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99)
바다새와 늑대 (98)화(99/347)
#98화
로트렐리가 초경의 사실을 숨겼다는 이야기도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의도하고 얘기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이틀 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트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다.
로트렐리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굳이 반응을 보여 더 말할 거리가 생기게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 일이 혼자 고고하게 군다고 해결되지만은 않았다. 누고―주술사―의 호출로 불려간 로트렐리는 다짜고짜 뱃일을 그만두라는 소리를 들었다.
월경하는 어엿한 여자가 되었으니 뱃일을 하기엔 적절치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로트렐리는 잔잔하게 짜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왜 제가 뱃일을 하면 안 되나요? 그야 숙녀가 되었잖니. 여자가 배에 오르면 재수가 없다. 전 원래도 여자였는데 월경 하나로 ‘진짜’ 여자라고 뱃일하는 게 안 되나요? 생리혈은 항해 중인 배에 뿌리는 거 아니다. 아니 미쳤다고 뿌리겠어요? 여태 잘만 해왔잖아요? 여자가 배에 타면 재수가 없다.
아니, 내가 지금 앵무새랑 말하나…….
심지어 그들은 로트렐리가 바다에 나가지 못할 것이니 발카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라는 말을 했다. 로트렐리는 자신이 계속해서 뱃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누고는 완고했다.
“발카는 절 선택했어요. 누구한테 가라고 해도 가진 않을 거예요.”
결국 그렇게 말했지만 로트렐리는 내심 불안했다. 발카가 ‘아니? 난 얼마든지 새로운 주인한테 갈 수 있는데?’ 하면서 가버리면 자신은 배에 올라탈 명분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누고가 말했다.
“그건 모를 일이지. 네가 선택받았다면 다른 누구든 선택받을 수 있는 일 아니더냐? 당장에 마을 사내들을 모아다 그 새에게 보여야겠다.”
“저기요! 발카는 제 새예요!”
“착각하지 마라, 로트렐리 아피나! 네가 잘나서 그 새가 널 택한 게 아니라 그 새가 널 택했기에 네 가치가 올라간 것뿐이야!”
늙은 할멈의 말에 로트렐리는 칼에 찔린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가슴팍에 얼음덩이가 꽂힌 것처럼 순간 명치부터 온몸이 써늘했다. 그리고 뒤이어 차가운 불꽃이 정수리부터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잠시간 로트렐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좋아요, 어디 두고 봐요. 과연 발카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할지! 이 섬의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안 될걸요!”
“그건 정말로 두고 볼 일이지. 대신 너는 네 새가 다른 사람에게 간다면 선생과 대화해야 할 거다.”
누고가 곁에 있던 수양딸에게 무어라 손짓하는 것을 보며 로트렐리는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선생과 대화해야 할 거다’라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로트렐리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 망할 선생이 기어코 로트렐리를 누군가에게 시집보낼 준비를 할 생각인 것이다!
그때 내내 고요하게 로트렐리의 어깨 위에 앉아 그들을 보던 발카는 유유자적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 같은 바다새들은 주인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을 함부로 바꾸지 않아.』
그 말에 로트렐리는 내심 안도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발카의 말을 믿자. 하긴 믿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여태 발카는 로트렐리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자 로트렐리는 문득 발카가 자신에게 온 이후로 자신은 더욱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로트렐리’를 보기라도 했지, 이제는…….
로트렐리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그런 생각은 쓸모없다. 달리 누굴 탓할 일도 아니고, 그저 지금은 누고와 선생의 콧대가 뭉개질 일만 기다리면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섬에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새를 가진다는 희망에 부풀어 모여들었으나 발카가 말했던 대로 파란 새는 아무도 택하지 않았다.
누고와 선생은 탐탁잖은 얼굴이었고, 모여든 남자들도 시간 낭비를 했다며 구시렁댔지만 로트렐리는 어찌어찌 넘어갔다는 데에 의의를 뒀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그 이후로도 뱃일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원래도 그다지 고운 시선을 받진 않았지만, 더 심해졌다는 뜻이었다.
로트렐리는 피곤했다. 뱃일하며 그물을 걷거나 하다가도 배의 선장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 괜히 발카에게 날씨를 읽으라고 시켜댔고, 잠시 쉴 때면 농땡이 부린다며 눈치를 줬다. 그럼에도 로트렐리는 뱃일이 있을 때면 항상 함께 참여했다. 한번 슬쩍 발을 빼면 아예 다시는 배에 못 오르게 할까 두려웠다.
푸에르는 딸이 다시금 뱃사람이 된 것을 축하하며 로트렐리에게 붉은 자갈을 매단 목걸이를 선물했다. 기쁘게 그것을 목에 건 로트렐리는 때때로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좀만 참으면 돼. 이까짓 간지럽지도 않은 텃세쯤이야, 로트렐리의 능력이 증명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다를 보게 될 때면 그 푸른 파도와 물결에 잠시나마 피로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기회가 올 거야.
그러나 반대로 속이 답답해질 때면 모래사장에 고개를 처박은 기분이 되었다. 다른 소년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로트렐리처럼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자신만…….
로트렐리는 억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꼴사납게 굴지 말자. 나는 내 길을 가면 돼. 가족들도 발카도 날 응원해주니까. 할 수 있겠지.
