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기대를 저버리지 않다
공 마마가 말했다.
“아마 이 일은 결국 집안에 숨길 수는 없을 거예요. 만약 나머지 두 집에서 눈독을 들여 노태야와 노부인에게 가서 일러바치면 온 집안의 미움을 사게 되겠지요. 그러니 부인께서도 뭔가 대책을 세우셔야 해요.”
도 씨가 냉소했다.
“뭣 때문에? 우리 친정에서 날 도와서 돈을 벌게 해 줄 때마다 그 사람들까지 끼워 줘야 한단 소리야? 그 인간들이 평소에 나한테 잘하기라도 했어? 아직 돈을 벌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인간들을 생각해 줘야 해?”
도씨도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공 마마의 이 걱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염지를 산 일에 대해서도 노부인은 말을 빙빙 돌려서 여러 번 그녀를 꾸짖었다. 결국 그녀가 임씨 가문의 며느리이고 임씨 가문의 가업이 튼튼해야 장래에 아이들 몫이 있는 것인데 어찌 이기적으로 혼자서만 이익을 챙기려 하냐는 뜻이었다.
“어머니, 일단 외숙부가 식량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이 일은 숨길 수가 없어요.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둔 뒤에 사람들한테 흘려서 집안 사람들 귀에도 들어가게 만들면 돼요. 별로 어려울 것 없어요.”
임근용이 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제 곧 식량을 수확하는 계절이니 빨리 가야지 늦으면 안 돼요. 이 일은 세전 오라버니에게 맡기세요. 오라버니가 혼자서 움직이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거예요. 철 집사도 오라버니와 잘 알아요. 이 일을 아버지한테 알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일단 며칠 미뤄뒀다 나중에 알려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럴 때엔 임 삼노야를 방패막이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도 씨는 눈을 비비고 자신의 딸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공 마마, 가서 세전이 좀 불러와. 그 아이한테 시킬 일이 있어.”
* * *
임세전은 이미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도씨가 이러한 시간에 그를 만나자고 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펄쩍 뛰었다. 그는 곧바로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벌떡 일어나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갖춰 입었다. 그는 냉수로 세수를 하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도씨는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임근용을 통해 여비를 전달하며 물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겠니?”
임세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님, 걱정 마세요, 아무 문제 없어요.”
말을 빨리 달리게 하려면 배불리 먹여야 하는 법이다. 도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약속했다.
“아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숙모가 널 섭섭하게 대우하진 않을 거야.”
임근용이 임세전을 배웅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셋째 오라버니, 내가 오라버니 몫도 포함해 둘게요.”
임세전이 고개를 돌리자 달빛에 비친 임근용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얼굴과 눈빛을 보고 마음이 절로 따뜻해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절대 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
* * *
이튿날 이른 아침, 임세전은 동이 트자마자 따라붙는 임씨 가문의 하인들을 피해 말을 타고 급히 평주로 돌아갔다. 그는 길 위에서 밥 먹고 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빨리 돌아가 철집사를 찾아 식량을 구매하고 임근음을 찾아 돈을 마련할 생각만 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도순흠은 도봉당에게 식량을 사러 가라고 지시했고 자신은 향약에 대해 알아보러 갔다. 그는 각장 곳곳에 있는 상점들을 한 바퀴 돌며 정보를 모으고 각장을 나와 막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의 시야에 저 멀리 길가에 서 있는 육함이 들어왔다. 육함은 다가오는 대영 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대영 상인은 몸집이 크고 뚱뚱했으며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금색 실로 짠 털옷을 입고 뒤에 여러 명의 시종을 거느린 채 대여섯 마리의 낙타를 끌고 있었다. 낙타의 등에는 화물이 잔뜩 실려 있었는데 향기가 코를 찌르는 것을 보니 한 눈에도 대량의 향약을 판매하는 상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각장을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육함이 그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장수가 필사적으로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가 의연한 표정을 짓자 장수가 애원하였다. 주종 두 사람이 밀었다 당겼다 하며 양쪽으로 왔다 갔다 했다. 도순흠은 갑자기 마음이 동해 몸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가 육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장수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한쪽 옆으로 피했다. 육함의 옥처럼 하얀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인사했고 그새 표정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영 상인에게 대영 쪽의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시종 녀석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외숙부께 우스운 꼴을 보이게 됐습니다.”
이렇게까지 결연한 태도를 보인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대영 상인에게 접근해 개인적으로 일을 도모해 보려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도순흠은 딱히 지적할 생각까지는 없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네, 너도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저 앞에 동피면(桐皮面)이랑 삼육전병(三肉饼)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일단 가서 배를 좀 채우자꾸나. 물어볼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거라.”
육함은 약간 초조하고 불편한 눈빛이었다. 그는 그 대영 출신 향약 상인이 각장에 들어가 버리는 걸 보고 참기 힘들어 입술을 깨물며 도순흠을 몇 번 쳐다보았지만 차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도순흠은 이런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바로 앞장서며 길을 안내했다. 그는 몇 걸음을 걷고 나서야 육함이 눈을 내리깔고 풀이 죽은 채 그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장수라는 시동은 오히려 다행스러워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도순흠은 동피면 네 그릇과 삼육전병 두 근을 주문해 절반을 떼서 장수라는 시종에게 주었다. 그리고 도순흠은 육함을 데리고 창가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도순흠은 본래 먹는 걸 좋아해서 국수와 전병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육함은 점잖고 우아하게 먹느라 한참을 먹었는데도 국수를 절반도 다 먹지 못했다.
