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75)
바다새와 늑대 (74)화(75/347)
#74화
요한은 어느 바다에 우리가 들어왔든 요리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이번 유령의 바다가 퍽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바닥에서 솟아났던 유령선원들 때문에 몇몇 식재료를 버려야 했다며 연신 화를 냈다. 요한이 아무리 주방에만 박혀있다지만 그도 해적질하는 뱃사람이라서 그런지 주방에는 간간이 미처 청소하지 못한 유령선원들의 잿더미가 풀풀 날렸다.
내가 그것들을 빤히 보고 있자 요한은 멋쩍은 기색으로 요리할 때는 깨끗하게 다 치우고 한다며 위생에 대해 열심히 변호했다.
아무렴 난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으나 요한은 안도하면서도 그런 내 반응이 못내 섭섭한 것 같았다. 뭐가 섭섭한 거지. 설마 관심을 안 가져준다고 섭섭한 건 아니겠지. 요한, 넌 속고 있다니까? 나는 떨떠름하게 그를 보다가 관뒀다.
도멤의 허기를 채우고 나도 대충 에일이나 몇 잔 마신 뒤 우리는 주방에서 나왔다. 바다는 아직도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시간도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키이엘로가 말했다.
“유령의 바다 근처는 대부분 불길한 바다뿐인데…….”
“그러게. 험하기로 유명한 무인도 지대니까……. 눈물의 바다로만 안 가면 되지, 뭐…….”
도멤이 맞장구치는 것을 흘려들으며 나는 하늘을 노려보다가 발카를 보았다. 발카는 잠시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피더니 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발카가 내게 뭐라고 하려는 것 같던 순간, 나는 노상 갑판에서 헤더를 발견하고 그녀를 불렀다.
“헤더!”
헤더는 선미루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 기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 내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멤과 키이엘로도 내 부름에 그녀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하자, 헤더는 단발로 잘려있는 머리카락을 벅벅 긁다가 한숨을 쉬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대화는 끝났어, 누나?”
도멤의 물음에 그녀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절대 대화가 ‘잘’ 끝난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헤더는 불퉁한 얼굴로 선미루 쪽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게 ‘대화’라고 볼 수 있다면, 끝났지.”
“결론은 어떻게 되었나요?”
“몰라. 클루스도 아저씨랑 상의한대. 정말…… 정말 이해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배에 오르면 안 되는 거야?”
우리는 잠시 헤더의 눈치를 보았다. 헤더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약하게 섞여 있었고, 분개심에 어긋난 숨소리가 난폭하게 끼어있었다. 도멤이 어깨를 으쓱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치만……. 누나가 걱정되기는 해. 누나는 싸우는 방법도 모르니까 디겔 아저씨가 걱정하시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헤더는 도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싸우는 거야 배우면 되지.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배에 올랐겠어? 나라고 아무 생각이 없었겠니?”
그렇게 말한 헤더는 입을 꾹 다물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차오르는 감정을 도닥이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앞에서 크게 흥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어 번 난간 너머로 파도 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헤더가 쏘삭이듯 덧붙였다.
“나도 위험을 각오하고 올랐어. 모두가 그랬듯이.”
나는 말없이 헤더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이내 냉소적인 태도로 도멤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싸움질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선원들이 날 순순히 배에 태울 것 같아?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
도멤이 당황한 듯 입을 뻐끔거리자 헤더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네 탓도 아니니까. 말마따나 막무가내로 올라탄 건 내가 맞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이마를 짚고 갑판을 보았다. 그리고 한탄하듯 되뇌었다. 그래, 내가 맞지…….
그때 뒤에서 누군가 헤더를 부르며 뛰어왔다. 프라세였다. 열네 살의 소년은 헤더를 보고 활짝 웃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얘기는 들었지만 누나가 왜 여기 있어?”
“얘기 들었다면서? 내가 몰래 올라탄 거야.”
헤더의 깡마르고 작은 체구는 프라세보다 약간만 더 큰 정도였다. 헤더는 프라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조하듯 헛웃음을 지었다.
“열네 살보다 못 미더운 스물여섯이란 거지.”
