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63)
바다새와 늑대 (62)화(63/347)
#62화
나는 느리게 숨을 가다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갑자기 랄티아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어. 무언가 잘못되었다. 머리로는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땀에 미끄러지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저건 가짜야.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도와줘…….”
결국 번뜩 뒤를 돌아본 나는 뿌연 안개만을 마주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랄티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화가 난 건지, 그렇게라도 헛된 것에 기대해보고 싶었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아까 같은 유령선원이라도 있으면 나았을까. 나는 잠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하는 수 없나……. 안개 안에서 어떻게 랄티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는 몰라도 어차피 갑판 위였다.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선원과 마주칠 것이었다.
나는 오싹함을 떨치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
꽤 가까이에서 들린 목소리에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든 검을 몇 번 고쳐 쥐었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가로질렀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선원은커녕 갑판의 끝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갑판을 몇 번을 가로질렀을 정도를 걷고 난 뒤에야 자리에 멈춰 섰다.
뭔가 아주 이상했다. 단순히 안개 탓에 방향을 잘못 잡아 갑판을 잘못 돌고 있다고 해도 다른 선원들의 기척이 과하게 없었다. 이쯤 돌아다니면 몇 명은 마주쳐야 정상이었다. 나는 생각하면서 발로 바닥을 툭툭 쳤다. 나무를 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난 갑판에 있는 게 맞는데, 대관절 이 안개가 무슨 작용을 하기에…….
그때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굴러갔다.
“누나! 여기야!”
나는 그 목소리에 흠칫 떨며 고개를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렸다. 차가운 분노가 안개처럼 바닥을 기었다. 감히…… 감히 내 동생들 흉내를 내? 이번만큼은 선명한 분노로 이가 저절로 갈렸다. 나는 화가 묻어나는 숨을 감추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양옆에서 히히히,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고개를 홱 돌리자 목소리는 뚝 그쳤다. 검을 허공에 휘두르고 싶었지만 눈먼 검에 혹시라도 가까이 있는 선원이 맞을까 걱정이었다. 나는 검 자루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관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재촉하듯 목소리가 굴러들어왔다.
“언니, 이리 와…….”
“안 속아.”
나는 부러 소리 내 중얼거리며 팔짱을 끼고 불만스레 발을 굴렀다. 차라리 이대로 안개가 걷히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나을까? 다시 생각하니 또 걱정이었다. 항로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또 이상한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언니는 날 보기 싫어? 랄티아의 목소리로 흐느끼는 울음을 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생각을 이었다.
이미 제국 방향으로 가겠다던 항로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버렸다. 시간이 아까운데 계속 이런 괴이쩍은 일에 휘말리는 건…….
“이 망할 년이 기어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구나!”
나는 피가 식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울컥 치솟는 울분에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가 이내 주먹을 말아쥐며 멈춰 섰다. 아냐, 정신 차려. 몇 가지 목소리가 이리저리 바뀌는 걸 보면 정말로 안개 너머에 있는 것은 실제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껏 들린 목소리의 주인들은 모두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이니까. 안개 속에 숨은 이상한 것에 홀리면 안 되지.
그러나 귓가에 계속해서 랄티아가 우는 소리가 달라붙었다. 언니는 나도 버릴 거야……. 언니는 사실 날 구할 생각이 없지? 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저건 내 동생이 아냐. 알고는 있지만……. 결국 내 손이 검을 빼 들었다.
랄티아의 목소리가 이때다 싶었는지 말했다. 그래, 이리로 와줘, 언니.
“닥쳐!”
나는 결국 버럭 외치면서 검을 휘둘렀다. 멀리 뻗지 않고 주변의 안개를 가르듯 휘두르자, 일순 짙은 안개가 밀려나 그 사이로 갑판의 바닥이 희미하게 보였다. 찰나에 발견한 무언가를 보고 난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검을 내리찍었다.
‘깩!’하고 갈라지는 단말마가 들리는 것과 함께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에는 유령선이 포탄 대신 쐈던 사람 머리가 있었다. 그것은 검에 꿰뚫린 입을 딱딱거리며 목소리를 뽑아내고 있었다.
“이…… 나쁜….”
“이건 또 뭐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검을 휘둘러 머리를 털어냈다. 저 머리들이 타격도 없는 공포 조장용 박 터트리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쓸 계획이었다 그거지? 그러나 무언가 놓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찜찜하게 걸리는 것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저 머리들이 왜 나를 어디로 유인하는 거지? 유인할 곳이 어디 있다고?
천천히 안개를 헤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이 바다에서 유인할 곳이라면 지금, 한 곳이 있다. 유령선! 유령선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나는 급한 마음에 다시 검을 휘둘러 안개를 가르며 외쳤다.
“다들 바닥을 봐요! 바닥의 머리가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애초에 안개가 무슨 작용을 하는지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게 들리는 다른 선원의 목소리도 없으니 선원들도 내 목소리를 못 듣는다고 생각해야겠지…….
낭패였다. 그러나 머리가 가까이 온 것인지 내가 가까이 간 것인지, 다시 바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머리는 마치 목에 피가래가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다가 내가 다가오자 랄티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언,”
나는 끝까지 듣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머리가 있던 주변의 안개가 조금 걷혔다. 나는 다시 소리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코앞에서 마주친 키이엘로의 얼굴에 깜짝 놀라 꽥 비명을 질렀다.
“으악, 미친!”
“와악! 로, 로트?”
