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92)
바다새와 늑대 (91)화(92/347)
#91화
로트렐리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루셀라는 딸의 뺨을 매만지며 잠시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로트렐리는 식탁 의자에 앉아 엉망으로 엉킨 머리를 손으로 빗어 풀어 내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모녀 사이에 아주 잠깐 동안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 위층에서 책을 읽던 랄티아가 계단 난간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랑 엄마 왔어? 일찍 왔네?”
“랄티아.”
루셀라가 로트렐리를 보던 눈을 랄티아에게 돌렸다가 이내 말했다.
“랄티아, 언니랑 엄마가 대화할 게 있으니까 들어가 있으렴.”
그 말에 그제야 언니와 엄마 사이의 침묵을 눈치챈 랄티아가 어색해진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다가 도로 계단 위로 올라갔다. 작은 집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트렐리는 루셀라가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불편한 공기가 목구멍을 꽉 막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처럼 굴지 않는 딸 때문에 루셀라는 몇 번이고 눈치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녀의 과거마저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했다. 루셀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쨌거나 겉보기에만 그럴 줄 누가 알겠는가.
로트렐리는 그 생각을 하자 미약한 죄책감과 동시에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기에 로트렐리는 오히려 화가 난다는 것에 당황해 그것을 몰아내고자 노력했다.
“로트렐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로트렐리는 근심을 가득 얹은 루셀라의 눈과 마주쳤다. 루셀라는 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두건을 쓰고 있었는데, 새파란 색의 두건은 로트렐리의 눈동자와 닮았다며 그녀가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로트렐리는 그 두건과 걱정 섞인 진녹색 눈을 보는 순간 파도에 쓸려나가는 백사장의 낙서처럼 분노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대신 그 자리를 옅은 슬픔과 어리광이 채웠다.
루셀라는 로트렐리가 앉은 의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눈을 맞췄다.
“렐, 수업은 어쩌고?”
“…….”
“……아까 그 애들이랑은 무슨 문제였던 거야?”
“별것 아냐, 그냥……, 바다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 녀석들이 시비를 걸어서.”
로트렐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 없는 것처럼 웅얼거린다고 생각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먼저 그런 거 아냐. 걔들이 먼저 나한테 나뭇가지를 던졌어.”
“알아, 엄마는 널 믿어.”
루셀라의 말에 로트렐리는 얕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루셀라는 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처 풀리지 않은 머리칼을 쓸어주며 말했다.
“수업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어?”
“……애들은 좋아. 수업 내용이 싫은 거지.”
“그래도 들어둬. 어떻게든 언젠가는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로트렐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끽해야 노래를 부르고 옷을 기우는 것을 배워봐야 딱 그 정도의 일에나 쓰일 것이다. 로트렐리는 루셀라를 뚜렷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난 수업보다 검술을 배우고 싶어.”
“그게, 로트렐리, 전에도 말했지만, 마을 검술 선생은 여자애를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고…….”
“그런 선생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잖아.”
로트렐리는 루셀라의 말을 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가 그런 할아버지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
“……렐, 엄마는 너에게 검 같은 거 안 알려줄 거야.”
“왜? 엄마는 기사들보다 더 뛰어났다며. 엄살 안 부리고 열심히 배울래.”
로트렐리! 루셀라가 엄하게 외쳤다. 로트렐리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루셀라를 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루셀라는 항상 이랬다. 마땅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허울만으로 그녀를 달래려 들었다. 로트렐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검을 배우려 드는 거니? 아까 그 애들을 때려눕히고 싶어서?”
“아냐.”
“그럼 굳이 왜 배우려고 해? 재미있을 거 같아서? 더더욱 안 돼.”
로트렐리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루셀라를 바라보았다. 로트렐리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루셀라는 한때 귀족의 자리에서 기사처럼 검술 수업을 받았다.
그에 수반되는 어떤 역경이 있었을지는 로트렐리는 몰랐으나, 적어도 루셀라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물며 로트렐리가 검술을 얼마나 바라는지 알고 있으면서 가르쳐주려 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셀라는 자신이 재능도 없는 바느질이나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종국에는 원치 않는 남자에게 시집가길 원한단 말인가?
로트렐리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등골을 따라 미약한 공포감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로트렐리는 평생 이렇게 말로만 하는 충돌에 휩싸여 살게 될 것이다.
로트렐리는 여기서 물러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행동해야 해, 이대로 입만 다물고 있다면 자신은 이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로트렐리는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루셀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검술을 배울 거야.”
“엄마는 안 가르쳐 줄 거야.”
“왜? 엄마도 누군가에게 검술을 배웠잖아. 그런데 왜 나는 안 돼?”
“로트렐리.”
루셀라가 로트렐리의 어깨를 쥐고 말했다.
“엄마는 그걸 후회해. 결국 이룬 것 없이 절망만 맛봤어. 네가 다르리란 기대는 마, 렐. 엄마도 널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암만 싫더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빠르게 적응해서 사는 게 더 좋아.”
“…….”
로트렐리는 루셀라의 눈을 바라보다가 찌푸린 인상을 애써 펴며 입을 열었다.
“엄마 말대로 내가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안 해도 후회할 거야. 그냥 가르쳐주면 안 돼?”
“로트렐리. 네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버틸 수 있어? 온 마을 사람들이 널 보고 수군대고 어떻게 하든 욕을 먹고, 네가 하는 일마다 아니꼽게 보고, 네 가치도 낮게 취급할 거야. 네가 그걸 다 버틸 수 있다고?”
“지금도 다들 날 이상하게 봐!”
“누가? 누가 그러는데? 엄마는 그런 꼴 못 봐. 누가 그랬어?”
