정도의 길이로 유지하잖아. 왜 그렇게 남자처럼 짧은데?”
“사정이 있어. 아니, 너 무슨 늙은이냐? 바지 좀 입고 머리 짧으면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
“그래, 그럼 정말로 내가 그동안 여자애랑 치고받고 싸웠단 소리네? 갈 데까지 갔군!”
나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내 비밀을 지켜준다고 그간의 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더 경계하며 네토르에게 말했다.
“네가 내 비밀을 지킨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어?”
“……그 포크 내려두고 대화하자.”
“무슨 심경의 변화야?”
내가 포크를 내려놓을 기미가 없자, 네토르는 포기한 것 같았다. 그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말했다. 나는 신사라고. 여자를 상대로 그런…… 경박한 언행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놀고 자빠졌네, 그냥 사람한테 입을 안 털면 되는 거 아냐?
나는 네토르를 노려보며 강조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냐고. 겨우 네가 여자에게 ‘신사답게’ 굴고 싶어 한다는 점만 맹신하기엔 부족해.”
“좋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게. 나도 검은바다에 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나도 목적이 달성되면 바로 검은바다를 떠날 수 있어. 이들에게 과한 충성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야. 이해돼?”
그 말에 헤더가 눈을 크게 떴다. 너……. 나는…… 전혀 몰랐어! 그런 헤더에게 네토르는 가뿐하게 대꾸했다. 그야 내가 딱히 말한 적 없으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네토르를 보았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내가 물었다.
“그럼 그 따로 있는 이유가 뭔데?”
“물론 우홉피아주야. 그들이 싫지 않았다면 검은바다에 오르진 않았겠지. 하지만 정확히는…….”
네토르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그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어. 나는 미간을 좁혔다. 사람? 네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로 올린 양손을 깍지 껴 잡았다. 침잠한 눈동자가 테이블 위를 느리게 훑었다.
“……내게 형제 같던 사람이 있어.”
검은바다는 우홉피아주를 쫓아 많은 바다를 돌아다니니까,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나는 그에게서 딱히 거짓의 낌새가 없는 것을 읽고 포크를 내려두었다. 헤더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적어도 이제 로트가 이 섬에 갇힐 일은 없겠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헤더.”
“뭘.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니까. 너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게 아니라 그냥 반항심에 섬에서 뛰쳐나온 거였다고 해도 난 널 도왔을 거야.”
“헤더는 바다로 가고 싶지 않아요?”
내 물음에 헤더는 씩 웃었다.
“물론 나도 가고 싶어. 하지만 안 되니까……. 적어도 더 갇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나는 헤더를 응원해요.”
나는 출렁이는 속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헤더에게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헤더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보조개가 보이도록 호쾌하게 웃었다. 나는 정말로 헤더에게 고마웠다.
그런데도 계속 밀려 들어오는 파도처럼 마음은 계속 물결치며 도통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발밑이 꺼지는 것 같던 감각이 아직도 발바닥에 눌어붙은 듯 선뜩했다.
이 감각을 좀 떨쳐내고 싶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내심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요동치는 마음을 찔러 더 술렁이지만 않게 할 뿐이었다.
네토르에게 수십 번을 넘게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은 나는 헤더의 정원에서 나왔다. 사실은 아직도 불안했다. 네토르가 생각보다 순순하게 나왔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던 그는 더 내게 덤비려 하지도 않았고, 정말로 진지하게 내게 비밀을 지킬 것임을 약속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누군가 내 약점을 쥐고 있다는 기분은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땅에 발을 디디며 걸음을 내딛으면서도 허공을 걷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안심이 될 리가 없어. 오히려 더욱 불안해…….
네토르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비교적 우호적으로 바꾸는 것을 보며 조금쯤은 안도해도 좋을까? 다른 이들도 내게 우호적일 거라고? 하지만 그는 고작 그런 것으로 태도가 뒤바뀐다는 하나의 선례가 되어준 것이다. 내가 여자라는 게 알려졌을 때 그처럼 태도가 돌변하는 이들이 없겠는가? 어쩌면 키이엘로와 도멤까지도…….
걸음을 뚝 멈춘 난 잠시 숨을 느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우울감이 무거운 추처럼 달라붙어 발이 느려졌다.
나는 키이엘로의 집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바다와 맞닿은 백사장으로 갔다. 내 고향에서나 하던 짓을 여기서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조소를 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서쪽에 걸리기 시작한 해는 아직도 밝았기 때문에 바다는 푸르기만 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검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하겠지. 역시 이 섬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 이 섬도, 내일 타고 가게 될 배도, 바다도…….
랄티아를 찾아 새로운 거처를 찾기 전까진 검은바다의 선실이, 우리 셋이 있는 그 해먹이 발붙일 곳이라고 아주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보라. 대체 어디에 내가 설 자리가 있단 말인가? 나는 눅눅하게 생각하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주 만약에라도 내가 감추고 있는 것들이 밝혀져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꿈같은 착각이지. 불안해서 어디에도 머물 수가 없었다. 땅이든 바다 위든 내가 머물 곳이 없어…….
그런데도 왜 매번 내 시선과 걸음은 바다로 흘러가는 걸까. 그 깊이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푸른 사막으로.
나는 바다를 향해 혼자 중얼거렸다.
“널 따라가면 어디로 가게 되는 거야?”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파도치는 소리만 밀려와 소란스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