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86)
바다새와 늑대 (85)화(86/347)
#85화
『얼굴 좀 펴, 못난아.』
“……지금은 네 장난에 못 웃어줘.”
『장난이라고 생각해? 자신감이 대단하군. 정말로 못나서 하는 말인데.』
그 말에 키이엘로는 늑대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조용히 선실을 나가 복도 구석에 구겨지듯 앉았다. 텐이 혀를 끌끌 차며 키이엘로의 발치에 엎드려 그를 보았다.
검은 늑대의 금빛 눈이 태양처럼 빛났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인간 사이의 일을 왜 짐승에게 물어.』
“…….”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텐이 느리게 묻자 키이엘로는 마치 자신이 모자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스물하나고 덩치도 큰 남자인데…….
문득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머리를 헤집은 그는 이내 굳게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그러자 텐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걸 장담할 수 있어? 그 녀석이 완벽하게 속였을 수도 있지.』
“너……. 전에는 로트를 믿어보라며.”
『원래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게 달라지는 법이야.』
매정한 늑대의 말에 키이엘로는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텐의 털을 쓰다듬는 대신 제 옷자락을 쥐고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따지려 들면 근본 없는 후회감과 해봤자 쓸모없는 만약의 가정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진탕되며 뿌옇게 어지러워지는 생각에 키이엘로는 오랜만에 굉장한 짜증을 느꼈다. 텐이 코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다가 얼른 말을 걸었다.
『하나를 결정해. 로트와 도멤과 이야기를 해볼 건지,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넘어가든지.』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인데, 원래 이런가?”
『뭐 때문에 초조한데?』
“모르겠어. 차분하게 생각을 할 수가 없어…….”
키이엘로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며 이마를 짚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일어났다. 조급하게 치미는 짜증은 마치 검고 끈적한 것이 눌어붙은 듯 불쾌하고 찝찝했다.
느리게 숨을 쉬던 키이엘로는 자신의 숨이 조금 뜨겁다는 것을 알아채고 입을 다물었다. 텐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화약 냄새 한번 지독하구만.』
“……미안.”
키이엘로는 늑대에게 짧게 사과하고 걸음을 옮겼다. 도멤에게 간 뒤에 우투그루 놈을 봐야겠어. 그의 말에 늑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키이엘로가 걸음을 멈추고 늑대를 돌아보았다. 뭘 보냐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텐에게 그가 자신감이 팍 죽은 얼굴로 꿍얼거렸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 한심한 얼굴에 텐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뜻대로 해.』
“…….”
잠시 텐을 보던 키이엘로는 다시 발을 떼었다. 그가 걸어가며 ‘불안한데…….’ 하고 웅얼거렸지만, 늑대는 혀를 차지도,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늑대는 그의 뒤를 따르다가 흐트러지는 키이엘로의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선실로 들어간 키이엘로는 산만한 선원들 사이를 비집고 도멤을 찾았다. 세운과 마주치기 전 그는 넋 나간 얼굴로 앉아만 있었다. 헤더와 베제가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굴기에 내버려 둔 것이 생각난 키이엘로는 선실의 후미진 곳부터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도멤은 아까의 키이엘로가 그랬듯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키이엘로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자, 기척에 고개를 든 도멤은 형용할 수 없이 혼란한 얼굴을 했다.
“도멤.”
키이엘로는 침착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도멤은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키이엘로를 보았다.
그러나 도멤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키이엘로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우투그루에게 가볼 생각이야.”
“뭐? 왜?”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그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든 말든, 키이엘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는 로트와 대화라도 해볼 생각이야.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말을 잇던 키이엘로의 목소리가 도멤의 손에 뚝 끊겼다. 도멤은 키이엘로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기함하며 키이엘로에게 작게 윽박질렀다.
“너 어쩌다 그 녀석의 행동력을 닮아버린 거야? 무슨 심적 변화야?!”
“……네 생각도 묻고 싶어서.”
그 말에 도멤은 아연한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키이엘로가 도멤의 손을 치워내고 낮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도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려 바닥만 쳐다보았다.
