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97)
바다새와 늑대 (96)화(97/347)
#96화
어두운 새벽에 홀로 시작된 뱃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해변에서는 램프만 있어도 주변이 그럭저럭 보였지만 망망대해는 그야말로 어둠뿐이었다.
로트렐리는 하늘에 뜬 샛별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날이 어두우니 나중에 가라는 푸에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배를 밀고 나온 로트렐리는 밤바다도 나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록 파도가 낮보다 높고 거칠었지만 로트렐리는 소금기 있는 거친 바람도 좋았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뱃일하러 바다로 나온 뱃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섬에서 배가 망가질 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난 것처럼 절망스러웠는데 막상 파도 위에 누워있자니 그 일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나는 또 달라진 걸지도 모르겠어.
로트렐리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항상 달라지고, 달라진 후에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전의 자신이 어땠는지는 기억해도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까맣게 울렁거리는 수면 위로 달과 샛별이 떠 있었다. 로트렐리는 조각배 난간에 팔을 기대고 느리게 출렁이는 흔들림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버지 말이 맞아. 나는 남들이 유별나다고 여기는 일을 하고 싶어 하니까. 어느 정도는 각오해야 해……. 모두가 날 지지해주거나 옹호해준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지.
로트렐리는 그것이 꽤 씁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벌떡 일어난 로트렐리는 챙겨온 노를 바다에 다시 걸치며 결심했다.
좋아, 상어나 고래라도 잡아버리자. 그리고 돌아가서 내 배를 부숴버린 작자들 콧대를 눌러줘야지.
물론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의 계획이 아니라 앞으로의 결심에 가까웠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제대로 해낸 것 없는 여자애지만, 내가 완벽해지고, 뭐든 잘하게 되면 날 깔보던 사람들도 자기 생각이 틀렸단 것을 부정할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로트렐리는 노를 저었다. 큰 물고기들이 지나다니는 해류라도 찾아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바다는 아직 너무 어두웠고, 램프의 불빛은 호롱호롱 빛나며 커터의 낮은 난간을 넘지 못했다.
로트렐리는 섬의 등대가 보이는지 확인하며 느리게 노를 저었다.
몇 시간 동안 나무를 손질했던 팔이 덜덜 떨렸지만 새로운 결심을 해서인지 이상하게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뭐든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 아래로 낮게, 심해에서 흐르는 해류처럼 불안감이 깔려있었다.
아, 어쩔 수 없어. 로트렐리는 생각했다. 나는 뭐든 혼자 하기엔 아직 어린걸…….
어둡고, 파도 소리만 들리는 바다는 얼핏 위협적이었으나 로트렐리는 왠지 그 위험함이 안락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지켜주기 위한 검처럼 말이다.
바다는 항상 비슷비슷했다. 사실 로트렐리가 배를 탄다고 해서 먼바다까지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망망대해에서 검거나 푸른빛의 물결을 지켜보는 일이 다였지만 이 시간만큼은 로트렐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책임질 것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붙여준 이름도, 마을에서의 시선도, 가족들의 걱정도 모두 떨쳐내고 오로지 검은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한 여자애 하나만 남는 기분이었다.
로트렐리는 노를 저으며 해류를 살피다가도 새파란 눈동자를 들어 점점 밝아져 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던 바다는 서서히 푸른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저 파랗고, 짠물로만 가득한 이곳이 왜 이리 좋을까.”
옅은 색으로 염색된 실로 짜낸 것 같은 엷은 구름이 걷어지는 어둠에 덩달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랗게 변해가다가 들판의 꽃 같은 색으로 번져갔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동살이 터오는 때에 바다에 있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로트렐리는 노을이 지는 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엷고 부드러운 색깔을 손끝에 물들일 것처럼 물결에 팔을 뻗어 물살을 갈랐다.
그때 손을 넣은 물결이 새파란 빛깔로 반짝였다. 깜짝 놀란 로트가 난간을 붙들고 수면을 응시했다. 울렁이던 수면에서 손을 빼자 손길을 따라 반짝이던 빛깔이 마치 모래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얼빠진 낯으로 몇 번이고 물살을 뒤적이던 로트렐리는 바다에 들어갈 것처럼 숙였던 몸을 벌떡 일으키고 생각했다.
