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93)
바다새와 늑대 (92)화(93/347)
#92화
로트렐리의 열다섯 생일도 열네 살 때처럼 평범했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적어도 로트렐리에게만은 가장 특별하고 많은 것이 뒤바뀐 날이었다.
루셀라는 넋을 놓고 자신이 선물한 검을 보고 있는 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말했다.
“로트렐리. 엄마가 너에게 검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어. 내가 먼저 해봤거든.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가게 두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야.”
“하지만…….”
“맞아. 넌 내 딸이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잖니. 네가 해보고 싶다면 엄마가 도와줄게. 다행히, 엄마는 먼저 해봤거든……. 너에게 검을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로트렐리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루셀라를 와락 끌어안고 탁자를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동안 로트렐리가 해온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로트렐리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 성취였다.
결국 루셀라는 마음을 바꿨고, 자신은 꿈들 중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로트렐리가 품에 검을 끌어안고 기뻐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아버지가 로트렐리를 불렀다.
그는 루셀라와 눈을 마주치고 씩 웃더니 딸의 손을 잡고 섬 뒤쪽의 해변으로 함께 걸어갔다.
섬 앞의 부둣가에 비하면 뒤쪽은 해변의 폭이 길고 이렇다 할 시설도 없는 탓에 사람이 자주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여느 뱃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평범하고 작은 커터가 하나 있었다.
돛도 작은 것 하나뿐이었고, 노를 저어야 하는 좁은 배였지만 로트는 그것 역시 너무 기뻐서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루셀라와 내가 많이 생각해봤다.”
뱃일하느라 거칠어진 손이 로트렐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반짝이는 아이니까.”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푸에르의 다정한 말에 로트렐리는 그를 끌어안고 기뻐했다.
“지금 당장 타 봐도 될까요?”
“이런……. 네 엄마와 내가 맛있는 음식도 준비해뒀는데, 나중에는 어떠니? 네 배는 다행히 발이 없어서 도망가지 못하겠구나.”
그 말에 로트렐리는 조각배 안의 노와 돛대를 만지작거리다가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제 이 배는 로트렐리의 것이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배를 탈 수 있으리라! 멀리까지 가진 못해도 바다를 질리도록 구경하다 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생각해도 로트렐리는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생일 내내 기쁜 마음으로 루셀라와 검술을 어떻게, 언제 배울 것인지, 아버지와는 배를 타고 어디까지 갈 수 있게 할 것인지, 배를 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따위를 떠들며 로트렐리는 생애 가장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자마자 로트렐리는 곧장 결정했다.
오늘은 수업 쨀 거야. 대신 바다에 갈 거야!
결심한 즉시 로트렐리는 바로 해변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로트렐리의 기대와 다르게 그녀는 먼바다까지 가지도 못하고 다시 배를 묶어 둬야 했다. 바람이 좋지 않아 돛이 제 역할을 못 했을뿐더러, 로트렐리의 힘은 아직 노를 젓기엔 한참 부족했다.
다시 뭍으로 돌아온 로트렐리는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자신에게 소소한 유감을 표했다. 이건 열이면 열 근육통이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유감을 보내기엔 일렀던 모양이다.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로트렐리를 기다리는 것은 루셀라의 엄한 호통과 날아드는 목검이었다.
결국 로트렐리는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목검을 몇 번이고 수없이 휘둘러야 했다.
해가 저물어 갈 즈음 녹초가 되어 돌아온 로트렐리를 보며 랄티아가 혀를 찼다.
“엄청 힘들어 보여. 이제 좀 후회가 돼?”
“후회라니, 말도 안 되지. 이렇게 지칠 정도로 움직인 건 정말 오랜만이야. 난 엄청 행복해!”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랄티아는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질린 것처럼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로트렐리는 지난 랄티아의 생일 때 랄티아가 루셀라에게 책이 가득 든 상자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동생의 태도 정도는 이해하고 눈감아 주었다.
로트렐리는 지쳤음에도 침대에 드러누워 히죽 웃었다. 열다섯이 되자마자 세상이 온통 꽃밭으로 변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수업이니, 자신에게 장난치던 남자아이들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자신은 검을 배울 것이고, 바다에 나갈 것이다. 이 상태로 어른이 된다면 정말로 항해하러 떠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꾸준히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도, 이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이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채 며칠 이어지지 못했다. 로트렐리는 초경을 시작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피에 흥건하게 젖은 이불과 속바지를 마주한 로트렐리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핏자국은 그렇게 떨어진 심장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렇게 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월경을 시작하면, 그러면……. 멍하니 핏자국을 바라보던 로트렐리는 재빨리 속옷에 천을 덧대고 속바지를 갈아입고, 이불을 둘둘 말아 밖으로 갖고 나왔다.
