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78)
바다새와 늑대 (77)화(78/347)
#77화
선실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세이렌과 인어가 소리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갑판에서는 열었던 포문을 다시 모두 닫고, 노상 갑판의 선원들이 세이렌을 해치우는 동안 선실에 남아있던 비전투 인원들은 숨을 죽였다.
세이렌이 사라지고 인어들도 바다로 쳐내게 되자 남은 인어들은 스스로 바다를 향해 기어들어 갔다.
전투 인원들은 지독한 검은 액체를 잔뜩 뒤집어썼는데, 이왕 범벅이 된 김에 조용히 갑판까지 청소하라는 위대한 명령까지 하사받았다.
내가 할 말 많은 얼굴로 밀대를 받아들자 요한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욕하거나 쿵쾅대지 말래이. 고 괴물 놈들이 또 오믄 우쨔려고?”
“그땐 네놈을 먹이로 던져줘야지…….”
“하고마, 살벌하고만.”
작게 웃은 요한이 내 팔을 장난스레 툭 치려 했지만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내가 슬쩍 피하자 손을 설설 젓는 것으로 바꿨다.
잔뜩 지쳐서 피곤했지만, 잔인하게 파헤쳐진 선원들의 시체나 검은 액체들을 그대로 갑판에 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별수 없이 갑판으로 나가 조용히 청소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바다에 내던져진 선원까지 헤아려 얼추 대여섯 명 정도가 세이렌과 인어에게 당했다.
유령의 바다에 이어 세운에게 들이 밀어진 환자들의 행렬에 그는 허옇게 질린 안색이 되었다. 선의의 옆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원도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친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조용한 가운데 몸이 멀쩡한 해적들이 각자 씻고 나와 세운을 도와 환자들을 챙겼다.
몇 가지 핑계를 대다가 겨우 혼자 씻을 수 있게 된 나는 옷을 벗다 말고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세이렌이 짓누른 배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검은 액체가 잔뜩 묻어 두 번 다신 못 입을 것 같은 옷을 대충 샤워실 구석의 통에 내던지고 몸을 씻었다.
내내 조용히 있던 발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로트, 그러고 보니 한동안 달거리를 안 하지 않았어?』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대충 어깨를 으쓱였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발카는 그제야 내가 자신과 아직도 과거 폭풍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음이 다시 떠오른 모양이었다.
발카도 별말을 잇지 않았고 나는 더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잠시 뒤, 몸을 씻고 밖으로 나온 나는 갈아입은 옷깃을 잡아 냄새를 맡으며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러게……. 대체 무슨 액체인 거지? 딱히 독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지만.”
키이엘로가 내 말에 작게 중얼거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텐과 발카는 냄새가 곤욕스러운지 연신 숨을 세게 내쉬며 냄새를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키이엘로와 나는 도멤을 보러 세운에게로 향하는 중이었다. 배의 밖은 그 난리였는지도 모르게 조용했다. 파도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나 선원들은 혹시라도 그 사이로 괴물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지는 않은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키이엘로와 나도 평소와 달리 조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세운과 선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선실로 들어가자 도멤이 간이의자에 앉아 원에게 질책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원의 눈은 말 안 듣는 환자를 보는 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나와 키이엘로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가 옆에 줄줄이 해초처럼 누워있는 우투그루와 브레딕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키이엘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곧장 비꼬는 말부터 했다.
“뒈지기 직전까지 가본 기분은 어때?”
“꺼져…….”
우투그루가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노려보자 나는 어깨만 으쓱이고 도멤의 옆에 앉았다. 베제는? 내가 묻자 우투그루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프라세에게 갔어.”
그사이에 도멤에게 붕대를 둘러준 원은 우투그루의 상처를 살피며 처치를 해줬다. 원의 치료가 끝나자 대충 몸을 일으켜 앉은 우투그루는 보란 듯 나를 흘기고는 브레딕에게 고개를 돌렸다.
