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98)
바다새와 늑대 (97)화(98/347)
#97화
발카는 바닷속을 날듯이 솟구쳤다. 동시에 새의 발에 잡혀 수면으로 끌어 올려진 로트렐리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번뜩 떴다.
비단으로 만든 커튼을 걷어내듯 터오른 동살이 눈을 찌르며 펼쳐졌다. 바닷물은 마치 거친 수정처럼 빛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로트렐리가 타고 왔던 배를 다시 뒤집은 뒤 그 위로 로트렐리를 올려준 발카는 허공에서 거대한 몸을 빙글 돌리는가 싶더니 작은 크기가 되어 뱃전에 앉았다. 로트렐리는 바다와 발카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작아질 수도 있어? 요?”
『편하게 불러. 그리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일이야. 잠이 들 때는 힘을 비축하고 있으니 큰 몸체여도 문제가 없지만, 깨어나기로 한 이상 힘이 소진되니까.』
“그럼 그 크기가 본체인 거야?”
『그렇지. 앞으로 몇 번은 본체를 드러낼 수 있겠지만 정확히 몇 번이 될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난 너에게 가호를 주고 바다와 날씨를 읽어줄 뿐이니까 그런 큰 모습은 필요 없겠지.』
로트렐리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머뭇거리며 발카의 깃털을 쓸어보았다. 파도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질 줄 알았으나 오히려 쌓인 눈을 가볍게 쓸어내리는 것 같은 감촉이었다. 발카는 순순히 머리를 로트렐리의 손아귀에 문질렀다.
로트렐리는 그런 발카를 보다가 물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네가 바다새인 걸 믿지 못하면 어쩌지?”
『섬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바다새임을 믿지 못하겠지. 그럼 그때 내 본모습을 한 차례 드러낼 거야. 그렇게 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니까…….』
“그렇구나.”
그 말에 마지막 걱정까지 가신 로트렐리는 발카에게서 손을 떼고 노를 쥐었다. 그 뒤는 순탄했다. 해안가에 도달한 로트렐리는 어느 정도 자신의 행동을 예상한 듯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과 마주했고, 발카는 거대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파도가 섬을 덮는 것처럼 날개가 하늘을 가리고, 물결치듯 깃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데려왔던 테드 역시 경악을 담아 로트렐리와 발카를 보았다.
로트렐리는 그 얼굴을 보고 통쾌함과 희열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왜 뱃일을 나가게 되어도 네가 선장이 되어 항해하지 못하는 거야? 다른 인간들은 바다새도 없으면서.』
“아직 어리니까……, 뭐 그런 이유겠지?”
『흐음. 나 때는 바다새를 데리고 있는 자가 그 배의 으뜸이었는데.』
물론 그 탓에 여럿 죽기도 했지. 바다새는 귀하니까. 발카는 제 종족의 잔혹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동족에 대한 유감은 있지만, 그것을 로트렐리에게 설명할 때는 그런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정보의 나열처럼 말하곤 했다.
‘바다새를 데리고 있는 로트렐리’의 소식은 순식간에 작은 마을을 덮었다. 여전히 로트렐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선생은 분한 것 같았으나 어차피 로트렐리가 월경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 삼아 먼발치에서 로트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월경은 이미 시작됐고, 단지 감추고 있을 뿐이지만 굳이 그녀에게 알게 할 필요는 없지. 로트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 위에 앉은 발카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발카는 로트렐리가 집에 있을 때면 항상 머리 위에 앉아 있었는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로트렐리의 동생들 때문이었다.
“우와, 방금 날개 움직였어!”
“발카 부리 만져보면 안 돼, 누나? 응? 한 번만!”
“안 돼. 너희 때문에 발카가 누나 머리에서 안 내려오잖아.”
『이 쪼끄만 것들은 새 처음 보나, 왜 이러는 거야?』
어린애들이잖아……. 로트렐리는 생각했지만, 굳이 어린 친구들 앞에서 그들의 나이를 들먹여 ‘우린 다 컸거든?’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결국 뼛속까지 뱃사람인 푸에르가 발카를 위해 쌍둥이 형제를 옆구리에 끼고 식탁에 앉기 전까지 푸른 새는 폴짝거리는 아이들에게 닿을까 내내 전전긍긍해야 했다.
루셀라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 랄티아는 바다새의 전설과 조류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다며 쌓아둔 책들 사이에 파묻혀있었다. 로타와 루티가 칭얼거리다가 푸에르가 짐짓 엄하게 말하자 결국 얌전히 그의 양옆에 앉았다.
로트렐리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아빠가 수염 안 깎고 뽀뽀하면 싫어하면서.”
“우린 수염 없어!”
“맞아!”
“아버지의 뽀뽀가 싫은 건 부정하지 않는 거니?”
푸에르가 가슴을 부여잡고 안타까워했지만 루셀라까지 ‘당신 수염은 좀,’하고 말하자 그를 향해 위로는커녕 웃음만 날아들었다. 루셀라는 로트렐리의 뺨에 뽀뽀를 해 주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도 엄마의 뽀뽀는 좋지? 로트렐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을 리가 있겠어.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엔 루셀라와 푸에르는 아직 어린 쌍둥이 동생들을 재우러 갔고, 랄티아와 로트렐리만이 식탁에 남아있었다. 자매는 종종 이렇게 식탁에서 수다를 떨곤 했으므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발카도 있지만.