이런 미친, 이런 환상적인 일이 있다곤 얘기 안 해줬잖아!
아무도 새벽의 물결은 반짝거리며 빛난다고 말하지 않았었다. 미친 거 아냐? 이런 끝내주는 일을 그동안 자기들만 알고 있었다 그거지?
손길을 따라 반짝이는 물결을 보며 다른 것은 모두 잊은 채 몰두하던 로트렐리는 눈을 찌르는 여명에 눈살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분홍빛인지 푸른빛인지, 혹은 그 모든 색이 뒤섞인 빛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수면이 느리게 흔들리며 로트렐리의 얼굴 위로 물비늘을 드리웠다.
새벽의 여신이 푸른 손가락으로 드리운 커다란 연꽃잎처럼 새파란 하늘엔 연한 분홍빛이 동살을 감싸고 번지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고 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자세히 보던 로트렐리는 그 아래 화려한 산호초가 뻗어 나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얼핏 진주 빛깔로도 보였다.
예전에 봤던 곳으로 온 건가? 자리를 옮겨 수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로트렐리는 문득 수면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잠깐, 목소리라고?
그 순간, 무게가 너무 쏠렸던 탓인지 배가 휙 뒤집히며 그 위에 있던 로트렐리를 바다로 처박았다.
“우왁!”
순식간에 차가운 물살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뼈가 아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지만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한기가 아니라 더운 날 불어온 바람처럼 산뜻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로트렐리는 수면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구야? 누가 내 잠을 방해하는 거야…….」
“헉.”
여자 목소리! 깜짝 놀라 입을 벌렸던 로트렐리는 황급히 입을 막고 산호초를 바라보았다. 진줏빛과 붉은빛의 산호로 둘러싸인 곳에 둥근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파란색 알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바라보니 겉은 오팔처럼 은은한 빛을 내는 투명한 막이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파란색이었다.
그것은 호흡으로 들썩이는 짐승의 몸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 푸른 것이 느리게 물결치듯 움직였고, 그리고…… 매우 거대했다.
로트렐리가 여러 명이 되어 양팔을 벌려 끌어안아도 차고 남을 정도의 너비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결치듯 움직이는 것은 깃털이었다. 수없이 많고, 겹겹이 이어진 깃털.
로트렐리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날 자게 내버려 둬. 내 동포들도 모두 떠나갔어……. 난 이제 혼자라구…….」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마치 잠에 취한 사람이 잠투정을 부리는 것 같이 들려왔다. 로트렐리는 그제야 그 산호 군락 주변에 아주 오랜 문명처럼 보이는 잔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쯤 부서진 성벽, 따개비와 해초에 뒤덮인 수레, 누군가가 사용했을 수많은 집기와 건물의 터 따위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산호에 둘러싸인 투명한 알 속 거대한 무언가는 그것만으로도 외롭고, 동시에 고결해 보였다.
아름답고 쓸쓸하게 파괴된 성지에서 홀로 잠드는 신처럼…….
‘헉.’
로트렐리는 자신이 너무 오래 물속에 있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헤엄쳐 수면으로 올라갔다. 머리가 공기 중에 나가자마자 푸하, 하고 숨을 쉰 로트렐리는 젖어서 이리저리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대충 넘기고 눈을 끔뻑였다.
대체 저게 뭐지? 내가 뭘 잘못 본 걸까? 그러나 로트렐리의 발밑엔 아까의 그 거대한 알이 있었다.
여전히 수면 아래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멍하니 가쁜 숨을 헐떡이던 로트렐리는 이내 결심한 얼굴로 다시 잠수했다.
「누구야…? 누구기에 나의 영면을 방해하는가…….」
목소리는 전보다 조금 더 명료했다. 하지만 여전히 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게 들렸다. 로트렐리는 왠지 이것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것이 만일 단잠에 빠진 바다 괴물이라면 당장에 도망쳐서 마을에 알려 괴물을 잡거나 경계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예감이 있었다.