어쩌자고 이렇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로트렐리는 거의 무의식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걸 태우거나, 감쪽같이 빨아서 흔적을 없애거나, 아예 어디로 치워버리면 그래도 조금은 더 숨길 수 있을 것이다.
로트렐리가 초경을 시작했다는 것이 선생의 귀에 들어가면 아마 이곳저곳으로 혼처를 알아보고 다닐 것이다. 로트렐리가 수업을 자주 빠지기 시작하자 선생은 거의 병적일 정도로 로트렐리에게 집착했다.
배를 타고 놀거나 루셀라에게 검을 배우며 반쯤은 흘리고 잊고 있었지만, 그랬다. 변한 것은 로트렐리의 상황뿐이지 세상은 그대로였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로트렐리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아냐, 월경 사실을 숨기면 돼. 그렇게 오래 숨기지도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냐…….
그러나 마땅히 숨길 곳으로 생각나는 장소도 없었기 때문에, 로트렐리는 몰래 배에 이불과 피가 묻은 속바지를 싣고 서둘러 바다로 나갔다.
불을 피우면 분명히 들킬 것이고, 어디 땅에 파묻는 것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하나였다. 바다에 가라앉히는 것이다.
로트렐리는 그나마 자신에게 배가 있음에 감사했다. 로트렐리는 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한 즉시, 챙겨온 돌을 이불과 속바지로 묶어 물속으로 던졌다.
이러니까 무슨 죽은 사람이라도 처리하는 기분인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돌을 감싼 하얀 이불이 가라앉는 것을 지켜본 로트렐리는 문득 이 주변이 산호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맑은 바닷물은 새파란 빛깔로 물결치고 있었고, 그 안에 분명 꺼내면 색색으로 빛날 산호들이 가득했다. 초경의 흔적을 처리하러 왔다가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된 로트렐리는 섬과의 거리와 방향을 기억해두고는 다시 노를 저어 돌아갔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는가 싶었으나,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경우가 로트렐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을 연습하기 위해 집에서 나온 로트렐리의 앞을 선생이 막아선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의 그녀가 로트렐리를 진득하게 훑어보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녀는 로트렐리의 복장, 얼굴, 드러난 팔다리를 샅샅이 살펴보다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네 꼴 좀 보렴.”
로트렐리는 미간을 좁히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하루가 멀다고 검을 휘두르고 노를 젓다 보니 로트렐리의 팔다리는 저절로 튼튼한 근육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기 위해 편안한 튜닉과 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높게 올려 묶었으며, 햇빛을 많이 본 피부는 적당히 그을려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고? 네가 이렇게 하면 너만 안 좋은 걸 모르니? 수업에는 왜 안 나오는 거야?”
“다른 걸 배우고 있어서요.”
“다른 거 뭐?”
로트렐리는 선생을 흘겨보았다. 딱히 말씀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하고 말하자 갑작스레 선생이 로트렐리의 팔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로트렐리가 뿌리치려 하자 그녀가 윽박질렀다.
“누가 모를 줄 알고! 네 어머니가 검을 알려주고 있겠지! 이리 와! 와서 수업 들어! 네가 초경을 하기 전까진 숙녀답게 만들어야겠다. 왜 네 재능을 썩히고 그러니? 넌 꽃보다 고운 신부가 될 수 있을 거야! 왜 말을 안 듣니!”
“전 그런 사람 될 생각 없어요!”
“아니, 생각이 바뀔 거다.”
선생은 로트렐리를 끌고 가며 계속해 말했다.
“남편을 내조할 일도 아이 돌볼 일도 없다면 뭘 하고 살려고? 지금이야 네가 좋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이 먹고도 그럴 거니? 늙고 난 뒤엔 외롭고 몸은 불편할 텐데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어떻게 지내게?”
“상관없어요!”
“들어라, 널 위한 일이야!”
“싫다니까요!”
로트렐리가 거칠게 선생을 뿌리쳤다. 그 반동에 선생은 휘청이다가 겨우 똑바로 서서 분노어린 눈으로 로트렐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가 울리자 들판에 엎드려 시시덕거리던 마을의 아이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로트렐리 또래의 남자아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은 랄티아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로트렐리는 그들을 보고 멈칫 물러났으나 선생은 로트렐리를 붙들고 외쳤다.
