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84)
바다새와 늑대 (83)화(84/347)
#83화
희미하게 눈을 뜨자마자 세운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퍼뜩 몸을 일으키다가 칼에 찔린 것처럼 날카롭게 아픈 배를 감싸 안고 끙 소리를 냈다.
세운의 등 뒤로 발카는 철장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늘어져 있었다. 아무도 듣는 이는 없겠지만 발카가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괜히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피를 토하다가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세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일그러져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오.”
세운이 난데없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아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인상을 마구 찡그린 채로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의원은 나를 안타깝게만 보다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그의 옆에는 피로 젖은 천들과 항상 그가 갖고 다니는 약재 따위가 나뒹굴고 있었다. 피에 젖은 천 뭉치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섬뜩했다.
“어떻게 알고 와 있는 거예요?”
내 물음에도 그는 한숨을 쉬고는 내 손을 잡아 맥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간 월경 주기가 이상하지 않았소?”
“저들이 순순히 들여보내 줬어요?”
“기력도 쇠해서 항상 피곤하지는 않았소? 수면이 불규칙하고 종종 쥐도 잡혔을 것 같은데…….”
어쩐지 집단적 독백이 될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그를 보았다. 세운은 내 시선에 혀를 끌끌 차다가 결국 내 질문에 먼저 답했다.
“이 배 부선장이 갑자기 뛰쳐나갔다가 안색이 허옇게 뜬 채로 돌아왔소.”
부선장이라. 우투그루는 아닐 것 같고 아마 키이엘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니까, 키이엘로는 발카의 소리를 들은 건가?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내가 따지는 것을 관두고 늘어지자, 세운이 한숨을 쉬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환자라면 적을 따지지 않고 돌보는 것이라고 우겨 들어와서 망정이었지. 대관절 내가 선장님을 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요? 그보다 자네 몸 상태가 어떤지 아시오?”
“……몰라요. 고칠 수 있나요?”
“내가 고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다. 세운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봐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잠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세운의 뒤에서 아직도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발카를 힐끔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그에게 작게 물었다.
“나를 도와줄 수는 없어요?”
“…….”
의료도구를 차곡차곡 정리하던 세운은 내 말에 손을 멈추고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바람 통하는 소리만 내다가, 내게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그들 말이 진짜요?”
“그 염병할 신문? 난 거기에 뭐가 쓰여있는지도 몰라요. 우홉피아주의 첩자라고? 헛소리를 해도 적당히 해야지.”
“하지만……, 하지만.”
“난 내 동생을 구하러 가야 해요. 이 배는 그걸 위해 합류했던 거고, 수가 틀리면 나라도 혼자 가야 해. 어차피 처음부터 혼자 나온 여정이니 혼자 마쳐도 좋죠. 적어도 여기서 죽을 수 없어요.”
내 말에 세운은 혼란한 눈을 하다가 곧 천천히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는 마치 고장 난 태엽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세운은 뭐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얼굴을 했다가 창고 문을 힐끔 보고는 작게 을렀다.
“그대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소!”
“누가 몰라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가요! 그리고 당장 여기서 죽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고 죽는 게 낫겠죠.”
“하지만 내가 어떻게……, 자네가 혼자 배를 몰 수나 있는지……. 아.”
세운은 경황없이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제 뒤쪽의 발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내게 몸을 기울여 작게 물었다. 저 새가 정말 백곡왕이오? 나는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
‘네? 뭔 왕이요?’하고 내가 되묻자, 세운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꾸했다.
“바다새 말이오. 우리 쪽에선 백곡왕이라 불러서…….”
“아…….”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날 도와줄 거예요?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은 실망스러웠다. 세운이 작게 고개를 저은 것이다. 하기야 배반자의 누명을 쓴 나를 도와준다면 아무리 의원이라 대접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마저 사라지자 나는 다시금 무기력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늘어져서 눈물의 바다를 벗어날 때까지 잠이나 자고 싶었다. 웃기지, 어차피 죽으면 평생 자게 될 텐데…….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낙담하는 나에게 위로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는지 머뭇거리다가 다른 것을 물었다.
“어쩌다 몸이 그렇게 망가진 건지는 모르겠다만 지금도 고통이 상당하지 않소? 내 진통제라도 지어주리다.”
“그거 좋네요, 죽을 때 아프진 않게…….”
“이보시오…….”
별생각 없이 대꾸하는 나에게 착잡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세운을 뒤로하고 나는 문득 루루미와 에르노리가 주었던 진주와 황금 나뭇잎을 떠올렸다. 그것들이 있었다면 피를 토할 때 그리 고역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세운의 말과 달리 지금 당장 통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주의 일환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더하는 대신 세운에게 내가 지내던 곳의 상자에서 그것들이 든 작은 주머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세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별것 아닌 일까지 거절하기엔 마음이 걸렸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운이 근심 많은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나가려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고의 문 앞에 브레딕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나는 바로 마주쳐온 브레딕의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에 흠칫 몸을 떨었다.