그래야만 했다. 그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아가겠어. 적어도 가족들이 ‘괜한 짓 했다’하는 소리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로트렐리는 섬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소년이 여자아이들 틈에서 자수를 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에 로트렐리에게 자신은 뱃일이 싫다고 하던 소년이었다. 자기 적성을 찾은 건가, 하며 지나치려는데 로트렐리의 뒤에서 오던 소년들이 그를 보고 왁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뭐해, 계집애냐?”
“미친놈, 네가 남자야? 그냥 여자 하지 그래?”
야유하며 키득이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소년은 수치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주변에서 같이 수를 두던 여자아이들이 당황스러운 듯 소년과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트렐리는 그를 놀리던 남자애들의 오금을 걷어찼다.
“악! 아피나, 미쳤어?”
“오늘 아무것도 못 하던 너보다는 쟤가 더 자기 자리 잘 찾아간 것 같은데?”
“뭔 소리야, 내 자리가 어딘 줄 알고?”
“어디긴 어디야, 물고기 밥 자리지. 오늘 미끼통에 네가 없길래 깜짝 놀랐지 뭐야. 내일은 잘 들어가 있어라.”
로트렐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소년들은 이제는 로트렐리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덤벼들지도 못하고 욕만 짓씹었다. 망할 년, 진짜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그들이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로트렐리는 이제 그 정도 욕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 맷집이었다. 이 영광을 망할 마을에게 돌립니다, 하고 생각하며 걸어가던 로트렐리는 자수를 두던 소년과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자신의 상황이 수치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로트렐리는 단순히 궁금해졌다.
“선생이 네가 자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순순히 허락해줬어?”
“그래, 내가, 내가 뱃일을 잘 못 하니까…….”
“아, 그래.”
나는 자수 못 둬도 뱃일은 죽어도 안 시키려고 하던데. 그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로트렐리는 삼켜 뒤로 넘겼다. 잘된 일이고 옳은 일에 굳이 억울함을 토로해봤자 로트렐리만 비참해질 뿐이다.
그러나 소년은 로트렐리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내가 되먹지 못하다고 생각해? 넌 여자애면서 뱃일도 하는데 나는 고작 그런 걸 못 한다고?”
“뭐? 아냐.”
“못 하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 난 배에만 타면 멀미가 나. 출렁거리는 물살만 보면 속이 뒤집혀서 싫다고…….”
“뭘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뱃일이 멋있고 더 대접받는 일이라서 하는 게 아냐.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그리고 너나 다른 여자애들이 하는 일이 하찮다고도 생각 안 해.”
그 말에 소년은 자수용 천을 찢을 듯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갑판 쪽에 모인 남자들 방향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말했다. 난 그냥 이 일이 더 좋은 건데 왜 다들 날 모지리 취급할까. 로트렐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뱃일이 좋은 것뿐인데 드센 취급 받고 있지.”
“넌 드센 게 맞아. 사실 뱃사람들은 다 거칠어. 소금 바람을 쐬더니 그런가…….”
로트렐리는 ‘드세다’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로트렐리는 뾰족한 말을 던지는 대신 오랜만에 편안하게 대꾸했다. 넌 모지리는 아닌 것 같네.
소년은 그 말에 삐죽 웃더니 가보겠다며 터덜터덜 여자아이들이 있던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아귀에서 팔랑이는 천에 수놓인 자수는 로트렐리의 솜씨보다야 훨씬 훌륭해 보였다.
그가 로트렐리만큼의 고난 없이 저들과 섞일 수 있었단 점은 부러웠고 질투 났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자신대로 애쓰면 되겠지. 그라고 해서 별다른 고난이 없었겠는가…….
로트렐리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이내 다시 멈춰 섰다. 그래도 왠지 허탈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다르고 뭐가 그렇게 같단 말인가? 어차피 사람들은 죄다 제각기 다르고 죄다 제각기 똑같다. 수업 듣는 여자애들 성격이 다 똑같았겠는가? 로트렐리에게 헛소리하던 사람들이 다 똑같은 사람이었겠는가? 그런데 굳이 이렇게 다르게 취급할 건 뭐야.
아……. 죄다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로트렐리가 바다에 나가는 것을 경계한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더는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뭘 하든, 뭐라고 하든, 자신이 뭘 하든 전부 상관없이 내던지고 혼자 바다 한가운데에서 살고 싶었다.
누구의 딸도, 언니도, 누나도, 친구도 아닌 사람이 되어서, 나에 관한 것은 내가 알려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유별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서 흐르는 물결처럼 살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은 먼바다의 망망대해에 있는데 몸은 시냇물에 갇혀 자갈돌과 굽이치는 물살에 치이면서 사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기회만 있다면 다 내던지고 도망갈 텐데. 로트렐리의 말에 발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가족은 어쩌고? 뱃일은 어쩌고?』
“그러니까 아무 곳도 못 가는 거야, 발카.”
『이해할 수가 없어.』
로트렐리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흘러가는 바람을 따라 고개를 젖히며 하하 웃었다. 너는 날개가 있어서 좋겠다, 어디든 날아갈 수 있으니까……. 여전히 아우성치는 바윗길에 둘러싸여 흘러가지 못하는 상태로, 로트렐리는 열일곱이 되었다.
아버지 푸에르가 죽은 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