한창 책을 읽던 랄티아가 물었다.
“정말로 발카가 말을 해?”
“응.”
“신기하다. 왜 나한테는 안 들릴까? 공기의 울림에 차이가 있나? 그러면 역으로 언니가 특별한 청력을 가진 걸지도 모르겠네.”
“나도 이전에는 동물의 말을 들은 적 없거든.”
그래도. 어쨌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어. 랄티아는 그렇게 웅얼거리며 식탁에 있는 차를 홀짝이고는 싸구려 차의 맛에 혀를 빼죽 내밀었다. 로트렐리는 동생이 그럴 때마다 웃겨 죽을 것 같았다. 자기가 언제 고급스러운 차를 마셔봤다고 저런 반응이란 말이야.
그때 발카가 문득 말했다.
『네 어미를 보다 보면 신기해.』
“응?”
『제 배를 찢고 나온 이들을 어떻게 저리 아끼지?』
‘배를 찢고’……. 아니, 표현이 너무 잔인하잖아! 로트렐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식탁에 앉은 발카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하자면 모성애 같은 거지. 그 말에 랄티아는 제 언니가 새와 대화하나보다, 하는 눈으로 잠시 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생이 저렇게 책을 좋아하는 것을 볼 때면 로트렐리는 어머니가 가문을 나올 때 내던진 게 책이 아니라 신분이라서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발카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 같은 자식을 돌보고 아끼는 건가? 제 배에 품었다 나온 것들이라서?』
“글쎄……. 나도 엄마였던 적은 없어서 모르겠는데.”
『넌 네 부모의 간섭을 꽤 달갑게 받아들이잖아. 그들이 가끔 독선적인 말을 할 때도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그러면 싫어하면서.』
“음…… 부모님 말 들으면 떡이라도 떨어진다는 말이 있잖아…….”
로트렐리는 발카가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님 말을 듣는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로트렐리가 항상 부모님 말을 듣는 딸인 것도 아니었고, 가끔은 제멋대로 굴 거나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발카가 말했다.
『넌 네 어미 같은 사람의 말을 존중하는구나.』
아니……. 난 원래 웃어른이라면 나이를 어지간히 헛먹은 작자가 아닌 이상 존중하는데……. 로트렐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바다새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로트렐리가 발카와 함께 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섬 앞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나 섬이 큰 피해를 보았다. 과일이 떨어지고 농작물이 누운 것은 둘째치고, 뱃일이 가장 낭패를 보았다. 날씨를 읽지 못하고 나갔던 배들이 난파된 것이다. 겨우겨우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몇 명은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자 마을의 가장 어른 된 주술사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바다새를 가진 로트렐리를 뱃사람으로서 뱃일을 할 수 있게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로트렐리는 쾌재를 불러야 할지 난감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드물게 로트렐리가 고민하는 기색이자, 누고라는 이름의 그 주술사는 쭈글쭈글한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니면 바다새를 다른 이에게 양도하거라.”
“네?”
“그 바다새를 다른 놈과 붙여두고 항해를 나가면 저가 죽기 싫어서라도 날씨를 읽고 기색을 보이겠지.”
로트렐리는 말을 잃었다. 랄티아와 발카가 알려준 옛 바다새의 이야기처럼 자신을 죽이고 바다새를 뺏으려 들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한 로트렐리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뱃일에 뛰어들었다.
딸을 걱정한 푸에르가 함께 하기도 했기에 은근한 텃세가 있어도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로트렐리는 슬슬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뱃일을 나가 고기잡이를 하거나 바다를 읽어내고, 뱃일에 대한 부족한 지식은 발카와 푸에르를 통해 배우고, 뱃일이 없을 때면 루셀라에게 검술을 배웠다. 정말로 몸이 몇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런 로트렐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나대더니 결국 해내네, 하는 여자애들의 시선, 어디서 바다새를 얻어다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는 남자애들의 시선, 어린 여자애가 벌써부터 욕심만 많다는 어른들의 시선…….
하지만 그들은 로트렐리의 일을 트집 잡을 만한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완벽에 가깝게 해냈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트렐리 입장에서도 항상 무리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코앞에서 트집 잡을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로트렐리는 모든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들도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은 저들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유별난 사람이 아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너무 많은 걸 해결하려고 해.”
책에 고개를 박은 랄티아가 말했다. 랄티아 앞의 로트렐리는 코밑을 흐르는 피를 멎게 하려고 코를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참이었다.
로트렐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걸 코앞에서 부정해줘야지.”
“……무리하는 거 아냐?”
“별수 없지 뭐.”
랄티아는 로트렐리를 향해 이해한다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했다. 확실히 최근엔 좀 많이 무리하긴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새벽까지 검술 연습을 하고…….
그렇게 어느새 로트렐리는 한 살을 더 먹어 열여섯 살이 된 것이다. 뱃일에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발카와 푸에르에게 조언을 구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로트렐리에 대한 말들은 열다섯일 때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나빠졌으면 더 나빠졌을 뿐이다.