브레딕은 복잡해 보였지만 의심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세운에게 작게 몇 가지를 묻더니 문을 닫았다. 그는 목발을 짚고 있었는데, 그 정도의 부상이 있었음에도 금세 일어났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창고의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세운이 가고 나자 그제야 그가 말한 것처럼 무기력과 피곤함이 수마처럼 몰려왔다. 피가 부족해져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발카가 계속 작게 흐느끼는 것이 거슬려 무어라 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폭풍, 아빠, 발카, 저주, 우홉피아주, 신문, 랄티아, 발카, 폭풍…….
어느 것도 손댈 수 없게 커다란 일들만 순식간에 닥쳐와 나를 깊은 심해에 처박히게 했다. 나는 발카가 흐느끼는 소리를 뒤로하고 둔해져 가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배반자, 에르노리가 말했던 배반자가 정말 이 배에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아닌데도…….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럼 대체 누구지?
우투그루가 그랬듯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누구든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배반자가 되어 갇혀 있는 신세 아니던가. 어떻게 본다면 내가 미필적 고의로 배반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지.
어차피 끼워 맞추기이고, 인제 와서 따져도 다 쓸모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기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발카만 잠시 보았다.
애초에 바다새가 나에게 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물론 완전히 행복하진 않더라도, 가족들이 모두 살아있고, 섬이 우홉피아주에게 공격받는 일도 없고,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다로 떠나지 못하는 것도, 바지를 입고 칼을 쥔 채 뛰어다니는 것도, 아무것도 못 해도, 다들 그랬듯이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행복한 삶이었다고 훗날 회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나는 바다에 나왔지. 다 내가 초래한 일이다. 나는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는 기분이 되어 발카를 보았다.
결국 내 선택으로 바다에 나와서 발카를 만났지. 그렇다면 발카는 왜 날 선택했을까.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깃털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발카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잠시 입을 뗐던 나는 다시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항상 마저 하지 못한 말만 가슴에 침전되어 썩어갔다.
* * *
다음날이 되자 발카는 우는 것을 그쳤다. 그러나 그렇다고 발카와 나 사이에서 다른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다. 발카는 할 말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한편 세운은 작은 빵을 품에 숨겨 가져왔다.
고마운 의원에게 빵을 받아 식사하며 전해 들은 선내 분위기는 아직도 어수선한 것 같았다. 소리를 듣고 세이렌이 몰려올까 무서워 마장석을 강하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하던 세운이 한숨을 쉬며 전했다.
“자네가 전염병을 앓고 있는 거면 어쩌나 하는 사람도 있더군.”
“걱정도 많네요.”
“뭐……. 아니라고 말해두긴 했다만, 내 경험으로 보았을 때 가끔 전문인의 소견을 무시하고 날뛰는 부류도 있는 편이라. 조심하시게.”
나는 그게 기우라고 생각했다. 전염병이 무서워서 누가 나에게 다가오겠는가? 정말로 내가 전염병을 갖고 있다면 다가오는 짓은 멍청한 짓이었다.
선상에서 전염병이 도는 것은 바다 괴물과 마주한 것만큼 두려운 일이니까. 세운도 그저 단순히 경고 차원에서 한 말인 듯 더 덧붙이진 않았다.
세운은 의심을 살까 무서워 원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며 나를 달랬다. 마치 내가 굉장한 외로움이라도 탄다는 것 같은 발언이군. 나는 심히 유감스러웠지만, 굳이 말을 하진 않았다.
그가 챙겨온 것은 내가 부탁했던 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안을 확인하며 각각 진주 하나와 황금 이파리 두 개를 보자, 그것을 본 세운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비상금이라도 되는 거요?”
웃기는 질문이었다. 바다에서 한낱 금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뭍에나 쓰이는 거지.
나는 말을 아끼다가 그가 의원이고, 루루미의 말대로 이것이 꽤 효과가 있다면 그가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전에 산호섬에서 진주를 먹인 후로 도멤 감기가 금방 나았던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약간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던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세운이 의사라서 알려주는 건데요.”
“그렇게 운을 떼야 하는 이야기라면 안 듣고 싶소만…….”
세운이 매우 면구스러운 얼굴로 대꾸하는 걸 무시한 채 내가 말을 이었다. 간략하게 무엇인지 알려주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나와 주머니 안의 것들을 번갈아 보다가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약장수에게 속은 것이오?”
“숲의 주인을 약장수라 하다니 배짱도 좋네요.”
내 말에 잠시 입을 틀어막은 세운은 그대로 미간을 좁히고 끙 침음을 내뱉으며 고민했다. 일부러 난리가 날 루루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에르노리가 숲의 바다에서 나에게 친근하게 굴었던 것을 그도 보았던 터라 의심이 길진 않았다. 나는 잠시 침착하게 주머니를 응시했다.
물론, 나는 기회가 생기면 곧바로 이 배를 탈출할 것이다. 그 생각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혼자 항해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이 배에서 계속 있으면 눈물의 바다를 벗어나는 순간 처형될 것이니 그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가라앉은 눈으로 주머니 안의 것들을 보던 나는 곧 그것의 주둥이를 조여 닫고 세운에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이건 세운이 가져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