도멤의 연두색 눈이 풍랑에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나는……. 그가 입을 열다 말고 키이엘로를 보았다.
“난 우홉피아주를 용서 못 해.”
“알아.”
“그렇지만 만약 로트가 우홉피아주가 아니라면…….”
도멤은 희게 질린 얼굴로 말하다가 머리를 쥐어 싸맸다. 아닐 수가 있나? 도멤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키이엘로가 입을 열려 하자, 도멤이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
그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로트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내가 그걸 책임질 수 있을까? 만약 로트를 믿었다가 속으면 나는……. 아니면 로트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홉피아주에게 놀아나는 것이라면? 결국 우릴 우홉피아주의 손아귀에 떨어트리는 게 되는 건 아닐까.”
“도멤, 그……. 너무 비약하지 마.”
“알아! 하지만……. 만약 로트를 믿었는데, 우홉피아주에게 복수도 못 하고 끝난다면.”
도멤이 돌연 입을 다물고 표정을 매섭게 굳혔다. 소년처럼 서글서글한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텐이 혀를 차며 꿍얼거렸다. 우홉피아주, 아주 중요하지…….
텐이 뭐라고 중얼거리든 키이엘로는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닫은 도멤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도멤이 희미하게 입술 사이로 말을 꺼냈다.
“그건 안 돼…….”
“도멤.”
“난……. 우홉피아주 그 개자식들의 사지를 찢지 않으면.”
키이엘로는 그들이 말을 이어나가다가도 어느 지점을 건너뛰듯 기분이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멤은 이젠 창백하게 변한 안색으로 키이엘로를 눈에 담았다.
녹색 눈에는 미약한 공포와 분노가 엉켜있었다. 키이엘로는 도멤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도멤은 우홉피아주에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으로 죄책감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상기하자 키이엘로는 말문이 막혀 주춤거리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도멤의 어깨를 두드렸다.
“……머리 식혀. 나는 나대로 할게.”
“키이엘로.”
희게 질린 도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키이엘로는 도멤도 자신처럼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함으로 등을 떠미는 것 같은…….
돌연 키이엘로는 도멤에게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눈물의 바다를 벗어나려면 얼마나 걸리지? 이것을 왜 물었는지도 희미했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질문이었다.
도멤은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약간 펴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완전히 벗어나려면 반나절쯤은 더 걸릴 텐데. 왜?”
“왠지 모르게 초조해져서.”
키이엘로는 세운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했다. 도멤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키이엘로를 보다가 그의 뒤쪽을 보고 눈을 둥글게 떴다.
우투그루? 그 말에 키이엘로가 홱 뒤를 돌아보자, 팍 찌푸린 얼굴의 우투그루가 키이엘로를 건들려던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간부진 호출이야.”
“뭐 때문에?”
“사안 가려가며 따를 생각이냐?”
키이엘로가 미간을 좁히며 뭐라고 하려는데, 우투그루는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짜증이 난 듯 몸을 돌리며 이를 갈았다. 됐어, 그냥 여기 있던가.
그 말에 뭐라고 항의하려던 키이엘로가 미심쩍은 얼굴로 우투그루를 보았다. 평소보다 좀 날카로운 것이 로트에 관련한 일 때문인지 그 밖의 이유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키이엘로는 우투그루에게 로트가 있는 창고에 가 보겠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우투그루!”
“왜 따라와. 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고?”
사나운 말에 울컥하는 화를 참아낸 키이엘로가 로트에 대해 말을 꺼내려 하는데, 그 순간 그들 사이로 다가온 디겔이 더 빠르게 그 둘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란 키이엘로가 몸을 흠칫 떠는 것을 눈을 가늘게 뜨고 흘긴 우투그루가 디겔을 보자, 그는 엄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침 잘 됐다. 준비해라.”
“……준비요? 뭘요?”
키이엘로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디겔을 보았다. 아직 눈물의 바다를 벗어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하며 디겔이 입을 열었다.
“뭐긴 뭐겠느냐? 처형 말이다.”
우투그루와 키이엘로의 얼굴이 각기 다른 당황을 담고 일그러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