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80)
바다새와 늑대 (79)화(80/347)
#79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말했다.
“도와줄게.”
“뭐? 아니,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거였어. 여태 뭘 들은 거야?”
“내 말은, 그냥. 네가 필요할 때 말해. 브레딕도 마찬가지일 거야. 지금은 네가 그 섬에 있지도 않지만, 나중에라도 네가 도움이 필요하거나 하면. 그럼 그때 말해. 무조건 도와줄게.”
우투그루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짧게 웃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이상하게 엉킨 실소였다. 그래.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괴상한 놈이다.”
“기껏 도와준다고 말했는데 그게 뭐야?”
내가 인상을 구기자 우투그루는 더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는 숙이고 있던 몸을 곧게 일으키고 물었다.
“키이엘로와 관련된 일을 물어보러 온 건 줄 알았는데.”
“엄연히 말하자면 브레딕의 부탁 때문에……. 아니, 굳이 알아보려고 했다면 당장에 키이엘로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우투그루는 수긍하는 것 같다가 미묘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놈이 기억이나 할까? 나는 황당한 걸 다 본다는 얼굴로, 사실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채로 그를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기도 기억 안 난다고 말한 참 아니던가? 그는 스스로를 좀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나도 키이엘로가 나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까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키이엘로는 도멤의 동생을 구했던 일도 잊고 있던 놈이니까.
그러다 문득 나는 우투그루가 화두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내 마음을 정한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아까 말한 거, 가볍게 듣지 마. 난 한번 말한 건 지켜.”
“…….”
잠시 말이 없던 우투그루는 조용히 나를 응시하다가 퍽 매정하게 말했다.
“난 말뿐인 신뢰는 믿지 않아.”
아, 이 삭막한 새끼가, 도와준대도……. 나는 일순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넓은 아량을 발휘해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그때 우투그루가 돌발적으로 말을 꺼냈다. 너 꽤 브레딕 같은 말을 하네.
브레딕이라고? 나는 내가 브레딕과 비슷하게 취급당한 것에 불쾌해해야 하는지 그 반대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우투그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은 모든 걸 회피하려 들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우투그루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을 보아 키이엘로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파악한 나는 그 평가가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서 의아한 얼굴로 우투그루를 보았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싸운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물었다.
“아까는 왜 싸웠는데?”
“그놈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구는 게 짜증 나서.”
“거참…….”
별걸 갖고 다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우투그루는 이마를 문지르다가 말했다.
“그놈은 아버지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데도 그게 다 필요 없단 듯이 굴지. 그러면서 나한테 다 떠넘겨…….”
우투그루는 거기까지 말하고 돌연 입을 꾹 다물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놈은 왜 나랑 다른 거지? 그 말에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바닥만 내려다봤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우리 사이엔 정적만 감돌았다.
그야, 사람은 모두 다르니까, 뭐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들으니까 또……. 키이엘로가 너무한 것 같지 않은가.
나는 그 순간만큼은 내 코가 석 자라는 것도 잊고 몰입했다. 키이엘로의 이야기도 듣는 편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는 좋을 것 같지만……. 문제는 키이엘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말하는 놈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문득 나는 키이엘로에 대해서도 딱히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의 어머니가 창부였고, 그가 어머니에게 각별한 것 같다는 정도였다.
키이엘로는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았고, 그나마 아는 것들은 다른 사람이 알려주거나, 넌지시 눈치를 챈 것투성이였다. 실상 그가 직접적으로 말한 이야기라고 해봐야 음식 기호나 유령의 바다에서 들은 어머니에 대한 것 정도였으니…….
딱히 키이엘로에게 우투그루와 있었던 일을 물어봐도 그럴듯한 답변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알아내봤자 둘을 화해시킨다거나 하는 극적인 변화도 바랄 수 없는 일이다. 문득 랄티아가 나에게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언니는 너무 많은 걸 해결하려고 해.
나는 우투그루를 보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나서지 못하는 일인 건가?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일인가?
따져 생각해보면 그랬다. 우투그루의 일은 내가 섣불리 손댈 순 없지만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컨대 당장은 못 하지만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둘이 싸운 건……. 이거야말로 내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 안건이지.
