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95)
바다새와 늑대 (94)화(95/347)
#94화
결과를 말하자면, 그들의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렇게까지 처참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연설을 준비했던 로트렐리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사람들의 앞에서 선생에게 뺨을 맞았고, 딸이 있는 집마다 매타작 소리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혼을 파기해달라고 주장한 여자아이는 마을에 있으니 오히려 헛물만 들었다며 다음날 바로 혼삿길에 올라야 했다.
선생에게 호되게 욕을 먹은 로트렐리는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집에 돌아와 루셀라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고, 랄티아는 그런 언니와 엄마를 우물거리며 쳐다보다가 울상이 되어 조용히 방에 틀어박혔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로트렐리의 아버지는 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지만, 한탄을 감추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네가 이 마을엔 너무 이른 사람인가 보다.”
로트렐리는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트렐리는 운이 좋은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지. 아버지가 자상한 탓에 자신을 매질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다음날 수업을 듣기 위해 유령처럼 모여든 소녀들은 전부 눈이 부어있고 종아리나 팔에 회초리 자국을 달고 있었다. 심지어는 얼굴에까지 멍 자국을 단 아이들도 있었다. 마치 누가 죽기라도 한 것 같은 끔찍한 침묵이 그 방을 뒤덮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젯밤 그 수십 명의 소녀 안에 살던 무언가가 죽어버린 것 같았다.
엘레나와 다퉜던 아이가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그 말에 소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엘레나조차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바늘을 천에 찔러 넣던 소녀는 화를 추스르려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다가 버럭 외쳤다.
“이제 만족해? 로트렐리, 너, 네가 검을 배우기 시작하니까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안 거니? 넌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잖아! 우릴 봐, 널 봐!”
그녀의 외침에 로트렐리는 칼에 찔린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소녀는 그런 로트렐리의 얼굴을 보고는 자기 자신도 칼에 찔린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넌 대단한 사람도 뭣도 아냐!”
로트렐리는 멍하니 천과 바늘을 쥐고 그녀를 보고 있다가 갑작스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로트렐리를 소녀들은 이제 더 이상 선망하듯 바라보지도, 우스갯소리를 건네지도 않고 수놓는 손만 굼실대며 움직였다.
엘레나만이 그런 로트렐리의 뒤를 따라 비틀비틀 뛰어와 그녀를 불렀다.
“렐, 로트렐리, 진정해. 다들 일이 실패로 끝나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냐.”
“알아.”
“내가 이런 걸 바랐을 리가 없잖아…….”
로트렐리의 목소리는 마치 사막에 며칠씩 있었던 듯 갈라져 있었다. 엘레나는 그런 로트렐리를 반쯤 안타깝게 바라보며 등을 쓸어주었다. 로트렐리는 울컥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든 로트렐리가 말했다.
“선생이나, 다른 어른한테 말하자.”
“뭐?”
“이번엔, 어제같이 요란하지는 않게 하자.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들도 뭐라 하진 못하겠지.”
“로트렐리.”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이런 일을 우리가 겪는 게!”
“로트렐리!”
엘레나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로트렐리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새파란 눈이 높게 일어난 파도처럼 위험하게 번쩍였다.
그런 로트렐리를 보며 엘레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만해, 렐. 나도 더는 너에게 못 맞춰줘.”
“…….”
“난 어제 다리가 부러질 뻔했어. 우리 집 꼰대가 조금만이라도 더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내가 널 쫓아 뛰어나오는 것도 못 했겠지.”
그만해. 우린 실패했어. 엘레나는 침착하게 말하고는 로트렐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느리게 뒤돌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엘레나의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흰 다리는 울긋불긋 피멍이 들어있었다. 로트렐리는 차게 얼어붙은 빙하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분명 여름이었다. 그런데도 살갗을 에는 것처럼 오한이 밀려와 로트렐리는 일순 퍼드득 몸을 떨며 급하게 발을 내디뎠다.
그곳에 있는 것이 시체 굴에라도 들어앉은 기분이라 참을 수가 없었다. 로트렐리는 마치 육지에서 들짐승이 쫓아오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미친 듯이 내달려서 자신의 작은 배로 도피했다.
섬이 작게 보일 정도로 노를 저어 나간 로트렐리는 망망대해에서 웅크려 한참을 씩씩대다가,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우, 하고 소리를 냈다.
연한 색의 나무배에 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점점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우는 게 서툴기라도 한 듯 흐느끼는 것도 엉엉 우는 것도 아닌 소리를 내던 로트렐리는 날개가 꺾인 새처럼 몸을 비틀었다.
서툰 울음이 청명한 파도 소리와 뒤섞여 포말로 변해 가라앉았다.
그 모든 게 자기 탓인 것 같았다. 결혼을 미루고자 했을 뿐인 아이는 오늘 이 섬마을에 남아있지 않았고, 서로를 위해 나선 여자아이들의 몸엔 상처만 새겨졌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저 운 좋게 자상한 가족을 가졌단 이유로 그들만큼의 체벌을 받지도 않았다…….
내가 이렇게 해도 되었던 걸까? 내가 나서서 더 일이 망쳐진 건 아닐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했다. 그저 몰래 혼자 배를 타고, 검을 배우는 것 같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일만 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게 되었단 말인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도 모르고 설치게 되었단 말인가? 결국 그 대가는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치게 되었는데…….
로트렐리는 실패자였다. 지독한 실패자였다.
그것이 로트렐리가 인생에서 얻은 가장 첫 번째 교훈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