그 말에 도멤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조용히 헤더를 보다가 물었다.
“디겔 아저씨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녀는 나를 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세에게 저리 가라고 손을 젓자 프라세는 어른들끼리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베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헤더는 프라세가 멀어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냥, 예상했듯이……. 위험한데 무턱대고 왔느니, 이제 돌아가는 것도 문제고 남아있는 것도 문제라느니, 내 철없는 행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아느냐, 뭐 그런 이야기지.”
“그냥 예상한 이야기만 들은 것 같진 않은데요.”
내 말에 헤더는 입을 꾹 닫았다. 입술을 사려 물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는 곧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듣기만…….
“말을 듣기만 해서 그래.”
“네?”
“젠장,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아무것도 못 했어. 그냥, 일방적으로 고함만 듣고 온 거지. 망할, 그리고 나한테 뭐라 한 줄은 알아? 정원은 어쩌고 여기로 왔냐고 하더라.”
헤더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해서 잠시 말을 멈추지 않으면 너무 많은 걸 쏟아낼 것처럼 그랬다. 그녀는 머리를 짚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빠는 내가 중요한 걸까, 엄마의 정원이 중요한 걸까? 그 말에 도멤이 움찔하며 헤더를 보았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을 고르지 못하고 헤더의 어깨를 토닥였다. 헤더는 내 손길에 살짝 웃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는 손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 일단 결정 날 때까진 여기 있어야겠지.”
“돌아간다고 결정되어도 당분간은 여기 있게 될걸.”
“왜?”
“우리가 지나온 바다는 유령의 바다잖아. 이 주변은 위험한 해역이 많아.”
헤더에게 설명해주던 키이엘로가 잠시 멈칫하더니 의아한 얼굴로 헤더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유령선원 안 만났어? 헤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고에 숨어있었다더니 다행히 그 괴이쩍은 시체들과 마주치진 않은 것 같았다. 운이 좋았던 모양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안도했다.
도멤이 유령선원에 대해 설명해주더니 근심 어린 얼굴로 헤더를 보았다. 그래도 불안한데, 누나 싸움은 배워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나 그녀가 뭐라고 더 말을 꺼내기 전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간부진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겠지.”
네토르였다. 나는 꺼림칙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냥 배에 있을 때는 마주치는 일도 별로 없었으니 생각할 일도 없었는데 헤더까지 배에 오르자 자연히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 떠올랐다.
네토르는 헤더를 보다가 나를 흘끔 보고는 다시 덧붙였다.
“어떻게 결정될지 모르는 일에 벌써부터 힘 뺄 생각 마.”
그러자 헤더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다가 금세 고개를 들고 사뭇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맞지. 이따가 생각해보자고. 그러나 헤더는 이내 작게 한탄했다.
“내 일인데 내가 아닌 사람들이 상의하고 있네.”
나는 그 말에 무력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기실 디겔이 헤더의 아버지이기에 헤더를 걱정하고 혼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그녀가 벌인 일은 그녀와 함께 상의해야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지 않나?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조차도. 나는 입을 다문 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헤더는 섬에서 나를 지지해줬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주먹을 쥔 손을 천천히 펴다가 고개를 들었다. 네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내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헤더의 일이잖아.”
딱히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 입을 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네토르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왠지 입이 틀어 막히는 기분이었으나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저들끼리만 결정하는 거지?”
그건……. 도멤이 난감하게 말했다. 배에서는 위쪽 명령을 들어야 하니까. 그러나 나는 일개 선원 주제에 그들의 이야기 중 끼어들어 그들의 결정을 번복하게 한 전적이 있었다.
나와 헤더의 경우가 다르단 건가? 상황이 다른 건가? 네토르는 의미 모를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지껄였다.
“헤더와 똑같은 조건의 남자가 배에 몰래 올랐어도 이랬을까?”
그 말에 헤더는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슬픈 얼굴을 했고, 도멤은 황망한 얼굴을 했다. 그때 옆에서 키이엘로가 나를 보았다. 네 말이 맞아. 키이엘로는 내게 짧게 동의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동의를 들어 기뻐해야 하는가? 하지만 여전히 나는 무력감만을 느꼈다.