브레딕은 다행히 심각한 중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미한 부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처치를 받고도 일어나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우투그루가 한숨을 쉬었다.
“넌 좀 누워있어야겠다.”
브레딕은 불만인 것 같았지만 막무가내로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멤이 반쯤 벗었던 셔츠를 챙겨 입으며 몸을 떨었다.
“진짜 끔찍했어……. 또 오진 않겠지?”
“시끄럽게 굴지만 않으면 안 오지 않을까?”
“처음에 세이렌이 발견되던 때 그렇게 시끄러운 것 같지도 않았지만 말이지…….”
그래도 지금처럼 소곤거리는 정도는 아니었잖아. 키이엘로의 말대로, 지금은 선실에 해적들이 많은데도 속닥속닥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 왁자지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도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다시 마주치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러던 중 조용하던 선실 내에 출렁이듯 웅성거림이 퍼졌다. 누가 소리를 내는 거냐며 모두의 눈이 모인 곳엔 디겔과 요한이 있었다.
찰나에 의아한 얼굴을 하던 선원들은 그들이 부축하고 있는 거구의 사내가 누군지 알아보고 숨을 들이켰다.
술렁임이 점점 커지려 하자 우투그루가 날카롭게 손뼉을 쳤다. 그 소리에 입을 다문 해적들 사이로 표정이 굳은 디겔과 요한이 우리 쪽으로 와 빈 침상에 그를 눕혔다.
그들이 부축한 이는 클루스도였다. 우투그루가 엉거주춤 일어나다가 옆구리를 팔로 감싸고 인상을 구겼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은 그가 물었다.
“아버지께서 왜…….”
“쓰러졌다. 무리한 모양이야.”
“무리라고요?”
우투그루의 얼굴이 황망하게 변했다. 전투가 부산스러웠다지만 예전의 클루스도는 이 정도에도 끄떡없었던 듯한데, 이렇게 쓰러져 버리자 걱정이 된 것 같았다.
세운이 부름을 받고 서둘러 뛰어와 클루스도를 살폈다. 맥을 짚던 세운이 자잘하게 입은 부상 중에 인어에게 물린 상처는 없는지 살피고 침착하게 말했다.
“과로였을 뿐이오. 인어에게 물린 것 같은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야겠군. 별다른 부상 없이도 쓰러진 자들이 있소.”
세이렌과 인어에게 죽은 선원 외에도 인어의 독에 당해 의식을 잃은 선원과 세이렌에게 부상을 입은 이들이 많았다. 세운은 이마를 짚었다가 한숨을 쉬며 원에게 뭐라고 말했다. 약초 따위의 이름인 것 같아서 자세히 알아듣진 못했으나 브레딕이 끼어들었다.
“모두에게 중화제를 먹이려고요? 물리지 않은 이들이 무슨 수로 중독되었다고?”
“하지만 큰 부상이 없는데도 쓰러진 이들이 있으니 예방은 해야 하오. 선장 양반도 그런 이유로 쓰러진 것일 수도 있지. 의식을 잃은 채로 있다가 갑자기 떼거리로 죽어 나가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 말에 브레딕은 미간을 좁히다가도 의사에게 자신이 비빌 짬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 고개만 설렁설렁 끄덕였다. 우투그루가 굳은 얼굴로 클루스도를 보다가 물었다. 독에 당한 사람들을 해독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세운이 애매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그는 잠시 입가를 쓸며 생각하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시간이 필요하오. 딱히 긍정적인 답안은 아니지, 알고 있소. 최대한 빨리 치료할 방안을 떠올려보겠소.”
세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환자들에게 다시 돌아갔다. 우투그루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데, 디겔이 불쑥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선장 대리가 필요하겠군.”
“아. 그건…… 간부 회의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 굳이 시간 뺏을 필요 없다. 부선장 중 하나에게 권한이 가야겠지.”
그 말에 우리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주변의 선원들이 키이엘로와 우투그루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키이엘로가 순순히 말했다.