루셀라가 놀라서 로트렐리를 살폈다. 로트렐리는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누군지 알면 엄마가 뭐라고 해 줄 거야?”
“당연히 그럴 거야.”
로트렐리는 루셀라의 표정을 보고 심통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루셀라는 로트렐리의 기색이 달라지지 않자 당황한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엄마 마음을 몰라주니? 루셀라의 말에 로트렐리는 물기 어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그냥…… 내가 뭘 하든 내 편만 들어주면 안 돼?”
내 탓이 아니라고 엄마가 말해주면 되잖아……. 로트렐리의 말에 루셀라는 일순 넋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거야?”
“다른 남자애들이 칼싸움하는 걸 보면 나는 저것보다 더 잘할 자신 있다는 생각만 들어. 걔네랑 어울리고 싶은 게 아냐. 사람한테 검을 휘두르고 싶어서도 아냐. 그냥 나는…….”
로트렐리는 흰 치맛자락을 쥐고 아까의 실랑이로 인해 찍힌 흙먼지를 보여줬다.
“나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좋아. 나는 나를 내가 지키고 싶어.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내 힘으로 콧대를 뭉개주고 싶어.”
“…….”
“똑같이 눈치 보여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눈치 볼 거야.”
루셀라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트렐리가 계속해서 쳐다보자 손을 내젓고 딸을 방으로 돌려보낼 때도 루셀라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허공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트렐리가 방에 들어오자, 책에 머리를 박고 있던 랄티아는 고개를 들고 제 언니를 보았다.
랄티아는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엄마랑 싸웠어?”
“……싸운 거 아냐.”
“왜? 뭐 때문에? 헉, 언니 치마는 또 왜 그래?”
“신경 쓰지 마…….”
로트렐리는 웅얼웅얼 대꾸하며 상자에 짚과 깃털을 채워 넣은 제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 언니, 옷 갈아입고 누워!
로트렐리는 짓눌린 목소리로 대충 알겠다고 대꾸했으나 일어나진 않았다. 랄티아는 그런 로트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만 으쓱이고 책에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로트렐리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 좀 더 기회를 봐서 말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크게 키운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적당한 기회가 올 때까지 미루고 미룬다고 해서 무엇이 좋을까. 그렇게 기다린다면 로트렐리는 매 하루하루를 허비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남은 근육조차 없는 몸으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래, 차라리 오늘은 전보다 대화에 진전이 있어서 다행이야. 로트렐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아까의 소년들을 떠올렸다.
일 대 다수로 다툰 탓도 없잖아 있겠지만 자신이 그렇게 쉽게 그들에게 무릎 꿇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로트렐리는 눈을 감고 몸을 뒤척여 돌려 누우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엄마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전처럼 해변만 거니는 것은 안 될 말이야.
로트렐리에게는 소년들만 한 힘과 체력이 있어야 했다.
그날 이후로도 루셀라는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로트렐리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다시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검술에 대해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로트렐리는 수업을 빼먹거나, 수업을 마친 뒤 가장 먼저 나와 해변을 뛰어다녔다. 처음 한 주는 치마를 입고 뛰어다니다가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곤 하는 모습에 뭇 남자애들은 로트렐리가 미쳤다며 놀려댔고, 로트렐리의 심산을 이미 다 전해 들은 여자애들은 소소하게 응원해주거나 별다른 관심 없이 돌아서곤 했다.
두 번째 주부터 로트렐리는 까맣고 긴 머리칼을 하나로 올려 묶었고, 세 번째 주가 되자 어디서 난 건지 바지를 가져와 치마 아래 입고 있다가 백사장을 뛰어다닐 때면 바지를 입은 채로 뛰었다.
얼마나 독하게 뛰어대는지 몇 번 로트렐리를 따라서 뛰며 놀리던 소년들은 시간이 지나자 그녀를 따라잡지 못하는 애들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몇 주가 더 지나자 로트렐리의 뒤를 쫓아 뛰는 것도 버거운지 소년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뛰고 있는 로트렐리를 볼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로트렐리는 체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 효과가 있어서, 처음에는 백사장을 한 번만 뛰어도 숨이 차고 다리가 풀리던 아이는 곧 백사장을 몇 번이고 뛰어도 튼튼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로트렐리가 수업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로트렐리는 누군가에게 흠집 잡힐 일을 최대한 줄여야 루셀라가 그나마 안심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로트렐리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
결과가 따라주지 않을 때도 물론 있었지만, 어쨌거나 대부분은 끈질기게 노력을 하다 보면 범재의 수준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백사장을 뛰어다니는 로트렐리를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로트렐리 자신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검술 수업을 받게 되면 쑥덕거리는 것은 더 듣게 될 것이다. 아무도 로트렐리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겠노라 나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생각하기로는 그랬단 것이다.
한번 마음먹은 이상 그것을 해내고 마리라 생각한 로트렐리는 소년들이 검술 수업을 받는 곳을 훔쳐보며 어깨 너머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익혔다. 나름 숨는다고 숨었지만, 딱히 아예 비밀로 할 생각도 없던 로트렐리의 탓에 소년들의 사이에서는 ‘로트렐리가 검술을 익히는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중이다’라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헛소문이었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것을 잠자코 보지 않는 로트렐리로 인해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로트렐리에게 접근하던 소년들은 모두 매서운 반응에 튕겨 나갔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쯤 되자 마을에서는 로트렐리의 이상함에 대해 떠들다가, 로트렐리의 재능에 대해 떠들다가, 로트렐리의 외모에 대해 떠들다가…….
그렇게 로트렐리는 열다섯이 되었다.
그리고 열다섯의 생일 때, 로트렐리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각각 받은 선물은 검과 작은 조각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