“너처럼 말 안 듣는 여자아이는 처음 본다! 널 위한 일이라고 하는데도 은혜도 모르고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 일이니?”
“내가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게 날 위한 일이 될 수 있어요?”
“어른이 하는 말에 토 달지 마!”
“그럼 내가 싫다고 말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란 거예요?”
로트렐리가 소리치자, 선생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무시무시하게 로트렐리를 내려다보았다. ‘간단하지.’ 선생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싫다는 생각을 안 하면 돼!”
“궤변이야!”
로트렐리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수업을 같이 듣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수업을 들을 시간이 끝나서 나오는 중이었는지, 품 안에 자수천이며 실타래 따위가 가득 안겨있었다.
그러나 소리친 몇몇 아이들은 선생을 보며 그것을 바닥에 확 내던졌다.
“로트렐리의 말이 맞아요! 로트렐리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뭐가 나빠서? 우리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살 거야!”
“우리에게도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렇게 말하실 자격은 없어요!”
“너희 모두 조용히 하고 돌아가! 선생님은 로트렐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희에게는 볼일 없어!”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우르르 달려와 로트렐리의 뒤에 가까이 붙어 섰다. 로트렐리의 뒤에 숨은 것 같기도, 뒤에서 지지해주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구경하던 마을 아이들도 웅성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선생의 얼굴은 더 붉어질 수 없어 거의 파랗게 보일 정도로 울긋불긋해졌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끼어들지 못하고 선생의 눈치를 보며 물러났지만, 몇 명은 끝까지 남아 로트렐리의 뒤에 서 있었다. 로트렐리의 뒤에 선 아이들의 얼굴을 주욱 훑어본 선생이 외쳤다.
“로트렐리가 너희에게 나쁜 물을 들였구나.”
“아니요, 로트렐리는 우리와 상관없이, 선생님이 뭐라 하든 자기 꿈을 좇은 것뿐이에요. 저희도 그러고 싶은 것뿐이에요! 우리도 우리의 생각이 있다구요.”
항상 냉소적으로 말하던 여자아이가 대꾸하자, 선생은 인상을 찌푸렸다.
“말대꾸 하지 마!”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의 의사를 전할 수 있어요? 이게 모두 주제넘은 말대꾸인가요? 우리는 바느질만 하고 자질구레한 일만 하다가 원하지 않는 결혼 생활로 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너희들이 어려서 모르는 것 같은데, 너희가 하는 일은 자질구레한 일이 아냐. 일에 귀천은 없단다.”
“그래요. 그 말은 맞아요, 하지만 왜 우리에게 원하는 일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한풀 꺾인 듯 말하는 목소리에 선생은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느리게 말했다.
“응당 집안일과 내조는 여성의 일이야. 너희가 하는 일을 원하는 여자아이들은 뭐라고 설명할 거니?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자가 해야지. 태곳적부터 그래온 일이란다. 어른들의 지혜를 너무 얕보는구나.”
그 말을 들은 로트렐리가 말했다.
“저는 그런 일들을 하기 싫고, 우리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것 대신 검을 배우든 배를 타든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그럼 우리 부모님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건가요?”
“그저 너에게 잠시간 다른 곳에 한눈팔 시간을 주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너도 이제 네 자리로 돌아올 때다.”
“나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보다 ‘한눈파는’ 일이 더 즐겁고 잘하는데, 그럼 그게 제 자리 아닌가요?”
“아니! 네가 착각하는 거야! 넌 무엇 하나 이루지도 않았잖니! 그저 딴짓하는 게 즐거운 거지. 그런 건 남자들이 할 일이고, 넌 내 수업을 들어야 해!”
“전 선생님의 수업에서도 이룬 것 하나 없어요. 그리고 즐겁지도 않죠. 제 길은 제가 알아요.”
선생은 로트렐리가 입을 열자 다시금 화가 치솟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흥분해 소리쳤다.
“어딜 감히! 그건 남자들이나 하는 일이랬잖니! 여자애가 주제넘게 남자들 하는 일에 나서는 거 아니다!”
“…….”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들판에 있던 아이들도, 로트렐리의 뒤에 있던 아이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로트렐리는 잠시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에 기가 죽은 것이라고 여긴 선생이 침착하게 숨을 가라앉히며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돌연 푸른 눈이 벼락이 내리치는 파도처럼 섬뜩하게 빛나며 선생을 쏘아보았다.
로트렐리는 차갑게 말했다.
“일에 귀천은 없지만, 성별은 있군요. 그렇다면 일이 아니라 성별에 귀천이 있는 건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