“우투그루가 맡으라고 해요.”
그 말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한 번 보고는 우투그루를 보았다. 그러나 우투그루는 왠지 잔뜩 화난 얼굴로 키이엘로를 쏘아보다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디겔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뇨, 저나 키이엘로나 당장 선원들을 이끄는 건 무리예요. 디겔 아저씨가 맡으시면 선원들 사이에 불만은 없겠죠.”
그러자 요한은 어리둥절한 얼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제. 우투그루 말이 맞심더. 그가 디겔에게 말했다.
“점마들 중에 어느 쪽이든 부선장이니 상관은 없지만서도예. 아직 어린 놈들이니께 나이 있는 녀석 중에 뺀질대는 선원들은 얼마든지 있을 기다 아입니꺼.”
지금 모인 간부 중 반이 이렇게 말하자 디겔은 끙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정되자 그들은 클루스도를 침상과 함께 선실 깊숙한 곳으로 옮겨두었다.
원이 다른 선원들을 뒤로하고 클루스도에게 붙어 자잘한 부상을 치료하는 사이로 문이 닫혔다.
디겔은 심각한 얼굴로 항로를 다시 살펴야겠다며 해도를 가지러 조타실로 향했고, 요한은 간단하게 나눌 끼니나 만들러 주방으로 사라졌다. 키이엘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어.”
그 말에 나는 잠자코 끄덕이다가 물었다.
“선장 대리에도 관심이 없어? 권력이 얼마나 달콤한지 네가 맛봐야 하는데.”
“탐관오리 같은 말 하지 마…….”
키이엘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데, 그의 뒤로 우투그루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우투그루는 할 말 많은 낯을 하고 있었으나 이내 한숨만 푹 내쉬고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키이엘로에게 작게 물었다.
“그나저나 선장님이 저렇게 되었는데 걱정은 안 돼?”
“음, 뭐…. 당연히 걱정되지. 이 상황에 선장님이 쓰러지셔서 만약 일어나지 못하시면…….”
키이엘로가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추고 말했다. 우린 오합지졸밖에 되지 않을걸. 우홉피아주에게 금방 당할 거야. 그 말에 나는 음, 하고 눈을 굴렸다.
내 말은 네 아버지니까 걱정되지 않느냐는 뜻이었지만, 뭐. 키이엘로는 원래부터 클루스도에게는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나는 딱히 그것을 탓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물었다.
“꽤 박한 평가네.”
“어쩔 수 없어.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배는 각각 실력이 출중한 만큼 개인의 주장도 강한 편이라……. 선장님이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으니까 통제할 수 있는 거지.”
“음…….”
카리스마라고 할 만큼 기세 좋은 모습은 자주 보진 못했지만, 확실히 클루스도는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을 쉽게 해내곤 했다. 키이엘로가 자신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사실 선장님 개인의 성정으로만 보자면 꽤……. 거친 편이시지.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여하튼, 그나마 디겔 아저씨가 과한 건 옆에서 쳐내시니까 선원들이 받아들이기 쉽기도 하고.”
“과연. 균형이 잘 잡혀있군.”
그런 셈이지. 키이엘로가 작게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은 즉,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분열할 위기도 있을 것이란 뜻이었다. 어느 배든 선원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중요하니 그러려니 생각하지만, 우투그루도 디겔에게 선장 권한을 넘긴 것은 의외였다.
나는 우투그루를 힐끔 보다가 키이엘로의 귀를 쥐어 잡아당겼다.
“이상한데, 우투그루는 왜 선장 대리를 하지 않는 거지?”
당황하면서 끌려온 키이엘로에게 내가 작게 속삭이자, 그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모르지. 내 알 바 아냐.”
거참……. 나는 떨떠름해진 얼굴로 키이엘로의 귀를 놓아주고 한숨을 쉬었다. 텐이 키이엘로의 발치에서 코웃음을 쳤다.