“키이엘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그의 얼굴이 약간의 물기에 젖은 것을 보고 얼른 손으로 그의 턱을 쥐었다. 그에 키이엘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나는 그것이 다른 변수가 아니라 키이엘로의 눈물인 걸 알아채고 빠르게 손을 내렸다. 이것 참 민망했다.
“괜찮아?”
“아……. 응.”
키이엘로는 자신이 눈물을 흘린 걸 들켰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어색하게 그의 어깨를 툭 치고 검 끝을 들었다. 그에 키이엘로가 내 검의 끝에 달린 머리통을 보고 침착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거였구나.”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검을 털어냈다.
“아무래도 이것들이 유령선으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속셈인 듯해. 머리를 찌르면 안개가 조금 걷히는 것 같고.”
“…….”
키이엘로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기분이 좀 가라앉아있는 것을 눈치챈 나는 뭐라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을 더 안개 너머로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둘이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지만 명확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키이엘로와 나는 그냥 한시라도 빨리 머리통을 찾아 박살 내기로 결정했다.
나는 소매를 묶은 끈을 풀어 그의 허리와 내 허리를 묶었다. 키이엘로가 말이 막힌 듯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저 안개 안으로 들어갈 건데 그냥 들어갔다가 서로 떨어지면 어떡해? 그렇다고 팔을 묶거나 서로 손을 잡기엔 전투가 있을 경우에 대비하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지.”
내 말에 키이엘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 묶은 끈을 살피더니 자신도 검을 꺼내 들었다. 가자. 나는 키이엘로가 말하자 곧바로 안개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사위가 희뿌옇게 물들자 나는 당장 뒤를 돌았다. 그러자 바로 뒤에 붙어 따라오던 키이엘로가 눈을 둥글게 떴다.
나는 깜짝 놀라 왁, 하고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다가 길이가 다한 끈에 걸려 휘청였다. 키이엘로가 나를 붙잡고는 눈썹을 휘었다.
“깜짝아. 왜 그래?”
“혹시나 떨어졌나 확인하려다가 너무 코앞에 있어서…….”
내가 끈에 조여진 허리를 문지르며 대답하자 키이엘로가 어색하게 웃었다. 쟤는 어떤 거리에도 얼굴에 굴욕이 없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가자.”
“아까 날 어떻게 찾아낸 거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소리 안 들려. 근데 어느 정도 지척에 가면 머리통이 내뱉는 소리는 들리는 것 같아.”
내 말에 키이엘로는 멈칫 걸음을 세웠다. 졸지에 다시 허리가 조여진 내가 켁, 하는 소리를 내자, 그는 놀라서 허둥지둥 괜찮냐고 물어왔다. 나는 손을 내젓고는 얼얼한 허리와 끈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한숨을 쉬었다. 왜 갑자기 멈춰? 그렇게 묻자 키이엘로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꽤 오랜만에 보는 키이엘로의 소극적인 모습에 나는 가볍게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오래 못 기다려줘. 빨리 말해.”
“머리가…… 내게 하던 소릴 들었어?”
“자세히는 못 들었어. 내가 더 가까워지니까 그 머리가 다시 내게 하던 소리로 바꾸던데.”
키이엘로는 침착하게 눈을 내리깔며 ‘그래…….’하고 말하더니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람. 대가리가 키이엘로를 놀리는 말이라도 했나? 나는 어깨만 으쓱이고 그를 따라 안개를 헤쳤다. 곧 주변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투그루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웅얼거림에 나와 키이엘로가 고개를 퍼뜩 들고 서로 마주 보았다.
“들었어?”
“응. 가자.”
나와 키이엘로는 서둘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검으로 안개를 갈랐다. 그 틈새로 보이는 머리를 향해 내가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그때 나와…… 켁!”
머리가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쥐 같은 소리를 내며 조용해지자, 주변의 안개가 조금 걷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휘둥그레 한 눈으로 날 보는 브레딕과 마주하고 눈을 크게 떴다. 키이엘로가 안개를 헤쳤던 검을 회수하며 브레딕에게 물었다.
“뭐야? 우투그루는?”
“뭐? 그쪽에 있었잖아?”
나는 브레딕과 검 끝에 꿰인 머리통을 갈마보다가 안개 사이에서 들리던 우투그루의 목소리를 상기하고 브레딕을 힐끔 흘겼다. 내가 물었다.
“너…… 안개 사이에서 우투그루와 대화했어?”
“……혹시 그게 들렸다면….”
“무슨 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냐. 너 방금까지 이거랑 대화하던 거야.”
사생활 보호가 되는 안개라 다행이지? 내가 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자 그 끝에 달린 머리통을 본 브레딕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래. 어쩐지. 그가 허망하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었다.
키이엘로는 내 검 끝에 매달린 머리통과 브레딕을 번갈아 보다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에게 작게 속닥였다.
“걱정 마,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더라.”
“딱히 그런 생각에 쳐다본 거 아냐, 로트…….”
그보다 서둘러야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브레딕에게 다가가는데, 빠르게 페이스를 되찾은 브레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나와 키이엘로의 허리를 묶은 끈과 내 다른 쪽 소매에서 풀어낸 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묘하게 얼굴을 비틀었다.
“그건 또 뭐야?”
“안개 속에서 떨어지면 곤란하잖아.”
“나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는 말아줘.”
거 우리라고 이 나이에 칙칙폭폭 기차놀이 하고 싶었겠냐. 당장에 험악한 생각부터 들었지만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다시 안개 속에서 우투그루 목소리랑 오붓하게 대화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브레딕은 말없이 키이엘로와 자신의 허리를 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