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83)
바다새와 늑대 (82)화(83/347)
#82화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항상 그래왔던 일이다. 이미 익숙한 일이다…….
나는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이마를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 철장에서 앓는 소리를 내던 발카가 벌떡 일어나 나를 살폈다.
『로트, 괜찮아?』
“괜찮아 보여?”
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가, 이내 발카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기운이 빠져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카가 나를 안타깝게 불렀다. 그러나 그것에 대답하지 않은 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들이 신문을 읽고 뭔가 알아챈 것 같았어.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나도 보지 않아서 몰라. 그리고 그걸 디겔이란 자가 보고, 그러니까……. 그걸 들은 뒤에야 그들이 널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갑자기 그 항해사가 나를 붙드는 바람에 여기에 그대로 갇혔고. 그러다가 네가 들어왔지.』
들어봐야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럽게 탈력감이 찾아왔다.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이나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한 거지? 결국 이 꼴이 될 텐데.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 섞이려 노력하고 나름의 저울로 사람들을 대해도 항상 결과는 이런 꼴이었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왜 폭풍을 못 읽은 거야?”
『……. 로트, 말했잖아. 이번 일은 나도 몰라…….』
“지금 거 말고.”
나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발카를 보았다. 내내 외면하고 속으로 삼키던 물음이 왈칵 튀어나왔다. 쇠창살 사이로 발카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자색 눈동자가 크게 뜨여 나를 거울처럼 담았다. 손끝 발끝으로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의 폭풍 말이야.”
발카의 부리가 딱 다물렸다.
나는 그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도 참 숨기는 게 많아……. 내 중얼거림에 발카는 작은 새 머리를 일그러뜨리며 표정을 구기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내 모든 기력이 빠진 이후에야 발카는 짧게 뱉었다.
『일부러 그랬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
『네 아버지와 그 어선의 작자들이 죄다 죽어버렸으면 싶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안 알려줬어.』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발카를 보았다. 가슴에 남아있던 일말의 줄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절벽에서 겨우 붙들고 있던 실처럼 가느다란 줄이…….
내가 희미하게 물었다. 왜 그들이 죽었으면 했는데? 발카가 울분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들이 네 욕을 했어. 나는 그게 싫었어.』
“겨우 그것 때문에 아빠가 죽었다고?”
『로트. 네 욕에 입 하나 벙긋 못하는 모지리는 아버지로 쳐주지 마.』
손끝부터 감각이 굳는 기분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과거를 훑었다. 그때의 어선에 누가 있었지? 누가…….
고래잡이 아저씨와 그 아들이 기억난다. 그들은 내 앞에서도 자주 내게 눈치를 줬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고래를 자주 잡진 못하지만 한 번 잡으면 돈을 어마어마하게 끌어모으는 종자들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그들이 뭐라 하더라도 덧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발카, 지금 겨우 그거 때문에 폭풍을 무시했다 그거야?”
『로트.』
“그냥 나한테 말을 해주지 그랬어? 네 아빠가 다른 놈들이 자식욕을 하는데도 입도 벙긋 못하고 있다고.”
『로트.』
앵무새처럼 내 이름만 부르는 그녀에게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을렀다.
“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어! 설사 그때의 어린 내가 그것으로 상처받았더라도 지금의 나는 그걸 이해해! 오히려 네가 한 짓이 내게 끔찍한 기억만 줬어!”
『로트, 그런 건 아버지가 아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로트.』
“믿을 수가 없어……. 설사 내 아버지가 정말 쓰레기였더라도 그건 내가 정할 일이야! 너는 내게 충고하는 일로 족해야 했다고! 겨우 그런 일로 내 아버지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그 뒤로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발카는 못마땅한 얼굴로 부리를 딱딱거리며 날 보았다. 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어떤 것을 떠올렸다. 여자답게 조신하게 굴라며 콧잔등을 찌푸리던 깐깐한 선생이 저랬을까.
돌연 해적 마을에서 우투그루가 나에게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 떠올랐다. 속이 울렁거렸다. 주변에서 서리가 드글드글 끼어 오르는 것 같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로트, 나는 결국 너를 위한 일이었어. 미안해, 네가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나는 그 말에 거의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아주 깊은 심해 같은 분노가 심장 아래 깊게 침잠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동시에 발카가 나와 사이가 틀어져도, 마치 ‘다음번’이 있다는 것처럼 군다는 걸 알아챘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다’라고?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이미 내 가족들은 모조리 죽었고 남은 건 랄티아뿐인데. 내게 이제 더 이상의 ‘다음번’은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그런데 대체…….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발카를 노려보다가 헉, 하고 소리를 내며 가슴께를 짚었다. 분노로 인한 것인지 다른 이유인지 명치와 복부가 갑자기 화끈거리며 통증이 피어올랐다.
가슴을 도끼로 퍽 내리찍는 느낌이었다. 홧홧하게 뱃속에 불을 지르는 감각이 온몸을 흐르듯 내달렸다. 내가 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허물어지자 발카가 의아하게 나를 불렀다. 로트?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다. 뭐지? 이런 통증은 생전 처음 겪는 것이었다. 아픔에 빠르게 증발하는 사념 사이로 흐릿하게 발카 때문에 드디어 화병이 도졌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이내 울컥 치솟는 고통에 기침하며 바닥에 달라붙듯 엎드렸다. 발카가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온통 새빨갰다.
바닥에 핏물이 촤악 퍼졌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턱을 타고 피가 흘렀다. 순간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저주! 그간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던 저주였다!
발카가 비명을 지르며 우리 안에서 난동을 부렸다.
『로트! 로트, 괜찮아? 로트!』
안 괜찮아. 나는 피가 흐르는 잇새로 쌕쌕 숨을 몰아쉬며 고역스러운 얼굴로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나 안 괜찮아.
숨이 막혀서 기침하면 뱉어낸 양을 무시하고 다시 한가득 핏물이 토해졌다. 가슴부터 목구멍까지 갈퀴로 긁어내린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일어났다.
배와 가슴, 목구멍을 모두 홧홧하게 찢으며 터져 나오는 고통에 나는 악, 하고 소리 내며 바닥을 긁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좁은 창고 바닥이 검붉은 빛으로 뒤덮여갔다. 발카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해적들을 부르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피가 바닥을 뒤덮고, 내 머릿속에도 한 가지 생각만이 엎질러지듯 뒤덮어갔다.
나 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괜찮았던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