『모지리로 살라고 냅둬라.』
네가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나는 키이엘로를 보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텐을 보았다.
그때 선실로 베제와 프라세가 들어왔다. 베제는 평소보다 프라세와 가까이 붙어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의 분위기가 그에게 너무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프라세는 어른들의 눈치를 흘끔 보다가 베제의 손에 이끌려 우리 사이로 다가왔다.
“저……, 죽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프라세에게 앉으라며 제 옆의 의자를 끌어다 준 도멤에게 대뜸 날아든 것은 격한 비수였다. 도멤은 쿨럭쿨럭 헛기침하더니 어깨춤을 부여잡고 딴청을 피우며 자리에 누웠다. 아이고, 갑자기 어깨가…….
그러나 그 말에 프라세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형도 크게 다쳤어요?’하고 묻자 결국 도멤은 도로 일어나 앉아야 했다.
우리는 프라세를 둘러싸고 네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몇몇이 다치고 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고저쩌고하고 떠들었다.
프라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어째 정말로 별일 아니었구나! 하고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아, 네, 다른 건 몰라도 저를 애 취급하느라 힘든 걸 알겠어요, 하지만 전 다 알아요,’라고 말하는 꼬맹이의 얼굴 같았다.
베제가 프라세의 이마에 딱밤을 놓는데, 해도를 가지고 온 디겔이 프라세를 둘러싼 어른들을 보고 혀를 찼다. 그의 뒤로 헤더가 따라 들어왔다.
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그녀는 살짝 웃음을 보이곤 이내 우리 쪽으로 왔다. 그녀의 뒤에서 선원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헤더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그들을 보다가 네토르를 흘끔 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못 본 척하겠다는 것 같았다.
그때 디겔이 우리를 향해 말했다.
“애 삥 뜯는 줄 알겠다.”
“저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는 거 아녜요?”
도멤이 볼멘소리하는 것을 뒤로하고 조금 떨어진 옆의 탁상에 해도를 펼친 디겔은 키이엘로와 우투그루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간부진들이 알아서 머리를 쓰든 상관하지 않고 남은 우리는 프라세에게 걱정을 빙자한 놀림을 계속했다. 우리 프라세 다 컸어요? 그래요? 우쭈쭈 어르듯 말하는 투엔 이미 원래의 목적은 어디론가 날아간 뒤였다.
프라세가 불퉁하고 뚱해진 얼굴로 입을 댓 발 내밀고 저도 다 알아요, 하면서 좀 진지한 무게를 잡았지만 베제나 도멤, 심지어 누운 브레딕과 여태 조용히 있던 네토르도 귓등으로 듣는 얼굴이었다.
프라세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상냥하게 웃어주기만 했다. 넌 꼬맹이가 맞단다. 열네 살 꼬꼬마야. 프라세는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을 했다.
우리는 연신 낄낄거리며 놀다가 프라세가 울화통이 터지려 하기 전이 되어서야 알겠다며 달래줬다. 헤더도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잠시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으로 화제를 옮긴 뒤, 브레딕이 누운 자리에서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한숨을 쉬자 베제는 그 옆에 앉아서 물었다.
“많이 아프냐?”
“그럼 안 아프겠어? 뒤지게 쓰라려…….”
나는 잠시 무언가 논의 중인 세 간부진을 보다가 이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헤더에게 작게 물었다.
“대화는 어떻게 되었어요?”
헤더는 잠시 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그냥 그랬어.
“나를 거의 유람 나온 아가씨로 취급할 생각인가 봐. 나는 차라리 싸움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뭐…….”
그렇게 말한 헤더는 알지 않느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베제가 그것을 듣고 혀를 찼다.
“누나는 새로 무술을 배우기엔 이미 너무 늦지 않았어? 물론 배운다면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늦고 빠르고가 문제가 아냐.”
내가 짧게 그의 말을 끊어냈다.
“기회를 안 준다는 게 가장 문제잖아.”