나는 내가 스스로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어, 아무도 날 도와주려 한 적 없으니까. 나는 언제나 알아서 찾아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으니까.
나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우투그루에게 말했다.
“키이엘로가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캐묻진 않을게, 그리고 너 일단… 키이엘로에게 한 대 먹였잖아?”
“한 대 더 때리고 싶었어.”
“아……. 음……. 그래 보이더라…….”
나는 유감스러운 눈으로 우투그루를 보았다. 우투그루는 자신도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전보다 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야지. 그의 말에 나도 얼결에 일어나 물었다. 머리는 식혔어?
우투그루는 나를 보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시면 어떻게 될 것 같아?”
“……? 음, 좀 위태롭지 않을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키이엘로가 했던 말을 주워섬기며 대꾸했다. 우투그루는 내 대답에도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를 보며 대뜸 말했다.
“아니. 평화로워질걸.”
“뭐?”
내가 놀라 물었지만, 우투그루는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지 몸을 돌려 다시 선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당황해서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무슨 의미야? 우투그루는 짧게 단정했다. 말 그대로야.
나는 의아한 눈으로 우투그루를 보다가 물었다.
“너 사실은 선장님을 싫어하는 거였어?”
우투그루는 그 말에는 약간의 황당함을 담고 날 돌아봤다.
“아니?”
나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어 우투그루를 보았다. 그는 선내를 노려보는 지친 얼굴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우홉피아주에게 있어 아버지가 사라진 검은바다는 가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더 위태로운 거 아냐?”
“적어도 배반자를 찾기 위해 서로를 의심할 일은 사라지겠지.”
배반자? 나는 생뚱맞은 소리에 눈을 깜빡이다가 문득 에르노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군.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반응이자 우투그루는 걸음을 옮기다가 나를 잠시 돌아보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표정에 눈을 가늘게 떴지만 동시에 내심 놀랐다. 그러니까, 우투그루는 숲의 바다에서부터 계속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우투그루에게 물었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
“너.”
“아……. 그래, 물어봐서 미안하다.”
우투그루는 한숨을 쉬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태도로 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미심쩍은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런데 동시에 의심 가는 사람이 없어. 그 말에 나는 소소하게 감탄했다. 정말로 내가 옆에 끼고 있는 친구 놈이 일을 안 하는 한량임을 방증하는군.
소소하게 키이엘로에게 유감을 느끼고 있는데, 우투그루가 말했다.
“내가 브레딕까지 의심해봤다고 하면 믿겠어?”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조금 걱정된다는 생각을 하며 우투그루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휴식이 간절해 보였다. 저러니 키이엘로가 일하지 않는다고 화낼 만도 했다. 물론 우투그루가 짜증을 내는 건 다른 이유인 것 같긴 했지만.
그리고 동시에 점점 더 우투그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해져만 갔다. 역시 여태 그랬던 것처럼 크게 말 섞지 않고 지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를 도와주기로 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가 싫어하는 키이엘로와 친했고, 그의 고충은 거의 모르는 일반 선원이고, 여러 가지로…….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와 우투그루는 선실 앞에 섰다.
우투그루가 갑자기 강한 회의감이 밀려들었는지 다시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했지?”
“내 언변이 좀 뛰어났나 보다.”
“네가 이렇게 헛소리를 많이 하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어.”
평가 한 번 박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문을 열었다.
선실로 들어가자, 우투그루는 아무 일 없었던 척 멀쩡한 낯으로 브레딕 쪽을 보았다. 그런 그를 보고 내심 혀를 차며 발을 옮기려던 나는 의아한 얼굴로 선실을 돌아보았다. 원래도 조용한 선실이 묘하게 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우투그루도 이 기묘한 공기를 감지했는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천천히 선실 내를 눈으로 훑었다. 이상하리만치 경직된 몸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왜?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솔로 살갗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기이하고 이상하다는 감각이 등골을 훑었다. 찰나에, 키이엘로와 눈이 마주치자 그 감각은 더 선명해졌다. 도멤의 얼굴이 창백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짐승 같은 직감이 머리에 꽂혀 들자마자,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문가로 뛰쳐나갔다.
“붙잡아!”
등 뒤로 디겔의 고함이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