랄티아는 책을 덮고 말했다.
“언니는 좀 더 요령 있게 굴어도 돼. 언니가 그렇게 무리하면서 애써도 이득은 언니 덕에 편안한 뱃일 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잖아.”
“요령 쓰면 소리 들어. 차라리 뭐든 완벽하게 해서 날 욕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되는 게 낫지.”
“그것도 뭉치면 편하게 합리화하는 사람들뿐일 텐데.”
로트렐리는 코피가 멎은 것을 확인하고 피가 묻은 손을 닦아내고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난 그래도 바다를 보면서 뱃일하는 거 좋아.
그런 로트렐리 옆에서 발카가 조마조마한 태도로 물었다.
『피는 멎은 거 확실해?』
“응, 이제 멈췄어.”
랄티아는 그런 언니를 보며 한숨만 쉬었다. 마을에서 떠드는 소리가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모르니 저런 태도인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앞에서 험한 소릴 깨우쳐줄 생각도 없었던 랄티아는 조용히 책이나 마저 읽었다.
사실 랄티아도 제 언니에 대한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로트렐리는 열여섯이 되자 키가 쑥쑥 자라났다. 두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랄티아는 아직 작은데도, 로트렐리는 열심히 움직이고 잘 먹어서인지 팔다리는 사슴처럼 길쭉하고 어른티가 나려고 하는 얼굴은 갸름해져 유려했다.
뱃사람이면서도 깨끗한 피부는 백사장처럼 부드럽게만 보였다. 땋아서 질끈 묶은 까만 머리칼은 또 어떻겠는가. 그 사이에서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도.
말하자면 로트렐리는 착실하고 완벽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로트렐리의 혼처를 노리는 시선도 많아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로트렐리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마을에서는 로트렐리의 가치를 깎기 위해 혈안이었다. 값을 후려치고, 또 후려치고……. 그러다 보면 헐값에 아리따운 소녀를 얻을 수 있는 데다, 심지어 바다새까지 딸려 온다.
물론 로트렐리 본인의 의사는 일절 반영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가치를 알고 있는 만큼 아무리 헐뜯어도 좀처럼 값이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랄티아는 차라리 그럴 거라면 로트렐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고 다녀서 아무도 로트렐리를 거들떠보지 않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편이 로트렐리에게도 더 좋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가 결혼 시장의 가격표처럼 쓰인다는 건 너무 씁쓸한 일이었다. 이걸 얘기해봤자 언니가 머리 싸맬 고민만 늘어나겠지. 랄티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비죽였다.
“이딴 마을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랄티아는 로트렐리의 대꾸에 픽 웃을 뿐이었다.
랄티아가 초경을 시작했다. 마을에서 랄티아를 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루셀라와 푸에르는 결연하게 안 된다고 외쳤다. 랄티아가 바라는 사람과 결혼시킬 것이고 혹여 상대가 안 나타난다면 안 시킬 것이라고 굳건하게 말하자 랄티아는 그림 속의 과일처럼 넘볼 수 없어졌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의외로 로트렐리였다. 제 동생도 초경을 시작했는데 로트렐리가 아직까지도 월경을 안 한다니. 수군거리는 소문 사이로 혹여 불임이나, 지병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추측도 난무했다. 상당히 무례한 발언들이었지만 없는 곳에선 나라님 욕도 하는 법이었다.
로트렐리는 어느 정도 그런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루셀라와 푸에르였다.
“정말 아직까지 초경을 안 했니?”
“……음.”
이 둘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트렐리는 이걸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루셀라가 말했다.
“혹시 몸에 문제가 있는 거면 어떡해. 응?”
“그래, 자연스럽게 때가 되면 해야 하는 일인데,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르잖니.”
이제 푸에르와 루셀라는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솜씨 좋은 의원을 데려올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의사라면 누가 좋을까? 동쪽이 의술로는 뛰어나다던데. 아냐, 거긴 너무 멀잖아…….
로트렐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렇게까지 숨겼으면 되었다.
“초경은 진작 시작했어요.”
“뭐!”
“다행이다! 어디 아픈 건 아니었구나. 그런데 왜 숨기니? 걱정했잖아.”
로트렐리는 어깨를 모으며 눈을 굴렸다. 아시잖아요……. 그 말에 루셀라와 푸에르는 한숨을 쉬었다. 둘은 큰딸의 고민을 모를 만큼 무심한 부모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로트렐리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혼사 때문에 그런 거면 걱정하지 마라. 랄티아와 똑같이, 우리는 네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시킬 생각 없어.”
루셀라는 로트렐리를 안아주며 말했다. 혼자 다 떠안으려 하지 말고 좀 기댈 줄도 알아야지. 로트렐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루셀라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엄마 품은 어떤 상황이든 다 잘 해결될 거라는 안도감을 준다. 로트렐리는 가족들이 있는 한은 자신이 튼튼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처럼 보호받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좀 더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짚어낼 수 있을까? 어디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인지 간파할 수 있을까?
어쩌면 로트렐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다로 사라지는 일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