내 말에 베제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그렇지 뭐, 하고 프라세를 보았다. 프라세를 앞에 두고 늦은 나이 빠른 나이 운운하기 불편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헤더가 늦은 나이라고 친다면 프라세는 지나치게 빠른 나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곤 불편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때 네토르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큰 불편함 없이 배에 있을 수 있겠네. 바라던 거 아냐?”
“아냐, 난…….”
당황한 헤더를 보며 네토르의 입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이름 모를 선원이 말을 꺼냈다.
“너무 배부른 거 아니냐?”
그 말에 헤더가 입을 딱 다물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 배에 올라서 우홉피아주를 쫓는데, 너는 고작 섬에서 나오고 싶었단 이유로 배에 올라서 보호받으며 바다 구경이나 하다가 들어가겠다고? 팔자도 좋다.”
“너 말투가 왜 그래?”
도멤이 서둘러 헤더의 눈치를 보며 선원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나 또 다른 선원이 다시 끼어들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어리광부리지 마. 그 말에 나는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브레딕은 질린 얼굴로 한숨만 내쉬며 ‘조용히 좀 해라,’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그 선원을 보다가 눈을 굴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방해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싸움을 배우고 싶다는 헤더한테 안 된다고 못 박은 건 디겔 아저씨야. 왜 헤더한테 그래?”
“그러니까 안 된다는 짓을 왜 해?”
“그럼 왜 하면 안 되는데?”
도멤이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는 이 화제에 대해 조금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단순히 아버지가 막으니까? 하지만 헤더는 항상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왔고 또 시간만 있다면 그걸 잘 해냈어. 이번 일도 디겔 아저씨가 막지만 않으면 그랬겠지. 요컨대 헤더 본인의 욕구와 디겔 아저씨의 의견이 충돌한 문제인데 그걸 왜 모두 누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야?”
“그러니까 왜 굳이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짓을 하냔 말이야. 그 덕에 우리가 피해 보게 생겼잖아.”
“아니, 그러니까 피해 본다는 생각이 싫으면 디겔 아저씨를 설득해서 헤더가 칼이든 창이든 뭐든 배울 수 있게 하면 되잖아. 왜 그걸 헤더 탓을 하냐고!”
도멤은 한숨을 쉬고는 헤더의 눈치를 보다가, 선원들의 눈치만 살피는 프라세를 보고 움찔 몸을 움츠렸다.
애 앞에서 다투고 있으니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는 대충 궤짝에서 신문 뭉치를 찾아 프라세에게 쥐여주고는 말했다. 이거 읽고 있어. 그리고는 선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문제는 헤더를 탓할 것도 아니고, 딱히 우리가 크게 피해를 본 것도 아니지만, 굳이 피해를 봤다면 그건 헤더를 가로막은 디겔 아저씨 탓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본인의 이야기를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떠들 이유는 없어. 조용히 좀 하자! 밖에 인어랑 세이렌이 득실거리잖아!”
“정론이다. 입 좀 다물어, 머리 울리거든.”
브레딕이 침상에서 허공에 박수를 치며 웅얼거렸다. 선원들도 할 말은 많은 눈치였지만 여기에 대고 뭐라 말을 얹기도 멋쩍었는지 꿍얼대며 돌아섰다. 그때 그중 하나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여자가 배에 타면 안 돼.”
그 말에 헤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빡, 하고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유감스럽게도 내 짓이 아니었고, 선원이 얻어맞은 것도 아니었다. 선원들의 시선이 모인 곳은 한구석, 간부진들이 논의하던 곳이었다.
키이엘로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그의 매끄러운 뺨에 불그스름한 흔적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가 고개를 비틀자 드러난 얼굴이 들짐승처럼 사나웠다.
그 맞은 편에 선 우투그루의 주먹은 허공에 떠 있었고, 그의 얼굴도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도멤은 멍청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한탄처럼 내뱉었다.
“쟤넨 또 왜 저런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