오랫동안 꾸던 푸른 꿈을 마주한 것처럼 그리운 감각이 있었다.
「아, 이 냄새……. 몸서리나는 인간의 냄새…….」
로트렐리는 느리게 헤엄쳐 산호초 가까이 가 그 투명한 알을 바라보았다. 푸른 깃털이 알 안에서 파도치는 것처럼 미끄러졌다.
새파란 깃털은 바다의 모든 파도를 가져와 빚은 것처럼, 새파랗기도, 검푸르기도, 때로는 청록빛이기도 했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긴 로트렐리는 투명한 알에 손을 올렸다.
서늘하고, 동시에 따스했다. 새벽의 공기처럼.
「그리고 내가 염원하던 향수(鄕愁)…….」
순간 파란 깃털이 막 안에서 휘몰아치듯 움직이더니 자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것은 거대한 새였다. 바다의 아래, 산호와 함께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새.
로트렐리는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넋을 잃었다. 그 새는 커다란 부리와 머리를 로트렐리가 짚은 손을 향해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이야, 넌 누구니? 어쩌다 이 바다에서 나를 발견하게 된 거지?」
“나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한 로트렐리는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물속인데 말을 할 수 있어! 새는 로트렐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로트렐리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그냥 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기이한 일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방법으로 잠들었어. 초월자가 아닌 이상 날 찾지 못했을 텐데.」
새는 투명한 알 너머로 수면을 바라보았다가 에메랄드와 산호의 빛으로 일렁이는 물결의 색을 보고 말을 이었다.
「아, 새벽이 불러낸 마법이던가.」
그러더니 새는 로트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바다의 주인이 빚은 존재 중 하나다. 바다 위를 다니는 인간들을 가호하고 그들이 길을 잃지 않길 빌어주며 뱃일을 돕는 바다새야. 새이지만 바다에 종속되어 있으며 바다의 흐름을 따라 태어나고 잠든다.」
“바다새…….”
「이젠 그마저도 모두 옛말이야. 바다의 주인은 죽었고 땅들은 가라앉았으며 남았던 동족들은 모조리 사라졌지. 나도 이제 그들처럼 사라지기 위해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려던 차였다.」
로트렐리는 거대한 새가 비눗방울처럼 빛나는 알 속에서 헤엄치듯 몸을 움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새는 로트렐리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눈이었다. 서로를 꿰뚫는 것 같은 시선이 교차했다.
이내 바다새가 말했다.
「네가 나를 깨웠구나. 나는 네게 가호를 내리고 싶어. 넌 어떠니?」
로트렐리는 자신이 저체온증으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코앞에서 자신을 보며 말하는 거대한 새는 너무 실감 났고, 그다지 춥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로트렐리는 이 새의 제안에 가슴이 터져나갈 것처럼 뜨거웠다.
“내…… 내게 가호를 내린다고?”
「그래.」
“난 배에 자주 오르지 못할 수도 있는데?”
「나는 네 항해를 모조리 보고 싶은 거야. 항해란 또 다른 말로 너의 삶이지. 알 것 같아. 여태 너의 항해는 그다지 순탄치 않았구나.」
거대한 새의 말에 로트렐리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자신의 항해는, 자신의 삶은 함께하는 선원 하나 없이 표류하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해도를 보지도 못하는 항로를 가려던 참이었다. 로트렐리는 자신이 내심 불안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내 편이 필요해. 단순히 지지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존재가.
로트렐리의 눈에서 답을 들은 새가 고개를 높이 들며 말했다.
「인도하는 등불을 부리에 물고 너의 뱃길을 밝히는 새가 되리.」
그 말과 함께 투명한 막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하나의 세상이 깨지는 것처럼, 혹은 바닷속에서 투명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열리고.
「내 이름은 발카란다, 바다와 새벽을 눈에 담은 아이야.」
세상에 마지막 남은 바다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