도순흠은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육함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 대영 상인을 찾아서 뭘 하려 했어? 뭘 물어보려고? 나도 대영 상인들과 꽤 알고 지내는 편이라 그들의 풍습도 얼마 정도는 알고 있으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거라. 내가 네 궁금증을 풀어 주마.”
육함은 이미 그가 자신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걸 알았지만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향약을 어디서 싸게 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각장 밖으로 뛰쳐나가 들어오는 사람을 막고 질문을 해대는 건 멍청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융통성 없는 짓이긴 했다. 도순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경솔하구나. 너처럼 그렇게 하면 제대로 물어보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잘못하면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거나 화를 자초하게 될 수도 있어. 너는 관직에 나아갈 사람이고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인데 재물을 구하려 이리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뭐냐?”
육함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급히 큰돈이 필요합니다. 외숙부께서 절 도와주신다면 조카가 평생 잊지 않고 훗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도순흠은 평생 이런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자기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불쌍한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육함처럼 이유를 설명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고 그저 솔직하게 지금 돈이 필요하니 자신을 도와주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순흠은 곁눈질로 육함을 훑어보았다. 육함은 맑은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만만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갈망이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아이는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드러내고 있는 돈에 대한 갈망은 임근용과 아주 비슷했다. 도순흠은 절로 친근감이 들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느냐?”
한 점의 빛이 육함의 까만 두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살짝 입술을 떨며 불안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금 100냥이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조금은 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
도순흠은 또 웃었다. 황금 100냥밖에 없으면서 황금 20냥짜리 선물을 사서 자신들에게 주다니, 역시 보통이 아닌 아이였다. 그는 독한 사람이 아닌지라 아이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차분하게 말했다.
“봉당이가 어제 나한테 네가 식량 거래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고 말하더구나. 이렇게 널 우연히 만나지 않았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 불러다 이 일을 상의했을 게다. 기왕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네가 날 믿을 수 있다면 그 돈을 나한테 주거라. 내가 너 대신 최선을 다해 운용해서 돈을 벌어 주마.”
육함의 얼굴에 드디어 그의 나이와 어울리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동안 도순흠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 외숙부,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도순흠이 손을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감사할 필요 없다. 이 세상 모든 돈을 나 혼자 다 벌 수는 없지.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란다. 누구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지 않느냐? 나중에 네 상황이 좋아지면 날 대신해 신지와 그 가족들을 챙겨 주면 고맙겠구나.”
육함은 잠시 멍해졌다가 도순흠을 향해 다시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누구나 임근용 남매처럼 복이 많아서 이런 후덕하고 유능하며 호탕하고 자상한 외숙부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임씨 가문의 외숙부들을 떠올린 육함은 자조하며 웃었다. 그들은 임 삼노야와 똑같은 사람들이라 육함을 마치 도둑처럼 대하며 꾸짖고 조금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자신의 친모 쪽 외숙부들을 떠올린 그는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그들은 자식들이 시집 장가를 갈 때마다 이미 시집간 지 오래된 여동생을 찾아 도와달라며 우는소리를 했다.
* * *
성벽과 가까운 성 서쪽에는 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평범한 민가가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 있는 집들은 담장이 낮았고 건물도 높고 큰 것이 드물었다. 작은 청석판이 깔린 좁은 길이 맑은 물에 씻겨 아주 깨끗했고 골목을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니 낮은 담벼락 끝에 놓여 있는 화분에 노랗고, 희고, 빨간 국화가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꽃은 일반적인 품종이라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아주 잘 어울리고 보기 좋았다.
늘 바쁘게 사는 것에 익숙했던 도순흠은 육함을 따라 이 고요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여유를 느꼈다. 그 좁은 골목의 깊은 곳에 고씨 가문의 집이 있었다. 고씨 댁은 주변의 다른 민가와 비교했을 때 느낌이 많이 달랐다. 일단 그 집 벽면에는 어떤 화초도 보이지 않았고 일찌감치 칠이 벗겨진 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거기에 청석판이 깔린 계단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해서 대문 앞에 서기만 해도 낯선 사람을 꺼리는 주인의 기운이 느껴졌다.
도순흠은 육함이 ‘깨끗하고 단정하다’라고 묘사했던 것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집안은 원래 학자 가문이었지만 고씨 부인은 팔자가 사나운 탓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강직한 성품의 그녀는 다행히 손재주가 있어서 수놓는 일을 하며 홀로 집안을 지탱했고 고생스럽게 두 아들을 키웠다.
큰아들은 생계에 쫓겨 공부를 그만두고 남의 집 장부를 맡아보는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스물여섯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어린 아들은 유명한 책벌레였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가 써져 있는 종이라면 절대 놓치려 하지 않았고 남이 책을 읽는 것만 봐도 거기에 사로잡혀 옆에 서서 같이 읽었다. 만약 누군가 책을 빌려 주겠다고 하며 조상님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육함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분을 맺은 걸까? 도순흠은 문을 두드리고 있는 호리호리한 육함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