그때 키이엘로가 말했다.
“헤더, 나랑 같이 선장실로 가자.”
그 말에 헤더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 나도 그의 말에는 조금 놀랐다. 무엇보다 키이엘로는 스스로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시선에 키이엘로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별수 없잖아. 헤더 혼자 갔다간 문전박대만 당할 거고. 물론 네가 가서 말해도 되긴 하겠지만, 계속 간부진의 일에 끼어들면 알게 모르게 눈총을 받을지도 모르고. 적어도 난 이름이나마 간부진이니까 동행해서 헤더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키이엘로…… 이 짜식……!”
헤더가 감동했다는 얼굴로 키이엘로를 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한숨을 쉬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한테 고마워할 일 아닌 건 누나도 알잖아.”
키이엘로가 헤더와 선미루로 올라가자 갑판 위에 남은 도멤과 네토르와 나는 그들의 뒤를 보고만 있었다. 둘이 선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 도멤이 그나마 쾌활하게 말했다.
“잘되면 좋겠다, 그렇지?”
“그러게.”
그나마 키이엘로의 도움으로 헤더가 자기 의견을 피력할 기회가 생기긴 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널뛰듯 좋아지진 않았다. 스산한 무력감만 어깨에 더 얹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나오길 기다리며 선미루로 향하는 계단에 기대서 시답잖은 대화를 하는 내내 네토르는 무슨 꿍꿍이인지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고 우리 옆에 있었다.
도멤이 혹시라도 나와 네토르가 싸울까 내심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나나 네토르나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발카가 내게 말을 걸었다.
『로트.』
나도 모르게 대답하려 했다가 네토르를 의식하고 눈만 마주치자, 발카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나를 마주 보았다. 이상한 낌새에 내가 미간을 좁히자, 발카가 부리를 열었다.
『여기……. 우리가 지나온 곳이…… 유령의 바다랬지?』
나는 그 어색함을 견디고라도 다급하게 묻는 태도에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발카에게 답하는 대신 도멤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우리 유령의 바다를 벗어났나?”
내 물음에 도멤이 바다를 살피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 이제 안개도 없고 유령선도 안 쫓아오니까 적어도 변두리로 나온 건 맞아.”
“그 주변에 위험한 해역이 많댔잖아.”
“응.”
무인도 지대가 대체로 위험하지. 거기까지 답한 도멤은 문득 나와 마주치던 눈을 발카에게 돌렸다. 그는 발카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녹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로트, 잠깐, 설마…….”
그러나 나는 도멤의 말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노상 갑판의 난간 위에 무언가 얹어져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간에 턱을 댄 그것은 우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통이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물미역처럼 늘어져 있었고, 흰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그래서 더 기이했다.
아직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머리통은 얼굴을 쭈그러뜨리는 것처럼 일그러뜨리더니 입꼬리를 쭉 찢으며 웃었다.
“도멤.”
내가 입을 열자 그것이 난간에 걸쳐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흰 목은 아래로 갈수록 점점 깃털이 나 있었다.
다리가 없는 새의 몸통과 이어지는 목의 경계는 작은 깃털이 듬성듬성해서 본능적인 혐오감이 들었다. 그제야 몇몇 해적들이 그것을 발견했는지 어? 하고 실없는 감탄사를 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려는 도멤을 붙든 내가 빠르게 말했다.
“당장 선장실에 가서 위험하다고 말해.”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까만 날개가 기름 같은 찐득한 액체를 흩뿌리며 난간을 쾅 짚었다. 난간이 우두둑 부서졌다. 나와 같은 것을 본 네토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도멤의 어깨를 꽉 쥐고 외쳤다.
“어서!”
“세이렌이다!”
거의 동시에 네토르가 외치며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도멤의 등을 떠밀자 그가 선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곧장 칼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세이렌이 마치 지면에 튄 빗방울처럼 꽝, 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세이렌의 입 안에 무수한 이빨이 있는 것을 알아챈 순간 누군가 소리쳤다.
“눈물의 바다에 진입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